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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n 22. 2024

사투리

지금은 잊어버렸지만 내가 제일 처음으로 배웠던 그 억양

경상도 호소인, 미디어 사투리 특강, 사투리 능력 시험 등 요새 들어 부쩍 다양한 콘텐츠로 소비되는 경상도 사투리는 사실 나의 first language, mother tounge이다. 이 두 단어의 국문 번역어는 '모국어'라 하던데, 서울말과 국적이 다른 언어는 아니니까 '엄마에게서 배워 처음으로 구사한 언어' 정도로 설명하면 정확하겠다. 말을 배우면서 아빠의 경북 사투리, 엄마의 경남 사투리를 모두 흡수한 하이브리드이면서도 초등학교 입학하며 서울말을 쓰게 된 나는 이후로 상대방의 구사 언어에 따라 세 가지 다른 억양으로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경상도 방언 고급 구사자도 어려워하는 그 경남어와 경북어의 차이를 내 귀꾸마리(귓구멍)와 쌔빠닥(혓바닥)으로 구별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단, 방언의 경우 편한 상대와 상황에서만 제어가능하다는 제한점이 있긴 하다.


이번 주 회사 일로 내내 부산에 있다가 하루 정도의 자유일정을 보낸 뒤 부산역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탔다. 며칠간 부산사투리에 익숙해져서 큰 이질감이 없었는데 귓속을 파고드는 익숙한 억양에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  엄마가 쓰는 말, 마산 사투리였다. 언젠가 개그우먼 김숙 씨가 '경남 사투리에도 다양한 지역 억양이 있어 부산말이 경남의 표준어로 통한다'는 의미의 개그를 치는 영상을 봤는데, 그땐 '그런가' 하고 그냥 넘어갔던 내가 사실은 더욱 세밀한 경남어의 하위분류를 나도 모르게 구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엄마랑은 얼굴도, 나이도, 그 어떤 것도 같지 않은 아주머니가,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인 '버스 안에서 큰 소리로 전화통화'를 하는데 갑자기 우리 엄마 같은 생각이 들어 짜증도 내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 연말에 2 주 살이를 했던 경남 통영에서는 이런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났다. 아침을 먹으러 들어간 굴국밥집 사장님의 수다에서, 텅 빈 시립 미술관 전시실을 청소하시던 아주머니와의 대화에서, 호객에는 심드렁하던 시장 어물전에서도 문득문득 엄마 생각이 났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면 유독 우리 엄마 같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그건 특별히 통영 아주머니들이 따뜻해서라든가 내가 생각이 많아서였다기보다, 통영과 마산의 방언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엄마가 쓰고, 이모들과 외할머니가 쓰는 말, 지금은 잊어버렸지만 내가 제일 처음으로 배웠던 그 억양에 노출되어 있던 며칠간, 나는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편안함과 그리움에 둘러싸였던 게 아니었을까.


이제는 창원시에 흡수된 엄마의 고향 마산도 3 년 전 출장으로 난생처음 방문했다. 외가 식구들은 7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하나둘씩 고향을 떠나 이제는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엄마 살았던 동네의 마을과 길을 완전히 갈아엎고 '도청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은' 완벽한 계획도시 창원의 모습을 보는 게 왠지 서운했다. 이전 모습은 한 번 본 적도 없으면서. 그리고 이제야 그 서운함의 근원을 헤아려 본다. 아마도 그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백색소음처럼 꽉 들어찼던 엄마의 억양 때문이었겠지. 서 있는 사람도, 길을 걷는 사람도, 웃는 사람도, 대화하는 사람도, 바쁜 사람도 모두 다 엄마랑 같은 말을, 엄마랑 내가 함께 썼던 그 말을 하고 있던 탓이었겠지.


절반은 경남인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정확한 뿌리를 '경남의 서울' 부산에서 우연히 깨달았다. 나는 사실 경상남도 마산, 그중에서도 가음정동이 만들고, 사랑으로 키워낸, 지금도 거기 속한 아이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고향을 찾아내고, 거기에 반응하고, 본 적도 없는 곳을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까닭이다. 앞으로 내 목소리로 마산 사투리를 말할 일은 영영 없을지 모르지만, 내가 이 억양을 잊을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 사투리는 그 자체로 나 자신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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