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동갑내기 사촌이 있다. 우리는 친척이기 이전에 자매였고 베프였다. 같은 동네에서 살며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했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를 진학했을 때에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만났고 그마저도 아쉬우면 밤새 떠들다 서로의 집에서 하루 자고 가기를 반복했다. 우리는말 그대로 함께 자랐다. 그래서 그때의 나는 우리의 관계가 영원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그러하듯 우리의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영원하리라 믿은 관계의 변화는 고작 앞자리 숫자가 바뀌어 성인이 되고 다른 대학을 간 것에서 시작됐다. 우리는 각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이 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그러던 것이 방학 직전에야 안부를 묻는 수준이 되었다. 본격적인 변화는 친척이 자취방을 구하면서 일어났다. 평생을 같은 생활 반경에서 살던 우리에게 물리적인 거리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거리감은 지난 세월이 무색할 만큼 빠르게 익숙해졌다.
같은 동네를 뛰놀 때, 같은 학교를 다닐 때, 우리는 만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었고 얘기하지 않아도 서로의 일상을 알 수 있었다. 그 덕에 우리는 서로가 아주 다른 개인임을 잊은 채, 환경이 만들어준 공감대를 기반으로 노력 없이 관계를 두텁게 유지했다. 하지만 환경의 변화는 잊었던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우리는 애초에 성격도, 취향도, 가치관도, 같은 것보다 다른 것이 더 많았다는 걸. 그렇게 대학을 졸업해서 사회로 나갈 때쯤에는 서로 노력해야만 연락하고 지낼 수 있는 평범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관계의 변화가 어른이 되는 진통 중 제일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친숙하고 익숙한 것이 낯설어지는 경험. 개인으로서 중심을 잡기 위해 간격을 벌리고 그 사이의 거리감을 느끼는 경험.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을 때, 나는 이런 변화가 나의 개인적인 문제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몇 번이고 스스로를 의심해야 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그렇게 체감했다. 이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어른의 관계라는 걸.
몇 년 전, 이런저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거진 4년의 공백에, 나는 친구의 근황이 궁금하기도 전에 걱정이 앞섰다.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지? 이제는 같은 학교도, 동네도 아닌데. 우리가 이전 같지 않으면 어떡하지?’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던 만남을 가진 후에야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이전처럼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학업이나 취업과 같은, 나이에 맞는 엇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서로 처한 상황과 환경은 달랐지만 그런 고민이 주는 보편적인 생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 분명 이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우리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안다. 우리가 멀어져도 괜찮다는 걸. 자의든 타의든 변해가는 관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냥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뿐임을. 그렇게 각자의 길을 가다 보면 우연히 같은 길목에서 또다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는 이미 많은 것이 바뀌어버렸대도, 우리는 이전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안부를 물을 것이다. 그때에는 그때의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그때에는 그때의 친밀감을 품고서. 이전과는 다른, 그러나 공유하고 있는 기억의 같은 선상 다른 지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알고 지냈고, 얼마나 많이 알고 지냈는지에 대해서. 우리 사이에 생겨난 공백에 관해서.
‘인연이 있으면 천리를 떨어져 있어도 만나게 되어있다’는 옛 말처럼, 애초에 관계란 사이의 공백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나와 아주 친했던, 그러나 지금은 각자의 사정으로 멀어진 친구들에게 이제야 나는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