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읽기
또한 동시에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의 선험적 논리학 둘째 중심부에서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필연적 모순들을 풀고 어떻게 이 모순들에서 벗어날 것인지 지침을 제시하고자 시도합니다. 이는 칸트에게서 볼 수 있는 기이한 사고로 그 상태에 머물고 있으며, 그 자신은 그것을 더 이상 추적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순수이성 비판』에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이 모순들에 얽혀 들어가며, 인식론적인 숙고도 우리를 그로부터 ‘치유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번역본 62쪽)
인식론적으로 가상, 허위라는 걸 아는데도 자꾸 그렇게 빠져들어 간다. 이걸 이상한 말로 표현한다. ‘선험적 가상,’ 그러니까 우리는 그게 틀린 걸 안다. 근데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물속에 막대기를 넣으면 이게 직선인 거 아는데 이상하게 꺾여 보인다. 굴절되어 보이는 것이다. 그 개념을 자유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 자기가 자유롭다는 생각을 각자 다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어떤 제약을 받든 간에 그 안에서 뭔가 자기 나름의 공간이 있다고 경험하는 방식. 이건 인간에게는 종특이다. 그러나 그걸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그 사람의 그런 사고부터 의식, 모든 욕구, 모든 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결정되고 하는 것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그 사람이 그렇게 할 거라는 예측도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지젝이 말하는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동일한 사태를 놓고 주체적 경험 방식으로서 이 선험적 가상과 비슷하게 자기가 그런 필연의 산물이라는 걸 알고 있어도 자기가 그때그때 느끼는 건 자유다. 그걸 피할 수가 없다는 것, 실존 방식이다.
반대로 과학자들은 얼마든지 그 사람이 뭘 어떻게 할 건지 바깥에서 분석하고, 예측하고, 조정하고 할 수 있다. 두 가지가 다 동시에 성립한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을 얘기하면서 다른 데는 다 적용하면서 여기는 적용 안 한다. 자유 문제다.
지젝이 자유 문제에 관심이 많다. 자유 문제를 구제해 내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다. 구멍투성이다. 존재론적으로 이런 논리로 가는 거다. 빈 공간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실질적으로 자유롭다 이런 주장을 한다.
그 빈 공간이라는 게 그럼 진짜 빈 공간이냐 아니면 우리가 그 필연적 관계들을 모를 뿐이냐. 모를 뿐인데 설명이 안 되는 부분들이 있는데. 우리가 빈 공간이라고 받아들이는 거 아니냐.
연결이 덜 된 그 연결을 그동안에 우리가 몰랐던 것들도 다 연구해 보니까 점점 더 많은 게 드러났다. 그렇게 아직까지 밝혀지기 전이라서 빈 공간으로 보이는 건지, 우리가 모르는 것과 그 자체의 빈 공간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빈 공간이 메워지기 전까지는 빈 공간이 있다. 그렇게 보이는 거다. 빈 공간이 아닌데 지금처럼 보인다는 거다. 그러니까 거기는 빈 공간이냐 아니냐는 거는 다 규제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상정하고 끊임없이 연구해 갈 수 있다. 연구해 감으로써 점점 더 밝혀 나가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우연이라는 게 있냐 없냐. 다 필연이냐. 혼선이 있다. 필연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모를 때는 우연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실제로 우연투성인 거다. 전 세계가 우연으로 넘친다. 우리가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까 우연이 있다고 얘기한다.
필연이라는 말 자체가 구멍이나 이런 게 전혀 없어야 하는데 과연 그게 입증이 됐나. 그걸 다 안다는 거는 신도 아니고 말하기 그렇다. 근데 우연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다시 거꾸로 보면 지나고 보면 사실은 그게 우연이 아닌 거다. 내가 봤을 때는 우연이 아니라 나랑 접점이 있으면 그건 완전히 우연이라고만 볼 수 없는 거다.
근데 우리가 필연이라고 인식해서 확신하게 되는 뭔가 자료를 긁어모아서 이건 필연이었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필연이냐 그냥 몇 가지만 연결해서 필연이라고 자기가 우기는 거냐. 그러니까 사이비 필연 아니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필연인지 아니면 앉아 있다 말고 그냥 튀어나갈 수도 있다. 그런 문제에서는 필연이냐 우연이냐 따져야 하느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필연이라는 개념을 쉽게 쓰기가 참 어렵다.
그렇지만 필연이라는 거를 규제적 이념으로 전제하고 구체적인 관계들을 끊임없이 우리가 연구하자 하는 자세는 과학적이다.
우리가 그 연관을 아무리 연구해도 빈 공간들을 다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진인사 대천명 한다. 받아들인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원론적으로 구멍이 있다고 상정하는 것도 그것도 규제적 이념이다.
그리고 그것도 입증이 안 된다. 그것도 일종의 규제적인 이념이고 태도의 문제가 돼버린 거다. 그렇게 상정하고 살아갈래 아니면 필연이라고 보고 그 필연적 연관을 끊임없이 우리가 연구하기 위해서 노력할 거야. 그 차이는 과학적 태도에 있다.
2024. 3. 19.
*위 글은 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번역자(홍승용)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테오도어 W.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