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읽기
차이의 인식이, 혹은 차이의 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 자체가 일종의 유토피아를 나타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상이한 것이 나란히 존속하며 서로를 말살하지 않는다는 것, 또 상이한 것이 다른 것에다 발전의 여지를 허용한다는 것, 그리고- 이 점을 덧붙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상이한 것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 이는 본래 어떤 화해된 세계의 꿈일 것입니다.(번역본 132쪽)
아도르노가 1940년대에 미국에서 경험주의자들과 연구했던 권위주의적 성격의 내용을 보면 권위주의자들의 특징, 파시스트들 특징 중 하나가 차이 나는 것들, 새로운 것들에 대한 경험을 다 거부한다는 것이다.
습관적인 것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자기가 정한 틀 안에서만 움직이려고 한다는 것. 그러니까 차이들에 대해 존중을 못 하는 것. 이건 아주 중요한 권위주의의 특징이라고 본다. 하나 더 추가하면 거대한 것, 위대한 것, 큰 것, 막강한 힘에 대한 자신의 동일시가 있다.
자신을 강력한 힘과 동일시하는 태도. OOO을 자기가 만들었다. 내가 OOO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OOO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OOO이 우리 편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권위주의의 중요한 특징이다. 거기에는 좌파, 우파가 없다고 본다.
이처럼 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도 중요한 특징인데 권위주의적 성격에 대한 얘기가 변증법에든 미학에든 상당히 스며 들어가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런 걸 많이 갖고 있다. 국회에 한 번 갔다 온 사람은 또 나간다.
윗사람에 대한 절대복종, 아랫사람에 대한 가차 없는 무시, 경멸, 냉소, 그다음에 반민주주의 그다음에 반평등주의. 아도르노 논리는 반권위주의다.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걸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게 어떻게 보면 오늘날 신좌파 문화의 기저다.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평등사회를 추구한다면 당연히 존중해야 하는 부분이다. 문제는 그게 사회 구조 때문에 생기기 때문에 그 사회 구조를 바꾸지 않고 말로만 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상이한 것을 참아주지 못하는 것, 자기하고 다른 얘기 나오면 못 견딘다는 것이다. 상이한 것에 대한 이 비관용이 몇 가지로 연결된다. 상이한 것을 접촉하는 것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것이다. 접촉 불안은 “모든 전체주의적인 상황의 표시”(번역본 132쪽)다.
이때 ‘전체주의적’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증법(sie)은 실로 모순이, 그러니까 자체에 근거해, 자체의 원칙에 근거해 그 자체의 말살을 추구하는 상태가 차이의 행복을 실제로 대신하고 있는 현실에 자신을 맞추는 사유입니다.(번역본 132쪽-133쪽)
‘차이의 행복’을 용납하지 않고 경쟁과 이윤 추구라는 자체의 원칙에 따라서 자체를 말살해 가는 자본주의 사회. 돈 돈 돈 하면서 인간을 파괴하는 사회, 나아가서는 전 지구를 초토화하려는 사회. 이게 자본주의 사회다.
이것에 맞춰서 사용한 것이다. 맞춰서란 말은 그걸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 제대로 지적한다. 제대로 반영한다. 그 모순을 밝힌다. 이런 의미다.
이게 참 재미있다. 리카르도를 놓고 부르주아 이론가들이 비난할 때 뭐라고 했냐면 리카르도는 쓸데없이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모순을 만들어냈다. 노동자와 자본가 간에 화해로운 관계를 깨버렸다. 모순을 들고 나와서 적대관계를 조성했다. 이런 얘기한다.
사실은 리카르도는 실제로 존재하는 노동과 자본 간의 적대관계를 이론적으로 그냥 밝힌 것뿐이다. 근데 유럽 부르주아 쪽에서는 거꾸로 리카르도가 그런 모순 관계를 만든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국가보안법부터 해서 우파 이론들은 맑스주의가 사회 갈등을 부추긴다 이렇게 얘기한다. 맑스주의는 사회적 갈등 모순들을 밝혀야 그걸 극복한다고 얘기한다. 그걸 명확하게 의식하지 않고는 우리가 그걸 극복할 방법이 없다.
누가 맞는 건가. 변증법은 그걸 밝히는 이론이다. 현실의 모순에 적합해지려는 이론이다. 적합하다는 것은 그것을 부추기거나 그것을 보존하자는 게 아니라 이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걸 은폐하는 게 아니라.
이 점에서 변증법은 어떤 상태에 대한 부정적 표현입니다.(번역본 133쪽)
어떤 상태라는 건 자본주의 사회인데 서독도 반공주의가 있다. 그래서 아도르노가 함부로 얘기 안 한다. 자본주의라고 딱 얘기도 안 하고 자본주의의 핵심 문제의 모순으로서 노동과 자본 간의 적대 얘기도 안 한다. 그냥 그걸 둘러서 얘기하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이미 아주 단순하게 변증법은 본질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비판적이다. 그것은 일종의 실증 철학 혹은 이른바 세계관 실증 철학 또는 세계관으로서 스스로 정립하여 내세우고 직접 어떤 진리 자체의 현상이라고 주장하며 등장하는 순간 허위가 된다.(번역본 133쪽)
변증법적 유물론은 맑스레닌주의의 세계관이다 그런 아주 기본 테제가 있다. 그것에 대해서 아도르노는 거부한다. 왜 세계관은 아니냐. 세계관이라고 그러면 왜 안 되냐.
철학을 할 때 아도르노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기준이 있다. 하나는 philosophy다. 필로소피에서 philo는 사랑, 욕구, 뭔가 하고 싶어 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 없으면 철학이 안 된다. 그건 생생한 주체의 살아있는 무엇이다.
sophy는 지, 지혜 이것은 그냥 제멋대로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남들이 봐도 일정한 구성력, 설득력이 있어야, 객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야만 철학이 된다 그런 관점이다.
근데 세계관이라는 건 뭘 하나 정해놓으면 그 틀로 자꾸 본다. 그걸 벗어나는 것을 생각하려고 하거나 추가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스피노자주의자야 하면 스피노자적으로만 보려고 그런다. 나는 맑스주의자야 그러면 맑스주의적으로만 보려고 그런다.
아도르노는 그런 걸 넘어서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유주의자 아니냐 하면서 자유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이다. 다른 맑스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전형적인 자유주의네.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그런 면도 좀 있다.
아도르노는 강조하고 있다. 사고에서 어떤 틀에 박히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문제 제기하는데 그렇다고 제멋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받아들인다.
변증법이 옳기 때문에 가겠다가 아니라 생각을 해보니 변증법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게 옳아! 이렇게 가야 돼! 이런 생각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옳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그게 변증법인 것이다. 변증법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가다 보니 변증법 쪽으로 계속 붙는 것이다. 그런 전통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활발하게 굴렀던 전통이 바로 헤겔주의라고 보는 것이다.
헤겔에게 그런 면만 있는 게 아니지만 어쨌든 헤겔에 의해서 그런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자유주의자라고 딱 분류해서 서랍에다 넣어버리면 그런 것에 대해서 아도르노는 ‘행정적 사유’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분류하면 서로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없다. 아니야 나랑 상관없는 거야. 이렇게 된다. 그러니까 자기 성찰도 하고 이렇게 뭔가 현실을 가변적으로, 전체 상황들을 가변적으로 생각하면서 그 속에서 뭔가 핵심을 짚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현실이 비인간적이다. 문제가 있다. 모순이다. 극복해야 한다라는 마인드가 있다. 그런 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2024. 2. 3.
*위 글은 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번역자(홍승용)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테오도어 W.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