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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은 Dec 14. 2020

부치지 못한 편지

받는 이: 박수환 님

기억해?


아빠가 만들어 놓은 평상 위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서 쫑알거리던 여름 말이야.

농협에서 나눠 준 투박한 부채로 할머니가 살랑살랑 부쳐줬잖아.

나는 아직 어려서 안 덥다고 내가 부쳐주겠다고 했는데, 할머니는 이마에 삐질 거리는 내 땀을 쓱 닦으면서

‘허허’하고 웃었어. 나 진짜 더운 건 아니었어 할머니. 그냥 동네 한 바퀴 뛰고 와서 땀이 난 거다?.

지금 내가 그렇게 우기면 할머니는 또 웃으면서 머리칼만 쓸어 넘겨줄 거야. 그렇지?


그때 오래 누워 있었어. 할머니랑 이야기하는 시간이 좋아서 욕심껏 누렸던 것 같아.

매미는 왜 쉬지 않고 우는지, 여름에는 파리랑 모기가 왜 많은지, 수박은 여름에만 먹을 수 있는 건지. 

궁금한 건 다 물었는데, 신기하게 할머니는 다 알고 있었어. 매미는 왜 우냐니까 할머니가 그랬잖아.

‘죽기 싫으면 울어야지. 별수 없어’라고.

지금 다시 떠올려도 너무 귀엽고 웃기다. 이건 할머니 특유의 어투로 들어야 알 수 있는 귀여움이야.  

내가 장난치는지도 모르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바쁜 입과, 부채를 부치는 손이 엇박자로 어울려 한결같은 바람을 일으켰는데, 노곤 노곤 낮잠이 쏟아졌어. 느슨하고 청량한 여름 위에서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깨우지 않아도 됐던 그날.


이젠 그런 여름의 낮잠은 내게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 대신 내가 누군가에게 알려줄 순 있겠지.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 기억하냐고 물으면 기억해 줄 사람이 나하고 할머닌데, 이젠 나 혼자 떠들어야 해. 좋은 기억, 좋은 일, 좋은 추억. 할머니가 괜찮다고 한사코 손을 흔들어도 깍짓손 하고 할머니 집까지 함께 걸어갔던 길, 가지런한 손톱에 분홍색 매니큐어를 발라주던 거실 소파, 메뚜기 잡는 나를 나무라던 뒷길, 학교 끝나면 집 앞 계단에 나란히 앉아서 잘생긴 우리 집 끝돌이를 흉보던 할머니. 할머니와 함께한 샛노랗던 여름을 나 혼자만 알고 있어. 그게 슬프다. 한 바퀴만 더 돌자고 할 걸, 노란색 매니큐어도 발라줄 걸, 나무라는 할머니에게 애교 섞인 포옹으로 한 번 안겨볼 걸, '이제 가야지'하고 일어서던 할머니를 붙잡고 끝돌이 칭찬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좀 더 채울걸. 그래 볼걸.


이사 가고 나서 할머니를 보러 갔었어. 그날, 그때도 여름이었다 할머니. 동네 슈퍼 앞 나무 아래에서 친구들이랑 수박을 먹고 있는 할머니에게 깜짝으로 나타났을 때, 할머니가 반가워하던 눈동자랑 표정이 지금은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어. 사랑으로 가득 찬 할머니가 나를 와락 안고 반겨줬는데 말이야.

쟁반 위에 뭉텅뭉텅 썰린 것 중 가장 큰 조각을 골라서 나한테 쥐여주던 수박 한 조각. 비밀인 것처럼 나를 한쪽으로 데려가서 더 먹고 싶으면 말하라던 할머니. 할머니 너무 늦게 말했나 봐. 더 먹고 싶은데.


그해 여름 이후로 나는 수박이 싫어졌어. 그날만큼 달고 시원한 수박을 못 먹어서 그런가 봐.

여름은 매년 잊지 않고 찾아오는데 할머니는 그렇지 않아서 나는 서하로 가.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이 바래지 않도록, 옅어지지 않도록 떠올리고 다시 밟고 걸어. 할머니가 좋아하던 오르막길 옆 벤치는 사라졌어. 슈퍼 앞 나무랑 평상은 그대로야!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땐, '나 서하 다녀올게'라고 말해.

그럼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 같아서. 할머니가 거기에 있는 것 같아서.

우리 동네, 할머니가 늘 있던 서하로 내일도 모레도 갈게.

기억으로 같이 걸어줘.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할머니, 우리 수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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