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하면서 ‘모두’에게 해가 되지 않는 삶의 방식에는 ‘모두’의 사회적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심이나 법제도, 책임과 같은 기본적인 윤리를 지키는 것이 있다. 개개인이 스스로 지키면서 서로에게 지키라고 요구하고 요구받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한 사회’가 양립하기 위한 시작이자 끝이라고 여긴다.
‘자신의 자유와 평등한 사회’의 양립을 바라보며 자신의 자유도, 평등한 사회도 조금씩 지양해 나갈 줄 아는 개인들이 되도록, 그런 개인으로 스스로를 지양해 나갈 줄 아는 개인들이 그런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를 살고 있어야 하겠다.
남은 몰라도 자신만큼은 그렇게 살고 있는 수밖에 없겠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자신들도 있고, 지금 여기에서 자신만큼은 실현 가능한 상태이기도 하고, 그런 자신들이 만들어가는 것이 평등한 사회이기도 하고, 그런 자신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평등할 것이고.
핵전쟁, 기후위기, 경제위기와 같은 인류재앙을 야기하는 근원인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바꾸어가는 과정도 여러 모습일 것이다. 각자가 재앙을 경험하는 강도나 재앙을 문제 삼으며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것이다. 자기는 자기 삶은 자기 것이고 자기 삶의 주인은 자기인 것이고 자기 삶에 대한 최종 결정자는 자기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바꾸기 위한 방법은 같거나 비슷하거나 다르다 하더라도 그 이전에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인류재앙의 근원에 대해 ‘동의’를 구하고 ‘공감’을 얻는 일이라고 여긴다. 그런 ‘동의’와 ‘공감’ 없이 ‘자기들’이 행하는 행동의 결과는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자기들’에게만큼은 의미심장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인류재앙을 문제 삼겠다면 ‘동의’와 ‘공감’을 위해 애쓰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머리 맞대고 논의하고 있을 만큼 인류의 시간도, 각자의 시간도 많지 않다는 것 또한 인류재앙이 낳은 비극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가끔 인류재앙을 돌아보는 일은 ‘자기’라는 선물을 있게 한 ‘인류’에 대한 마지막 배려가 아닐까 싶다.
-햐영진, '이기적 이타주의', <도시의 무지개> 127-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