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은 변하며 사유는 대상을 따라잡을 뿐이며 사유의 관점에 따라 대상에 대한 파악도 달라진다면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보편적인 진리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묻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과학적 사유를 통해 알아 낸 것들을 안다고 여기며,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것을 진리인 것처럼 여 기며 살아갑니다. 인류의 소멸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과학적 사 유를 포기하지 않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아도르노에게 사유는 역사적이며 ‘시간적 핵’(Zeitkern)입니다. ‘시간적 핵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타이밍(timing)이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사태가 바뀌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이것은 여전히 타당하다.’ 이런 말씀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사랑은 타이밍이다’, ‘모든 것은 때가 있 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와 같은 ‘시간’, ‘때’와 연관된 표현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알맞은 시기’, ‘적절한 때’가 상대적인 ‘진리’를 보증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적절한 때’, ‘진리’의 순간을 ‘갑자기’, ‘불현듯’, ‘느닷없이’ 직관적으로 포착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유가 시간의 흐름, 역사를 따라잡고 있을 때, ‘진리’의 순간을 파악하기가 수월할 것 이고, 동의할만한 보편의 정도도 커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영진, '미시론, 그리고 시간의 핵', <고요히 한 걸음> 168-1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