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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Feb 27. 2024

인간의 인식 조건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읽기

물론 과학은 우리의 살아있는 경험이 타당한 한 다름 아닌 과학적 명제들로 변형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변형이야말로 지극히 문제적이며 결코 진지하게 실행되지 않았습니다.(번역본 167쪽)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거의 대부분의 이론들이 그렇다. 어떤 이론을 보더라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아주 당연한 듯한 문제들, 현실에서 나타나는 그 문제들을 지적하고 정리하고 그걸 일반화해서 추상적인 개념이나 법칙으로 만들고 그것에 비추어 해결책 내지는 답을 찾고 이런 과정들을 흔히 하는 걸 본다.      


근데 첫 번째 파트에서는 속이기가 조금은 어렵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현실적으로 있는 것들이다. 근데 일반화할 때는 벌써 오류들이 등장할 수 있다. 추상하고 개념화할 때는 벌써 자기 틀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 안 맞는 건 빼버리고 그다음에 조금은 왜곡도 하고 해서 일반화 과정에서 벌써 오류가 생긴다. 자기 멋대로 편한 이데올로기로 만들어내고 그거 가지고 해결책을 내놓는 거는 말도 안 되고. 엉뚱한 곳으로 가고 이러는 게 보통 이데올로기들의 기본 속성이다.     


이데올로기들이 거짓말만 하는 건 아니다. 항상 근거를 가지고 얘기한다. 그거는 부인할 수 없는 개별 자료들이다. 현실 자료들을 가지고 현실 문제가 이렇다. 자본주의가 이래서 문제다. 하는데 그거를 일반화하고 추상화할 때는 엉뚱한 식으로 하고 그다음에 그걸 가지고 또 답을 찾을 때는 엉뚱한 답이 나오고 이럴 수가 있다.      

아도르노도 그런 문제의식을 가진 것 같다. 경험들, 생생한 것들, 개별적인 것들 이것들을 과학화해야 하는데 그게 제대로 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항상 거기에 오류가 생길 수 있다. 또는 왜곡이 생긴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에 타당성을 부여한 아담 스미스의 이론 ‘보이지 않는 손’이 알아서 시장을 잘 보살필 것이다. 이랬는데 그의 이론 전체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유명한 단어가 한 번밖에 안 나온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나 다른 외부의 이익이 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 한마디에 달라붙어서 아담 스미스를 띄워주면서 이게 작동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이때까지 계속 흘러왔다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 바로 다음에 리카르도가 등장한다. 리카르도도 그렇고 아담 스미스도 그랬던 것 같고 빈부 격차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나름 사회적 갈등, 모순들을 이론 속에서 소화해 내려고 노력을 하는데 부르주아 이론가들은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사회를 왜 모순 속에서 보려고 그러냐. 리카르도 네가 모순 갈등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다. 리카르도는 현실의 모순을 본 것이다. 그래서 그걸 극복하려면 그걸 제대로 밝혀서 뭔가 답을 찾아야 하는데 부르주아 이론가들이 보면 리카르도 때문에 자꾸 모순을 비춰서 모순을 만들고 있다 그런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니까 리카르도가 맞는 말을 했는데 부르주아 이론가들이 왜곡할 수도 있다. 왜곡하는 거냐 아니면 리카르도가 처음부터 왜곡한 거냐.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현실은 모순만 있는 게 아니라 협력 관계도 있고 차이들로 같이 공존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근데 왜 굳이 모순을 끄집어내서 그러느냐. 리카로드가 볼 때는 그 모순을 제대로 짚어야만 현실적 불행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맑스는 그걸 더 극단화한 것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인 여러 가지 출발 전제들이라든지 이런 것에 따라서 일반화하는 과정은 항상 왜곡되거나 한쪽으로 쏠리거나 할 수밖에 없다.




전체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개별 계기들에 비해 하나의 추상 산물인 것과 전적으로 똑같이 개별자도 그 나름으로 우리 경험의 총체에 비할 때 하나의 추상 산물입니다.(번역본 167~168쪽)
 

개별자를 딱 뜯어내는 것도 벌써 추상이다. 개별자는 훨씬 더 직접적으로 빨리 알게 될 것 같다. 근데 그렇게 개별자로 딱 분류해 내는 것은 추상이다.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추상이다. 헤겔 『정신현상학』에 보면 이 구체적인 속성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는 ‘지금, 여기’에 있는 ‘이것’ 하는 것이다.     


‘이것’이라는 것은 예컨대 소금이 흰색, 짠맛, 입방체 해서 여러 요소들이 있어서 요런 요런 요소로 소금이 이루어진다는 분석적인 사고도 하고 그걸 하나로 묶어보는 종합적인 사고도 하고 그다음에 주체하고 관계 지워서도 보고 여러 가지를 한다.      


그런데 그런 것 이전에 그냥 지금 여기에 있는 ‘이것’ 할 때 그건 그런 구체적인 규정이 없는 상태다. 근데 ‘이것’이라는 것 자체도 조금 전에 이것이지만 지금은 이것이 좀 다르다. 그러니까 아주 당연한 것 같아도 그것도 이미 추상이다. 직관의 아주 대표적인 산물인 것 같은데 직관의 결과 같지만 아니다. 추상물이라는 것이다.
 
추상물이라는 것은 생각이 개입됐다는 것이다. 이미 오성이 작동한다. 여전히 지금도 이것이다. 아까의 이것과 분명히 다른데 그런데도 이것으로 계속 볼 수 있다는 것은 추상화하지 않고는 안 된다.      


여기 이게 ‘컵’이라고 얘기하는 순간 이미 추상이기 때문에 이것은 관념의 산물이다. 이게 헤겔 논리다. 관념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그 자체와 관념의 산물 간에 모순이 있다. 그것으로 인해서 작동한다. 운동한다.
 



아도르노는 우리가 식물계, 동물계 종·속·과·목·강·문·계로 이렇게 분류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는 아니고 필요한 만큼 하라는 것이다. 하는데 해놓고 보면 항상 거기에 그렇게 분류해서는 안 될 또는 그 분류를 넘어서는 아니면 분류 때문에 생기는 여러 가지 억지들이 따라 나오는 걸 보면서 그걸 넘어서자는 것이다.
 
 분류를 하자면 결국은 그 경계선에서 인간이 정해서 이건 이쪽이야. 이건 이쪽이야 이렇게 하기 마련이니까. 결국은 그게 좀 안 맞아 들어가는 게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분리법이 의미 없다든지 그런 건 아니다.     


개가 사물들을 볼 때 사람을 대할 때 먼저 전체 분위기를 안다는 것이다. 괜찮은 사람이다 싶으면 꼬리치고 조금 평범하면 관심도 없고. 좀 거지 같으면 짖어댄다는 것이다. 개도 그래서 사람이랑 뭐 크게 다르냐. 분류한다는 거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먼저 파악한다는 거다. 개한테 내가 뭘 주거나 쓰다듬기 전에 벌써 안다는 것이다.      


어린애가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아 하면 운다는 것이다. 그럴 때 아버지가 화가 났구나 하는 것은 나중에 파악하는 거고 먼저 집안 분위기를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를 먼저 느끼는 그런 부분도 있다. 어린애가 분석해서 처음부터 차곡차곡 알아서 전체 집안 분위기가 이렇게 된 이유는 뭐야 하고 과학자가 돼서 얘기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먼저 분위기가 다가올 수 있다.

     



 아도르노의 기본에 이런 건 있다. 칸트는 선험적 주체 그러니까 그렇게 인식할 능력을 갖춘 감성 오성 이성을 갖추고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 형식을 갖추고 있는 인간이라고 선험적인 존재를 상정하는데 아도르노에게 그것은 무의식적인 사회적 주체다.      


의식하지 않아도 오랜 역사적 과정 속에서 형성된 사회적 산물로서의 주체다. 자기가 어떤 사회적 존재라는 걸 의식하지 않더라도 이미 사회적 주체다. 이런 주장을 한다. 맑스는 그 비슷한 얘기를 또 따로 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오감, 내려오는 것은 세계사의 산물이다. 세계사의 업적이다 그런 표현을 한다.     


세계사의 산물이 그냥 우리가 오늘날 시각적으로 자명하게 받아들이고 또 내 눈은 당연히 이렇게 보고 귀는 이렇게 듣고 그렇게 보는 눈 그렇게 보는 감각이라는 것 자체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다.
 

장기 구조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것’을 브로델이 ‘장기 지속 구조’라고 이야기한다. 본성이라고도 표현한다. 인간의 본성 또는 유적 존재 등등 그 개념들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다. 그걸 의식하지 않을 뿐이지 사실은 사회적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게 무슨 초역사적인 선험적인 그런 게 아니라고 한다. 유전의 결과물일 뿐이고 시간 공간이라는 객관적인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이게 가변적이지만 칸트주의에 대해서는 유물론 쪽에서는 부분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칸트가 노력한 게 있다. 가능한 한 보편타당한 인식으로 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간이 맨날 니 보는 거하고 내 보는 게 완전히 달라도 상관없이 살 수는 없다.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된 인식, 보편타당한 것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그것보다 또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 그런 현상 개념에 담겨 있는 인간 주체의 인식 조건에 대한 반성이다.      


인간이 인식할 때 어떤 조건 아래에서 인식하는가. 칸트는 나름대로 인간학적인 조건을 찾으려고 노력한 게 아닌가 하는 것이고, 그렇게 찾았다고 얘기한 것들이 헤겔쯤 가면 벌써 또 막 흔들리기 시작한다.     


맑스한테 가면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조건이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다. 경제적 토대가 더 결정적이라고 보는 것이고, 그에 따라서 인간의 의식이라는 게 어떻게 결정되는가. 니체는 권력의 문제, 프로이트한테 가면 성적인 충동들 이런 것들이 인간의 의식 구조를 끊임없이 형성해 나온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칸트는 그 출발점에 있는 것이다. 반성, 그러니까 인간의 주체적 조건에 대한 반성의 출발점에 있는 것이다.          



2024. 2. 27.



*위 글은 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번역자(홍승용)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테오도어 W.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출판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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