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읽기
‘비동일자’ 개념은 아도르노 철학에서 핵심 개념이다. 이른바 계몽적인 이성, 주로 도구적 이성,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는, 전부 돈으로 계산할 수 있고 어떤 틀에다 집어넣어야 하고, 관리될 수 있게 만들어 놓는 그런 현대 사회에서 그걸 좀 벗어나 있는 것들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는데 ‘타자’(Das Andere)도 그중 하나고 비동일자 개념에도 그런 게 항상 섞여 있다.
그렇게 관리되고 정리되고 그런 것을 벗어나 있는, 개념으로 딱 포착돼서 정리되는 게 아닌 그 개념 바깥의 것들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크게 보면 도구적 이성이라는 건 수단의 영역인데 효과적으로 뭘 하기 위한 건데 그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의 목적은 어떻게 보면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하게 같이 잘 살자 하는 것이 목적일 수 있는데 그 목적들은 어디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그 도구가, 수단이 지배하는 그런 사회로 자꾸 되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 도구적 이성에 사로잡히지 않는 그 바깥의 영역이 비동일자 개념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자연도 지배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좋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자연미의 영역, 자연미 그런 것들이 원형이라고 본다.
그런 영역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근데 여기에도 조금 더 복잡한 변증법적인 얘기가 있다. 아도르노가 그렇게 생각하는 역사적인 혹은 사회적인 조건이 있는 것 같고, 그게 절대적인 건 아닌 것 같고. 그건 우리가 따져봐야 한다. 어쨌든. 아도르노한테는 비동일자 문제가 핵심적인 주제다.
우리가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은 대상들을 개념화해갈 때 동일자로 묶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렇게 안 되는 영역은 계속 남는다. 그 영역을 보통은 잘라버린다. 그 개념으로 파악 안 된 걸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고, 이렇게 되는데, 아도르노는 그 영역이야말로 철학이 다뤄야 할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동일시’는 사유에 불가피한 면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동일시하는 것만으로 끝내버리고 비동일자를 배제할 때 이른바 ‘동일성 사유’에 빠진 것이라고 비판을 받는 것이다. 동일시하는 것 때문이라기보다 동일시는 사유의 기본이고 그것에 매몰되는 것, 그것에 대한 자각이나 비판이 없는 것, 이게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끊임없이 사유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개념을 통해서 파악된 것들을 놓고 그것들이 실제 대상과 부합하는지 안 하는지 거기서 빠져나간 것들의 중요성이 뭔지 따지는 작업을 통해서 사유의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념을 통해서 본질을 파악했을 때 파악된 본질이 더 중요하냐 아니면 비동일자 영역이 더 중요하냐, 물을 수 있다. 아도르노는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얘기를 한다.
아도르노가 직관주의는 아니다. 미학이라 하면 직관주의 아닌가. 아도르노의 경우에는 미학도 직관에 모든 걸 맡기지 않는다. 직관은 직관이고 개념은 개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전통적으로 부르주아들이 마음 편하게 즐기고 그다음에 힘든 노동의 개념 영역은 딴 데로 보내고 그런 어떤 물신주의의 형태라고 본다.
음악에서조차도 그런 지적인 작업들, 형식들, 여러 가지 규칙들 이것들이 엄격하게 작용한다고 보고 그것들을 또 직관적인 것들이 간섭해서 끊임없이 바꿔놓고 있다고 본다. 그 상호작용을 보는 것이다.
직관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 간의 상호작용, 어느 하나가 우선이라고 보지도 않고 동시에 기본적으로 인식은 개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동일시’라고 얘기하는 건 계속 간다. 개념을 떠난 직관에 의존하는 사유는 초보적인 단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본다.
변증법은 개념의 운동을 얘기하는 것이다. 개념으로 자기가 본질이라고 봤던 그 문제들을 고정시키고 물신화하는 게 아니라 개념으로부터 넘어서는 것이다. 그걸 넘어서는 것도 개념이고 개념을 통해서 반성을 통해서 이걸 깨야 한다는 것이다.
개념이 아닌 대상을 느낌이 아니라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렇게 개념으로 파악하는 순간 동일자의 딜레마에 빠지는데 그래서 끊임없이 또 자기반성을 통해서 개념으로 파악된 내용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면 유동 내지 변화 이런 걸 강조하는 모든 이론들이 끊임없이 매초 마다 새롭게 뭘 해야 하냐. 그래서 끊임없이 변화만 하고 아무 규율도 없고 무슨 고정된 게 아무것도 없다면 인식이 뭐냐. 그냥 녹아버릴 거다.
그래서 일정한 규율이 필요하고 변증법은 바로 그런 규율을 찾는 것이다. 근데 그게 대상을 죽이고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일정하게 대상을 존중해 가는 가운데 그걸 파악하는 것이다. 비동일자가 동일자일 수도 있으니까.
그럴 때 거기에서 몇 가지 논리가 나온다. 첫째는 개념의 운동이라는 말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헤겔부터 개념의 운동이라는 걸 늘 염두에 둔다. 이걸 a로 봤다가 그다음 단계에서 여러 가지 조건을 보고는 a를 넘어서는 뭘 봤다 그럴 때 그 변화를 어떻게 우리가 포착할 거냐 할 때 아도르노는 ‘미시론’을 얘기했다.
우리가 인식하려고 들면 기존의 인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무언가가 나타날 때 그걸 전체와 관련지어서 다음 단계로. 그걸 초월하는 무엇으로 파악해 가는 지속적인 방법, 이걸 미시론이라고 본 것이다. 내재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걸 끊임없이 봐야 하는 것이다.
내재적으로 본다는 말이 뭐냐 할 때 예컨대 민주주의가 뭐냐 하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의 주인이 되는 체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게 얘기하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그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냐 물어야 한다.
그때 그 자유의 의미가 뭐냐. 진짜 자유로우냐. 그게 상업의 자유일 뿐이지 않느냐. 또는 가진 사람들의 자유일 뿐이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너네가 말하는 자유는 아니지 않냐. 그러면 그걸 넘어서는 다른 사회 시스템을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냐,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대상의 속성, 개념. 이런 것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그것들이 주장하는 바를 실제 대상하고 대질해가면서 그 개념의 내용을 변경해 가는 것, 거기에 그 개념은 이런 것이라고 한 발씩 더 밀고 나가는 것이다.
지젝은 민주주의를 이렇게 얘기한다. 자본주의를 극복하자, 이 말은 전복적인 힘이 없다. 반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는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 자본주의의 주인 기표 노릇을 하고 있는 게 민주주의 개념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이미 누구나 다 쓰기 때문에 반민주주의를 들고 나와야 한다. 바디유를 끌어들여서 그런 주장을 한다.
지젝은 반민주주의를 얘기하는 것이다. 근데 레닌은 민주주의라고 얘기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라는 말 그대로 민주주의가 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평등하게 사회가 굴러가려면 부르주아 논리대로 사회가 굴러가서는 진짜 평등한 사회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민주주의가 말 그대로 가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이런 주장이다.
레닌은 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고 지네들끼리만 좋다. 그걸 넘어서야 진짜 민주주의가 되는 거니까 결국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논리다.
민주주의가 표방한 것을 그대로 밀고 가면 결국 현재의 민주주의에 머물 수 없고 다음 단계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걸 바깥에서 보면서 너네 민주주의라고 떠드는데 그거 엉망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민주주의 안 할 거야. 이게 아닌 것이다.
현실은 계속 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개념도 운동하고 있다. 상황은 기존에 동일시했던 본질이라고 얘기했던 게 있는데 그 관계가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동일자와 비동일자가 지금까지는 그랬는데 연구해 보니까 아닌 것이다. 관계가 역전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상과의 대립 관계에서 자의적으로 내가 개념을 막 바꾸는 게 아니라 항상 그 대상과 대질해서 그 대상에 어울리지 않을 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파악되는 순간 바꾸는 것이다. 항상 변화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인식을 통해서 본질이라고 했지만 사실 알고 보면 아닐 수 있다. 실제로 본질이라고 파악하고 나서 남은 비동일자가 있다. 근데 알고 보면 비동일자가 진짜 본질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동일자와 비동일자, 그 둘의 관계가 전도될 수도 있고 그것이 하나의 개념 파악이 된 것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교정되면서 새로운 동일자로 등장하는 것이고 비동일자였던 것이 동일자로 되는 것이다.
사태 자체를 계속 보면서 그걸로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칸트, 헤겔, 아도르노 셋 중에 보면 그래도 실천의 문제까지 가져가는 건 아도르노다. 유물론 쪽은 그렇게 간다. 칸트, 헤겔은 어쨌든 관념론자니까.
칸트는 비동일자를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헤겔하고 아도르노의 다른 점은 헤겔도 동일자, 비동일자를 같이 보면서 이게 어쨌든 궁극적으로는 총체적으로 합쳐질 수 있다고 보는 건데, 아도르노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갈 수도 있는데 가기 위해서는 계속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걸 향해 가는 과정에는 실천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더 나아가면 아도르노의 그러한 인식이 맑스의 인식과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맑스주의다.
포스트 모던 쪽 하고 좀 달라지는 것이 아도르노도 비동일자, 동일자 이렇게 차이를 얘기한다. 근데 아도르노의 경우는 개념 내지 기표, 기호로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표들의 그물로 해소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비개념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비개념적인 것들을 무시하면 동일성 사유로 빠지는 것이고 관념론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포스트 모던적인 문제의식하고는 좀 다르다. 예컨대 들뢰즈가 말한 것 중에 선험이냐 아니면 경험이냐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유의 자기 분만’이 중요하다. 이렇게 얘기한다.
‘자기 분만’, 아기를 낳듯이 사유의 자기 분만이 중요하다. 아도르노가 보면 말도 안 되는 관념론이다. 아도르노한테는 사유는 항상 그 사유가 아닌 것, 비개념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걸 파악하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유물론은 기본적으로 비개념적인 것들을 상대로 한다는 것이다. 근데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럼 유물론이 기반으로 삼았던 물질적 조건과 변증법은 무슨 관계냐. 그때 루카치는 ‘자연 변증법’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아비판을 했다.
변증법을 역사 영역에서 보려고 했는데 엥겔스는 자연에도 역사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냥 고정불변으로 반복되는 게 아니다. 당연히 변화 발전해 왔다고 본다. 거기도 변증법이 작동한다고 봤다.
아도르노는 헤겔주의 입장에서 인간 노동이 스며들어 가지 않은 자연은 없다. 인간이 대상화하고 인간과 관여하는 모든 자연에는 이미 인간 노동의 흔적들이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다 스며 들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자연 변증법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또 어렵다. 이미 자연 자체에 인간 노동의 흔적들이 스며들어 있다고 보는 거니까.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변화 발전 이런 것들은 실천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볼 때 물질적 토대라는 것을 실체화해서 어떤 고정적인 것으로 사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디아마트는 자꾸 그걸 실체화해서 제1 원리처럼 만들어 놓았다고, 그것에 따라서 무슨 세계관 과학 만들고 그걸 외우게 만들고 하는 그런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변증법적인 관점에서는 그것도 가변적이다.
실천에 의해서 변화 발전해 가는 과정과 더불어 사고가 같이 또 움직여야 하는데 그것을 고정시켜 놓고 외우라는 것 가지고는 답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제 디아마트는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024. 2. 11.
*위 글은 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번역자(홍승용)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테오도어 W.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