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을 운동 삼아 걷기 시작한 건 단순히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가만히 앉아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떨어져가는 소화능력과 줄어가는 체력을 증진시켜보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걸어서 한 시간 남짓 되는 거리. 가로수 잎이 붉게 물들어 흩날리는 길을 걸다 보면 긴 시간을 품은 듯한 화훼단지가 나타난다.
그곳은 한때 활기가 넘쳤다. 봄마다 트럭이 드나들고, 축하를 하려는 사람과 위로를 하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찾았을 곳이었으리라. 하지만 요즘 어디 그러하던가. 좋지 않은 경기에 가장 먼저 지갑을 닫는 곳이 꽃집이라 했다.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듯 열두어 개쯤 줄지어 있던 대형 비닐하우스 화원들은 하나둘씩 폐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해마다 새로 덮고 보수하던 비닐들은 이제 볕에 삭아 조각조각 떨어져 날로 차가워지는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드러난 철제 골조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그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며 덜그덕거리는 소리를 내고, 비닐은 찢어진 깃발처럼 허공에서 흔들린다.
폐업한 화원들 속에서는 아직 정리를 다 하지 못한 흔적들이 있다. 마른 흙 위에 쓰러진 화분, 뜯어진 비료 포대 사이를 보금자리 삼아 앉아 졸고 있는 고양이 두어마리, 말라 붙은 꽃송이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식물들이 있었다. 돌봄이 끊긴지 오래일텐데 몇몇 다육 식물들은 여전히 탱글한 잎을 간직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돌보아온 것일까 아니면 그저 강인한 생명력 덕분일까.
퇴근길마다 그 앞을 지나며 나는 같은 생각을 한다. 살아 있는 것들은 왜 살아남았을까. 어떤 건 작은 바람에도 쓰러지고, 어떤 건 그 모든 바람을 맞으며 견딘다. 어쩌면 다육이들은 자신을 잊은 세상 속에서도 끝내 자신을 기억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햇빛이 부족해도, 물이 없어도, 자신 안에 머금은 습기로 살아가는 존재들. 그 안에는 절망보다 단단한 기억이 있다.
나는 그 화원들을 지날 때마다 생각에 잠긴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여전히 버티는 생명들을 본다는 건 참으로 묘한 일이다. 그들의 잎은 바람을 맞아도 부서지지 않고, 말라버린 화분들 사이에서도 유일하게 빛을 머금고 있다. 그 모습이 유난히 가을과 닮았다. 떨어지지 못한 잎처럼 끝까지 버티는 계절의 마지막 흔적말이다.
8월 말부터 공동집필을 시작했다. 5월 말에 처음 브런치에 들어와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11월이 되어버린 지금은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절반을 훌쩍 넘어선 것이다. 처음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하루를 열었지만 이제는 서로의 글을 기다리는 사이가 되었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혼자 쓰는 사람에서 함께 쓰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처음엔 그저 낯설뿐이었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글들을 쌓고 있었고, 나는 그 속에서 누구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면서 글이라는 건 결국 서로의 진심이 닿는 자리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과의 시간은 이상하게도 화분을 돌보는 일과 닮아 있었다. 매일 물을 주는 건 아니지만 흙이 너무 마르지 않게 살피고, 잎이 시들면 빛이 부족한 건 아닌지 살펴보는 일. 함께 쓴다는 건 결국 그렇게 서로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가을이 깊어지며 우리도 조금씩 변해갔다. 처음엔 경쟁처럼 느껴졌던 글쓰기가 어느새 응원의 형태로 바뀌었다. 누군가의 글에 내 마음이 닿을 때마다, 나도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선인장이 비를 기다리지 않고도 꽃을 피우듯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물을 품은 채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이제 가을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낮은 조금씩 짧아지고, 하늘은 더 맑아진다. 하지만 매거진 속의 우리는 여전히 이 계절을 쓰고 있다. 아직 남은 이야기가 많고, 아직 지지 않은 마음이 있다. 서로의 옆에서 자라나는 이 시간, 가을의 마지막 한 달을 우리는 그렇게 함께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