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금자씨 음식에만 있는 것들
내가 유치원에 입학하자 엄마는 일을 시작하셨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에, 가세가 휘청거릴만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부모님은 맞벌이 부부로 사셨다. 엄마가 직장 생활로 바쁘더라도 가족들을 위해 절대 타협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는데, 건강한 집밥이었다. 일하고 오시자마자 허겁지겁 갓 지은 밥과 갓 만든 반찬을 준비하던 엄마의 분주함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인스턴트 음식, 냉동 음식, 그리고 길거리 음식은 절대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었고 냉장고에 넣어두고 오래 꺼내먹는 밑반찬을 엄마는 기피했다. 신선하고 따듯한 음식은 우리 가족에겐 익숙한 식사였고,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은 천재지변에나 먹는 비상식량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미료를 싫어하는 엄마는 [외식=조미료] 라는 선입견이 강하셨다. 엄마 생일에도 밖에서 먹는 밥을 드시지 못해 생일상을 직접 준비하는 사람이니, 가족과 함께한 외식의 기억은 거의 없다. 가족에게 집밥은 어떤 위협에도 굳건하게 지켜내는 가족 문화 같은 거였다.
이 타협하지 않음이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더 고달프게 만들었음이 분명하지만, 엄마의 사랑이 고팠을 어린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감사한, 그리고 필요했을 희생이었다. 그땐 몰랐는데 난 엄마의 손이 한참 갈 나이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아이로 컸다. 맞벌이로 바쁘셨기 때문에 방과 후 활동이 많지 않았던 초등학교 때는 집에 돌아오면 텅 빈 집이 기다린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엄마의 부재를 크게 느끼지 않고,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고 컸던 이유가 엄마의 음식 덕분이란 것을 시나브로 알게 되었다. 대학교 졸업 후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 끼를 해 먹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지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먹었던 아침밥과 저녁밥, 그리고 점심 도시락은 많은 정성으로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그 어린 나이에도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정성이 담긴 음식이 엄마의 크고 깊은 사랑 표현이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난 음식이라는 매개체로 전해진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내가 직접 만든 밥 한 끼를 대접하고 싶었던 맘은 엄마에게 배운 것이구나.
엄마는 끼니 중에서도 아침밥에 집착이 강했다. 자취를 시작한 스무 살에도 아침만큼은 거하게 차려먹는 나를 보고 룸메이트들이 놀라곤 했는데, 몸에 베인 습관은 아침 허기를 강하게 불렀기 때문이다. 아침밥과 얽힌 나의 사연은 구구절절하다.
아침밥에 대한 엄마의 집요함 덕에 학창 시절 아침을 거른 날이 거의 없다.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도, 아침을 먹지 않은 날 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 번은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엄마가 감기몸살로 몸져누우셨다. 그럼에도 전날 밤에 아침을 준비해두고 주무셨는지, 엄마는 부엌이 보이는 안방 침대에 누워 '밥 뜨고, 국 뜨고, 반찬 꺼내고'를 지휘하며 아침밥을 차려먹게 했다. 아침밥 독재자와 사는 기분은 정말 당해봐야 안다. 모든 억압이 자유의지를 키우듯, 나는 아침밥에 대한 묘한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아침밥 스킵은 허용이 안되기 때문에, 이 날 아침은 아침밥 땡땡이를 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나는 누워있는 엄마가 청각에 의지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압력밥솥 뚜껑을 요란하게 열고, 밥을 담는 척을 했고, 국을 퍼는 척을 했다. 아침밥을 먹는데 필요한 다양한 유사 소리를 만들어 밥을 먹는 척을 했다. 학교에 가서 아침밥 대신 엄마가 싫어하는 빵을 먹었던 달콤한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엄마를 잘 속였다는 기쁨도 있었다. (물론 엄마는 알고 있었다)
두 번째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심하게 지각을 할 것 같아서 아침을 패스할 수밖에 없었다. 첫 수업 시작 전에 엄마에게 연락이 왔고, 학교 건물 밖으로 나가보니 엄마의 빨간 차가 운동자에 세워져 있었다. 엄마가 아침밥을 가져온 것이다. 그때 같이 나간 친구는 아직도 '야, 그때 그 뚝배기의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어'라고 말을 했다. 물론 과장이 섞인 표현이지만, 엄마가 가져온 뚝배기의 비주얼은 딸의 아침식사로 배달했다기엔 과한 부분이 있었다. 집이랑 학교가 가깝기도 했지만 수업 전에 빨리, 하지만 제대로 집밥을 먹이고 싶은 엄마의 집착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뚝배기가 안 넘치게 얼마나 살살 운전해왔는지 짐작이 가, 그때 마음이 찡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그렇게 가깝던 집에서 학교에서 1시간이나 먼 곳으로 '딸이 고3인데' 이사를 갔다. 엄마가 꿈꿨던 한옥집이 완공되어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아침잠이 많고 15분 거리 밖의 학교를 다닌 적 없던 나에게는 고통 같은 변화였다. 엄마에게 '언제든 이사해도 괜찮다'라고 말했지만 고3은 피하는 게 상식이라 생각했는데..
고3 때 멀리 이사를 간 부모님을 원망하며 온갖 패악질과 히스테리를 부렸다. 고3에게 외딴 한옥집이 웬 말 인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할머니가 혼자 사시는 아파트에 딸려있는 하숙방을 구했고, 아침밥을 전제조건으로 엄마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뭘 그렇게까지 공부를 한다고 (하지도 않았으면서) 하숙까지 했을까 싶지만, 교육열이 없어도 너무 없는 부모님의 자녀로서 경쟁사회에 살아남으려면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대학을 못 갈 것 같은 불안감이 너무 컸다. 문제는 맛없는 할머니 음식이었다. 가끔 간이 안 맞는 건 물론이었고, 상한 음식도 잘 못 느끼시고 내어주곤 했다. 그래서 아침을 거르고 학교 앞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을 자주 사 먹었다. 음식 청정지역에서 사느라, 라면도, 순대도, 떡볶이도, 어묵도 먹지 못했는데 그런 군것질을 하는 게 싫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가 그걸 눈치 채지 않을 리 없었다. 엄마는 내가 아침밥을 사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4월부터 11월까지 총 7개월간 매일 아침 아침식사를 배달해왔다.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의 교통체증까지 겪으면서, 약 2시간을 도로에서 시간을 쓰면서, 엄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식사를 배달해왔다. 엄마의 아침식사는 모두를 놀라게 하는 수준이었는데, 일단 귀여운 미니 도시락 이런 걸 상상하면 안 된다. 그때 남긴 사진이 없는 게 아쉽지만 소풍 갈 때 쓰는 피크닉 바구니에 가득 채워왔다. 플라스틱을 싫어하는 엄마는 유리그릇에 가득 반찬을 넣어왔고, 한창 소처럼 먹을 여고생들에게도 그 아침밥은 포만감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했다. 사실 아침을 먹으면 너무 졸음이 오고, 위는 커질 대로 커져서 공부하는데 도움이 전혀 안 되었다. 그리고 아침밥을 친구들이랑 나눠먹으면서 키득거리느라 아침 시간의 집중력은 사라져 버렸다. 엄마는 역시 나의 공부보단 아침밥을 선택하신 것이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던 이십 대에도 퀄리티 있는 아침을 계속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울산에 계셨던 부모님이 매주 고속버스 택배로 일주일에 한 번 음식을 보냈기 때문이다. 신선한 아침밥을 당일치기로 배달하기 위해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가장 비싼 당일 택배비와 퀵 배달비를 지불하셨다.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이 매주 금요일마다 도착해있었기 때문에, 청소를 안 해도 룸메이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엄마가 아침밥에 쓴 에너지를 우리 교육에 썼다면, 우리는 하버드대 정도는 무난히 갔을 거라고 오빠랑 나는 농담처럼 이야기를 한다. 부모님은 교육열이 없기도 참 없어서 나는 알파벳도 중학교 때 첨 배웠다. 중학교 때 영어 공부하느라 힘들었던 시간을 생각하면 너무 과한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엄마의 아침밥 열정은 나에게 소중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밥을 챙겨 먹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며, 공부든 뭐든 하고 싶은 건 스스로 해야 한다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엄마의 바람대로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엄마의 도플갱어처럼 그게 누구든 '밥은 먹고 다니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면서 엄마 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공통점은 세 가지가 있는데, 1) 철학 2) 지속가능성 3) 일관성이다. 장금자씨의 집밥과 요리에는 철학이 있다. 엄마에게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고, 한 끼를 때우는 것 이상으로, 삶의 온도를 높여주는 따뜻함이자, 이타적인 삶을 위한 매개체이다.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셔서, 집에 손님이 오면 늘 밥을 준비해주시는 것을 보고 자랐다. 자취를 할 때는 집에 자주 방문하는 친구들의 몫까지 준비해서 보냈고, 아빠의 친구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언제나 마르지 않는 화수분처럼 정성을 다해 밥을 차려주셨다.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타인에게 나눠주는 따뜻한 음식으로 쌓은 엄마의 덕이 나에게 온 것이구나 하고.
두 번째로 엄마는 끊임없이 어떻게 더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셨다. 아파트에 살면서도 작은 시골집에서 된장을 담그고 야채를 직접 재배하고, 한옥집에 사실 때는 참기름 들기름을 직접 짜서 드셨다. 그리고 모든 채소를 자급자족하셨는데, 엄마는 지속 가능하게 건강한 음식을 먹기 위해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일관성이다. 엄마는 음식뿐 아니라 모든 삶의 면면에서 일관된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준다. 자연적인 것, 건강한 것, 자연에 해롭지 않은 것을 하는 엄마의 삶은 사실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어머니는 물티슈 대신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시고, 오래전부터 채식 위주의 식단을 고수하셨다. 나는 스무 살까지 시중에서 파는 생리대 대신 순면 기저귀를 사용했다. 이건 정말 해본 사람이 아니면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는데, 매달 기저귀인 생리대를 빨고, 삶고, 널어야 했다. 첫 월경을 시작했을 때 엄마는 오래전부터 준비한 하얀색 순면 기저귀를 내놓으셨다. 자취를 하면서부터 생리대를 사서 썼는데, 사실 몇 년은 너무 이질적이고 불편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엄마랑 사는 동안 건강한 삶에 대해서 많이 배웠던 것 같은데, 자취하면서부터 좋지 않은 생활 습관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이제 몸도 마음도 허한 나이가 되니 엄마가 보여준 삶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장금자라는 이름을 브랜드로 접근하면서부터 시작한 것이 장금자 프로젝트이다. 마치 브랜드가 그것의 철학을 지지해주는 커뮤니티를 만들어나가는 것처럼, 엄마에게도 그런 커뮤니티를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놀랍게도 장금자를 응원하는 좋은 사람들이 이미 많이 생긴 것 같다. 심지어 팁을 주시고 가시는 분도 생겼다. '맛있어'라는 말보다 '너무 정성스러운 음식이다'라는 말을 꼭 해주시고, 엄마 혹은 할머니 생각이 나는 맛이라고 말해주신 분들도 많았다. 어쩌면 엄마의 철학과 정성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인데, 이건 참 고무적인 일이다. 엄마도 가장 좋은 경험을 주기 위해 매일 최선을 다하시는데, 빈그릇만 남은 사진으로 혹은 손님들의 말로 우리에게 그 뿌듯함을 전하곤 한다.
그리고 밥을 드시고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따로 연락을 주시는 분들도 꽤 많으시다. 전화를 하시는 분도 있다. 이렇게 오셨던 분들은 단순히 밥을 '사 먹는' 소비자로서가 아니라 음식으로 연결된 하나의 커뮤니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게 바로 장금자라는 음식의 힘이 아닐까 한다.
그 외에도 사람들의 후기는 나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정성은 통하는 것 같고, 엄마의 철학을 그대로 담은 장금자 프로젝트가 계속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를 바라면서, 철학을 유지하며, 지속 가능하게, 일관성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의 음식이 특히나 마음이 허할 때 공허함이 느껴질 때 할머니의 음식이 가장 많이 그립고 먹고 싶다. 하지만, 이젠 마냥 그리워하기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할머니의 손맛 같은 음식을 홍제동에서 만났으니 말이다.
모든 음식은 귀한 손님이 올 때나 꺼내 놓았던 놋그릇에 담겨 나왔다. 놋그릇은 관리도 힘든데 갑자기 우리가 귀한 손님이 된 기분이다.
장금자 친구 클럽의 목적은 취향과 꿈을 나누는 엄마들의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함이다. 딸로서의 가장 큰 목적은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를 엄마들과 나누는 것이다. 엄마들도 몰라서 그렇지 알면 누구보다 잘 누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번에는 한옥 스테이+포틀럭 파티를 결합한 [한옥 홈파티]를 하려고 한다. 내가 에어비앤비를 다니면서 참으로 많은 공간에서 머물렀는데, 안타깝게 이 경험을 엄마랑 많이 나누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늘 있었다. 여행 중에 머물고 있는 에어비앤비 집 사진을 보내주곤 했는데, 엄마는 사진 구경하는 것만으로 늘 즐거워하셨다. 남의 집 구경하는 재미야, 세대 막론하고 다 통하지 않은가.
엄마랑 서울 혹은 국내 숙소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리면서 놀아보려고 했는데, 이 경험을 #장금자친구클럽 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좋아하는 한옥 에어비앤비가 바로 떠올랐다. 혜화에 위치한 이 숙소는 나와 인연이 깊다. 이 집은 한우리 건축사무소 김원천 소장님이 직접 리모델링한 한옥이다. 6년 전 이 집이 전세 매물로 나왔다며 연락을 주셨는데, 내가 고칠 엄두가, 아니 고칠 돈이 없어서 포기를 했는데 이 집이 이렇게 멋지게 바뀌었다. 1938년 일제시대 때 지어진 이 한옥 건물은 약 80년의 시간이 남긴 다양한 자취를 품은 건축물이다. 역사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새로운 주거 공간으로 만드시려고 노력한 흔적이 이 새로운 집에 가득하다.
3월 장금자 클럽은, 예전 시대의 기억과 지혜를 간직하시면서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고 있는 엄마 세대와 가장 닮은 집, 이곳에서 포틀락 홈파티를 하려고 한다. 나는 토종 한국인이지만 포틀럭 파티를 좋아한다. 참석자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요리나 와인 혹은 음료를 들고 와서 같이 나눠먹는 게 정감도 있지만, 음식으로 인사를 먼저 나누는 게 좋기 때문이다. 사실 포틀럭이라는 말의 의미가 '있는 것만으로 장만한 음식'이라 거하게 준비한 음식이 아니라서 더 좋다. 가장 소소하지만 정성 있는 음식을 가져와 함께 나눠먹는 것, 그게 이번 장금자 친구 클럽의 콘셉트. 이 숙소에는 독립적인 방이 2개가 있다. 엄마들이 오셔서 같이 저녁도 나눠먹고, 숙소 구경도 하고, 홈파티도 경험해보셨으면 좋겠다. 우리는 자주 하는 것들이니까! 그리고 어머니 두 분은 선정해 1박 2일 스테이 할 수 있는 경험을 드리려고 한다. 사실 엄마랑 내가 스테이 하려고 했던 것이지만, 엄마랑 나는 다음에 또 오기로 했다.
3월 장금자 친구 클럽 '엄마들'을 찾아요.
일정: 3월 20일 오후 5시 ~ 9시
참여자 : 50대-60대 엄마 6명
장소: 종로구 혜화 에어비앤비 한옥 (참여자에게 주소 따로 제공)
참여비 : 5만 원 (금자씨 강된장 비빔밥 포함)
준비물: 초대되신 어머니가 함께 나눠먹을 음식(2인분)을 싸오기(음식/음료 혹은 디저트 모두 좋아요)
참여방법: 장금자 씨 인스타그램으로 (@jang_keumja) Direct Message (쪽지)를 보내주시거나, habiyam@gmail.com으로 연락을 주세요. 어머니가 어떤 취향을 가진 분인지와 왜 참여하시고 싶으신지를 적어서 보내주시면 됩니다. 만약에 1박 2일로 스테이를 하고 싶으시다면, 그 의사도 밝혀주세요.
모집 기간 : 2월 15일~ 2월 25일 (총 10일간)
** 혹시 인원이 많아서 참여를 못하실 경우도 안내를 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