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스물아홉, 내일은 서른.]
흔히들 말하는 불안하고 위태로우며 불완전한 아홉수를 맞이한 이십 대의 끝에서, 또 가장 완전한 서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스물아홉은 제게 행복이었어요. 다른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어요. 누구나 아는 단어로, 아무렇게 들어도 모양새를 알아차리는 행복 밖에요. 사실 아홉수 보다, 올 한 해가 행복했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가져요. 기어이 없는 사실을 토로하기를 기대하는 눈빛을 마주하며 대화를 이어갔던 적이 있어요.
- 스물아홉이라고?
처음 만난 날, 그가 말했어요. 반말까지 걸고넘어지자면, 가을의 고즈넉한 햇살 안에서 드립 커피를 정성스럽게 내리는 모습을 해칠 것 같아서 ‘네’하고 간단히 대답했었어요.
필터를 거쳐 천천히 떨어지는 커피를 옆으로 밀고 이번엔 커피잔 가장자리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잔을 데우고 있었어요. 그리고 말했죠.
- 결혼은?
생각이 없다고 말했어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고도 했어요. 그리고 서른이 기대되고 반짝반짝할 것 같다고 했죠. 말끝에 그의 표정이 보였어요. 그가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는 ‘좋은 일이 아니야.’ 그랬어요.
좋지 않은 일은 뭘까요?.
다만, 그날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빈번하게 일어났던 서른을 지내온 어른들과의 대화를 함축한 거라고 생각해요. 서른에 대해, 스물아홉에 대한 보편적인 태도가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낀 건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커피잔을 데워주던 정성처럼 그들의 말에는 악의가 없었어요. 그래요, 악의가 없다는 것이 슬펐어요. 어쩌면 진심 어린 조언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 찝찝한 대화를 마무리하는 건 어디까지나 잘 못 됐다는 걸 알아차린 저의 몫이었어요.
반대편에 앉은 모든 그들은 농담과 조언이라는 무지를 바탕으로 완성된 문장을 뱉곤 하죠.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이 왜 어려울까요. 손톱의 모양과 눈꼬리, 입술의 두께, 머리카락의 색, 눈동자의 크기까지, 우리라고 묶어도 다른 것 투성이인 어른은 자신이 걸어온 길이 유일한 내일이라 믿고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한눈에 봐도 다른데. 어릴 때부터 똑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서체를 따라 적으며 한글을 익히지만 저마다의 글씨체를 갖는 것처럼요.
제겐 반짝반짝한 서른인 거예요. 아홉수의 징크스가 아닌, 스물아홉은 기대와 꿈, 희망, 도전으로 가득해서 더 행복했던 날을 꼽을 수 없던 한 해였어요. 숨겨둔 속사정 같은 건 없이 사사로운 도약이었죠.
쉽게 말하곤 해요. 이십 대는 청춘이라고. 하지만 청춘이란 명사가 갖는 순수한 뜻처럼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을 만끽하는 이십 대는 과연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해요. 제가 가졌던 건 단지 시간의 부유였고 저의 이십 대 안에는 극심한 빈부격차가 있었어요. 물론 ‘부’에 치중된 관심이 ‘빈’의 격차를 알아줄 리 만무했죠. 시간의 부를 누리기 위해서는 나머지 ‘빈’을 채워야 했어요. 격차의 범위를 좁히기 위해 대부분은 시간을 쓰죠.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채워진 ‘나머지’가 아닌, 바닥난 시간의 저울이 저만치 올라간 걸 마주해요. 타고난 유일한 부를 상실한 뒤였죠. 하루하루 지갑의 사정을 마주하며 매일 장터에서 내놓을게 시간뿐인 저는 적어도 그랬어요. 청춘의 봄은 평범하지 않고, 평등하지 않게 주어졌죠. 이십 대에 아프지 않고 돋아난 청춘이 있을까요?.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청춘이 있을까요?. 이십 대의 우리를 무어라 불러야 알맞은 이름으로 무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십 대의 끝에서 돌아보니, 그곳에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거기에 제가 있었어요. 어른들의 말에 속아 조급해하지 않기를, 나이라는 틀에 얽매여 순간을 놓치지 말기를. 다 지나온 뒤에야 ‘어렸네’하고 후회하지 않기를. ‘너희 때는 다 괜찮을 나이야!’라는 말에 ‘괜찮다’는 말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기를. 사실 이 모든 말은 저에게 해주고 싶었어요.
이십 대에 들어선 그들의 모습에 투영된 제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위로이자, 응원이에요.
모르고, 모르다가 스물아홉을 맞아도 좋아요.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를 일은, 겪기 전에 지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이는, 내가 자연스럽게 신체적으로 알려줄 때, 그때 알아차리면 돼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이에 대해 말하거든 도망치세요. 그리고 되도록 많이 꿈꾸고, 시간의 부유를 누리세요.
가끔은 오늘만 사는 나를 눈감아주세요.
입맛에 맞게 이십 대를 부를 때 있잖아요. ‘새파랗게 어린것들’이라든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 혹은 ‘요즘 것들’ 같은.
그리고 이렇게도 말하더라고요. ‘적은 나이가 아니네요?’ 스물다섯에 들었던 말이었죠. ‘이제 자리 잡아야지! 돈 모아서 시집갈 준비 해야지.’라는 말도 들었네요. 머리에 피는 안 말랐지만 나이가 적지도 않은, 어른으로도, 아이로도 인정받지 못했던 스물넷의 저는 결심을 했던 것 같아요. 무던하게 살지 않겠다고, 나는 기어코 유별난 아이가 되겠다고요. 그때부터 ‘이하은’으로 살았어요. 흔들리거나, 아플 땐 참지 않고 불안한 삶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어요. 어디까지나 책임은 내가 지는 거니까.
내가 믿는 후원자는 자신이었어요. 귀를 닫는 건 세상과의 단절이 아닌, 나와의 연락이었어요.
한 번도 익숙한 나이는 없었어요. 태어나 먹어 본 나이는 모두 처음이었고, 나이의 고유한 맛에 대해 알게 될 때쯤이면 어김없이 12월이었어요. 허겁지겁 남은 나이를 먹다 보면 체하기 일 수였죠.
스물아홉엔 떡국을 향부터 천천히 음미했어요. 떡부터 먹을지, 국물을 먼저 마실지 고민도 하면서. 바닥을 드러낸 그릇을 내려놓고 나니 12월이었어요. 내일 먹을 떡국은 어떤 향을 풍길지, 어떤 맛으로 시간을 즐겁게 할지 기대가 됐어요. 식탁엔 저와 나이 한 그릇만 있으면 돼요. 열두 달 중 단 하루라도 좋으니, 눈치 보지 않는, 질문이 쏟아지지 않는 식탁에서 나이를 맞이하길 바라요. 특별할 것 없는 고요한 식탁엔 서먹한 자신이 있겠죠. 누군가에게 했을 칭찬과 고백을 수줍게 뱉어내 봐요. 듣고 싶었던 말이 있다면, 서슴없이 자신에게 해주세요. 어쩌면 내가 필요했던 건, '나중에'란 말로 외면하던 나 자신이었을 테니.
부단히 자라고 있어요. 받아쓰기 백 점으로 칭찬받을 순 없지만, 인색해진 칭찬에 투정 부리지 않으면서 아주아주 무던하게 자라고 있는 중이에요.
이야기해 주고 싶었어요. 우리는 여전히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중이라고.
조언은 사양할게요. 가혹한 희망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