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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OOTD-오늘의 오들오들

한 번 날려먹고 다시 쓰는 글 (열받음 주의)

by 해이


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멍하니 선다.

입을 옷이 없어서가 아니라 잘 차려입을 마음이 없어서다.(입을 옷이 없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반팔을 걸치기엔 공기가 싸늘하고, 니트를 꺼내자니 아직 덥다.

그 사이에 서 있는 내가, 계절처럼 어중간하다.


여름에는 벗는 옷이 필요했다.

덥고, 숨 막히고, 끈적이고, 짜증까지 나니까.

게다가 마음 놓고 나와버린 뱃살을 적절히 감춰주기까지 해야 하니 적당히 벗고, 적당히 가리는 옷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찌어찌 여름은 지냈지만.

이제 완연한 가을 아닌가.


가을에는 붙잡는 옷이 필요하다.

어디론가 흩어질 것 같은 바람 속에서, 내 마음이랑 체온이 같이 식어버릴까 봐서 라는 이유를 가지고 말이다.


낙엽 냄새가 묻어나는 바람이 부는 그런 날은 꼭 옷보다 사람의 온도가 먼저 떠오른다.

누군가 내 어깨에 살짝 걸쳐주는 말 한마디,

그게 패딩보다 따뜻할 때가 있다.

"오늘 날씨 좋다"는 말보다

"요즘 괜찮아?"가 훨씬 따뜻하다는 걸,

가을이 되면 늘 다시 배운다.





잡지 속 가을 화보는 늘 반짝거린다.

'버건디 니트와 트렌치의 조화',

'시즌 키 컬러 브라운톤의 무드',

'숏부츠로 완성하는 F/W 감성'같은 문장들.

그런데 내 옷장은 어떻더라?

작년에 입었던 회색 후드티,

그 위에 몇 년째 입고 있는 패딩조끼.

그리고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나는 청바지.

끝.


내 패션 철학은 명확하다.

"겹겹이 입고, 오들오들 떨지 말자."

누군가는 가을을 컬러 팔레트로 표현하지만

나는 '본격 난방의 계절'로 표현한다.

그래서 내 OOTD는 오늘도 '오늘의 오들오들'

패션보다 중요한 건 체온 유지,

트렌드보다 필요한 건 온기 유지다.





사실 내 눈에 옷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목도리를 감는 건 목이 추워서가 아니라,

마음이 허전해서이고,

단추를 잠그는 건 바람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빈자리를 잠시 가려두기 위해서다.


가을은 마음이 얇아지는 계절이다.

그래서 더 많이 덧입는다.

니트, 코트, 목도리.. 그리고 그 위에

'괜찮은 척'이라는 외투까지.

다만 문제는, 그걸 벗는 법은 아무도 안 가르쳐줬다는 거다.


나는 여전히 옷장 앞에서 서성인다.

오늘은 어떤 마음을 입을까.

차가운 말 대신 따뜻한 말 한 벌을 꺼내 입을까.

아니면 그냥, 가벼운 웃음으로 하루를 덮을까.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지만, 나는 마음을 고쳐 입는다.

기온보다 중요한 건 내 온도다.

내 옷차림은 여전히 정체성 따위 상관없다는 듯 매일매일이 뒤죽박죽이지만, 따뜻하고 싶은 마음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니까 오늘의 패션은 이거다.

OOTD, 오늘의 오들오들.


하지만 그 속엔,

"따뜻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 숨겨져 있다.

것이 나의 가을 패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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