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읽기
하지만 명료화, 개념들이 자기 -자신- 의식하기는 헤겔의 경우에 그 나름으로 개념들 자체의 진리의 한 요소이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그와 같은 추상적 규정은 일단 타당한 것처럼 보이고, 또 즉자적으로 타당할지라도, 대자적으로는, 그 자체 내 반성이라는 척도에 따르면 불충분하고 바로 허위인 것입니다.(번역본 191쪽)
이런 말들은 얼핏 보면 궤변적인 것 같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그럴 것 같다. 아도르노 설명으로는 헤겔에게서 구체는 제한된 연관 속에서 자기반성이 이루어지는 단계, 추상은 그게 안 되고 전개되지 않고 일면적인 걸 떼어낸 것, 개별화된 것, 손에 잡히더라도 개별화돼서 달랑 그렇게 얘기할 때는 추상적이고 아무리 절실해도 그게 제반 맥락과 무관할 때는 구체적인 게 아닌 것이다. 추상적인 것이다.
아도르노는 헤겔의 ‘추상과 구체’를 가져오면서 자기의 연관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연관이 중요하다. 맥락, 연관 이런 것 없이는 짜임 이런 것들 없이는 구체적인 게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게 헤겔의 의미라고 보는 것이다. 헤겔이 이런 식으로 ‘진리는 구체적’이라는 얘기를 한다. 그때 구체적이라는 말은 전개되고 풍부해지고 제반 연관을 만들어내는 단계다. 이것을 달리 생각하면 맑스가 ‘추상에서 구체로’ 강조할 때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은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것이다.
그렇게 얘기할 때 그게 개별적으로 손에 잡히는 걸로 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때 맑스가 규정한 구체는 ‘제반 규정들의 총괄’이다. 하나의 규정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제반 규정들의 총괄로서의 구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를 그냥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 한마디로 끝낼 수도 있지만 그럴 때는 그게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려면 상품부터 해서 가치, 잉여가치, 잉여가치도 절대적 잉여 가치, 상대적 잉여 가치, 특별 잉여 가치, 노동일, 경기 순환 등 온갖 것들이 다 설명되면서 그게 자본주의라고 나왔을 때, [자본론] 1, 2, 3권이 다 펼쳐졌을 때 비로소 자본주의에 대한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자본이 무엇이다’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불확정적 직접성 속에서”(번역본 192쪽) 이 불확정적이다라는 말은 규정되지 않은 확정이다. 이게 ‘확정’이라고 번역도 하고 ‘규정’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특정’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규정되지 않은 직접성, 손에 잡히는 그대로 그냥 눈앞에 있는 대로다. 대표적인 게 ‘이것’이다. ‘이것’은 아무 규정 없이 그냥 직접적으로 있다.
불확정적이고 직접적인 존재는 사실상 무이며, 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번역본 192쪽)
그냥 무無다. 출발 단계의 존재, 전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존재, 그러니까 논리학이 존재에서 출발한다. 그 출발 단계의 존재는 아무 규정 상태 없는 이것, 무나 다를 바 없는 이것 존재는 무다.
존재는 전개돼 나가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냥 절대적인 것이라고 보는 존재 그 자체. 이것은 공허한 것이다. 허상이고 허위다. 근데 아도르노가 이 얘기를 왜 열심히 하냐면 이런 공허한 존재가 바로 하이데거의 존재론들이 표방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이것을 설명한다면 ‘컵’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낱낱이 컵은 물을 담는 데 쓴다. 이런 걸 다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뭐냐 하면 컵. 이걸로 끝날 수 있다.
이것은 컵이지만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아느냐. 무게 아직 모른다. 달아봐야 안다. 그것도 소수 점 몇 자리까지. 아도르노는 그렇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안 하고는 헤겔이 보면 공허한 것이다.
헤겔과 아도르노가 똑같이 말한다. 다만 헤겔은 궁극적으로 그게 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에 다 알 수 있다 까지 간다. 직관이 아니라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주-객이 동일한 단계, 내가 이것에 대해서 모든 걸 알 수 있다 까지 갈 수 있는, 주체와 의식과 대상이 일치하는 단계까지 전개돼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고, 유물론은 그렇게까지 못 간다. 아무리 알아 가도 긴 공백들이 늘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일치한다고 보는 것이고. 유물론 입장에서는 일치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의 의식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것에 대해서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비동일자가 따로 있어서 전제하는 게 아니라 만물은 무궁무진하다는 전제가 있다. 대상들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험적으로 여태까지 뭘 안다고 해왔던 모든 것들, 대상들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헤겔은 전체를 다 알 수 있다고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건 없다. 유물론적으로 보자면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 공백도 계속 나온다. 무로 존재해서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 그러니까 규정이 아무것도 안 돼 있는 그것, 공허한 것이다.
출발점에 있어서의 존재는 아무것도 확정된 게 없다. 특정한 게 없다 그래서 공허하다. 그래서 직관 그 자체. 또는 사유 그 자체. 아무것도 없는, 내용이 없는 그 존재라는 말은 그냥 옴이다. 코끝만 보고 몇 년씩 앉아 있어 봐야 나오는 건 옴밖에 없다.
2024. 3. 7.
*위 글은 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번역자(홍승용)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테오도어 W.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