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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보이기만 해도 죽는 마음

by 하얀





어렸을 때부터 욕심이 많았다. 욕심이 많아서 동생이 갖고 싶냐는 엄마 아빠의 질문에도 내 엄마 뺏어가지 말라고, 동생 싫다고 했다. 사촌들과 모이거나 엄마가 조금이라도 나보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면 싫어했었다. 물건에 집착하지 않았고 엄마를 집착만큼이나 사랑했다. 이건 내 어린 욕심.

어릴 땐 양보를 잘하는 어린이에게 칭찬을 해준다. 나는 칭찬을 좋아한다. 그래서 양보하기를 잘했다.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나중엔 잊힐 물건, 칭찬받는 게 더 좋았다. 좋은 물건을 갖고 싶었던 적이 없었기에 비싼 걸 양보한 적도 없고 나중에 필요하면 새로 사면 될 일이었다. 예쁨 받는 일이 좋아서 양보에 쉬웠다.

자라고 보니 내가 혼자 해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내가 혼자 사야 하는 것,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많아졌다. 기회도 욕심났고 돈도, 사랑도 성적도 욕심이 났다. 애초에 될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들엔 쉽게 흥미를 잃었고 결국 사람에 집착하게 됐다. 좋은 사람인 것 같으면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사람이 물고 올 기회를 엿보고 날 사랑하길 기대했다. 집착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욕심은 늘어서 사람인데도 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욕심인 걸 알았고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내게 독이 되는 걸 알면서도 사랑받길 갈망했고 예쁨 받길 좋아했다. 예뻐 보이기 위해 불쌍해 보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게 누구든. 내가 사랑받고 싶은 상대가 나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걸 정말이지 너무 싫어해서 싫어하거나 내 사람으로 만들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집착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버려야 했을 습관이다. 남한테 받는 사랑이 한철 꽃이라는 걸 빠르게 알았어야 했다. 정이 많고 사람 좋아하는 성격으로 둔갑하고 있는 나는 사실 사람한테 집착하길 그만두지 못했다. 사람을 넘어서 물건에도 집착한다. 버리는 건 곧잘 하면서 빌려주는 건 못해서 기어코 욕심이 많다는 얘길 듣는다. 내 물건을 양보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이지만 습관처럼 욕심부리는 게 그 기저에 있다는 걸 알기에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습관이다.

욕심이 많다. 다 가지고 싶고 놓치기 싫고 내가 최고였으면 좋겠다. 사실 이런 내 성격이 가끔은 장점처럼 보일 때가 있다. 잘하는 일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 하고 재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되든 안 되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건 누가 뭐래도 참 잘한다. 그런데 그 이면에 최고가 아니면 하기 싫어하고 내가 잘하는 일이 아니면 시작조차 하길 싫어한다는 점이 있다는 게 문제다. 다 그렇다곤 하는데, 사실 싫어하면서도 해야 할 건 하는데, 그래도 조금 더 욕심부리면 남들만큼은 할 수 있을 일도 하질 않는다는 게 답답하다.

그런 주제에 열등감은 많아서, 잘하는 사람을 보면 눈길을 흐리고 기어코 못하는 것을 찾아내서 그 점만 바라본다. 그걸 위로 삼아서 나는 도전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안주한다. 차라리 나 혼자 열등감 느끼고 혼자 골머리 앓으면 그건 나을까, 더 나아가 상대방에게 내가 이렇게 속 좁은 사람이라는 걸 숨기지 못한다. 말을 예쁘게 하면서도 좋은 길은 알려주지 않고 내가 보기에 좋지 않은 방향으로만 안내한다. 그 와중에 양심은 있어서 최악은 아니고 차선 정도로.

최근에는 나의 이 더러운 열등감을 직접적으로 고백하기도 했다. 내가 잘하고 싶어 하고 잘해야만 하는 일에서 잘하는 사람과 대화하다가 당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음을 털어놨다. 나는 결코 그 일을 좋아하게 될 수 없을 것 같은데 당신은 잘해서 열등감을 느낀다고 했다. 사실 내가 그 일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그 사람을 향한 열등감 때문인데, 그 와중에도 속에 있는 마음은 숨기고 예쁘게 꾸민 포장지만 보여줬다.

나는 언어에 재능이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좋아하는데 실력을 쌓으려고 노력한 적이 없어서 할 줄 모른다. 방법 자체를 모르는 것에 가깝다. 아직 단어 외우는 것도 느리고 작문도 안 좋은데 어쩌다 글만 많이 써봐서 어떻게 쓰는지는 알고 있는 상태가 내 현 위치이다. 영어 배우러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답이 나온다. 남들은 한국에서도 잘만 하는 영어를 환경 탓하며 외국 나와서 학원까지 다니며 배우는 것이 참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는데 어떻게 구실 하나 잘 만들어서 여기까지 왔다.

그래도 영어는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게 있고 읽어온 게 있어서 나름 밥 벌어먹고 잘 살고 있다. 근데 전공이라는 스페인어는 만 18세에 처음 배워서, 남들 몇 년씩 걸리는 걸 고작 두 학기, 6개월 배우고 당장 스피킹 수업을 들으라는 게 겁이 났다. 그래서 도망쳤다. 내 구실이었다. 성적 못 받을까, 무서워서 일 년 만 도망치겠다는 게 이리저리 꼬이고 꼬여서 결국은 잘 사는 것처럼 보이게 됐다.

고등학교 다니던 때에는, 지금보다 순위가 더 중요했던 때엔 신경도 안 쓰이던 석차가 이제 와서 신경이 쓰이고 학점을 못 받는 게, 내 예상만큼 안 나오는 게 죽고 싶을 만큼 짜증 나서 내가 날 이상하게 여겼다. 학과가 아니라 학교를 보고 들어온 과 생활은 내내 내가 과에 불만족하게 했다. 학교만 다닐 수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교양 성적만 잘 나오면, 그래도 장학금 받을 수만 있으면, 하는 심정으로 학교에 다녔는데, 아니었다.

노력했으면 될 일도 안 되게, 탓하고 미루고 짜증 내느라 시간을 버렸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그냥 놔버리고 화내고 울고 쉽게 나를 해치고 남을 원망했다. 예서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정작 나는 스카이 캐슬 1화도 다 보지 않은 사람인데도, 그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나도 내가 참 어색했다. 내가 성적에 신경 쓰는 날이 오다니, 싶다가도 돈과 상장이 걸려있으면 글이든 그림이든 죽어라 했던 내가 생각나서 단순히 돈이 문제겠거니 했다.

전부 아니고 그냥 1등이 하고 싶었더랬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공부를 잘한다. 공부가 아니더라도, 성적이 좋다. 열등감이 들었다. 잘하지도 못하는 공부에 시간 쓴 것부터 짜증이 났다. 학창 시절엔 공부할 시간에 글을 썼고 공모전을 나갔고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내가 잘하는 걸 할 때만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살아 있으려고 하고 싶은 것만 했다. 근데 그걸 참고하기 싫은 것도 했더니 돌아오는 게 열등감이라니.

지난해, 열등감 하나로 살았다. 오랜만에 성적이 좋아봤고 오랜만에 남들이 하는 만큼 노력했고 오랜만에 이불 밖에 있는 기분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해야 하는 일을 해내는 날 보면서 자부심도 느꼈다. 근데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만큼 실망스럽고 좌절하게 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좌절했다. 성적을 확인하고 또, 또, 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게 내 최선이었다고 생각했던 게 자기 합리화였다는 걸 깨닫고 나한테 실망했다. 그게 정말 내 최선이었고 그 이상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이 있었고 나를 스스로 연민하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는데도 그렇게 생각했다. 돌아가도 할 수 있는 건 없었을 걸 알면서도 일어나지 않을 상상을, 그때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지금도 열등감에 꽉 차서 살고 있다. 그 감정이 날 나아가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인 걸 아는데, 버거운 것도 사실이다. 내가 하는 일의 이유가 나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 남을 이기려는 집착, 칭찬받으려는 욕구, 예뻐 보이려는 열망 같은 것들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나는 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사실 이런 고민을 학생 때 겪고 어른이 되었어야 했는데, 이제야 그 과정에 있다는 사실 자체도 수치스럽고, 매번 한 발자국 씩 늦는 내가 부끄럽지만, 그게 나라면 견뎌야 한다는 걸 알기에 내가 그나마 잘하는 글로 풀어낸다.

뭘 해야 하는지는 아직도 알 길이 없고 해결책을 찾고자 글을 쓴 것도 아니다. 글로 풀어내면, 내 추잡한 마음을 남들도 알게 되면, 그러면 그나마 괜찮지 않을까, 불안하고 원인도 모르는 더러운 집착, 따위의 것들이 날 위협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적는 것이다.

때로는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해결되는 마음들이 있다. 빛을 쬐면 죽는 벌레처럼 세상 밖에 나오면 죽는 마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