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가는 데에는 각자의 시간이 필요하다
가을이 오면 마음이 달아오른다. 바깥공기는 식어가는데 속은 오히려 더 뜨겁게 온도를 높여간다. 거리는 천천히 색을 바꾸고 낙엽은 조용히 떨어지지만, 내 안쪽은 그 흐름과 전혀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듯했다.
브런치를 열 때마다 출간 소식, 공모전 당선 소식이 눈에 들어온다. 축하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맨 먼저 반응하는 건 심장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다. 그 감정의 이름은 부러움이었고, 뒤이어 찾아오는 건 설명하기 어려운 조급 함이었다.
남들의 시간은 재빠르게 익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내 시간은 불 앞에서 연달아 뒤집히기만 하는 군고구마 같았다. 겉은 금방 뜨거워지는데 속은 여전히 설익어 있는, 정작 어디까지 와 있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 상태.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은 채 일상을 이어가면서도 속에서는 불길이 일렁이듯 어수선하게 흔들렸다.
퇴근길 군고구마 봉지를 품에 안고 골목을 걷다가, 문득 머리를 쿵 치는 것 같은 깨달음이 왔다. 군고구마가 제맛을 내는 건 활활 타오르는 불길 때문이 아니라, 자기 속도로 천천히 익어가기 때문이다. 겉은 거칠어지고 검게 타 보이지만, 속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단맛이 스며든다. 그 과정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나도 지금 그런 시간을 지나고 있는 건 아닐까. 남들의 속도가 눈앞에서 번쩍일 때마다 흔들렸던 건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내 속도를 믿지 못해서였다. 남들은 이미 속까지 단단하게 익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마음의 틈을 아주 조금만 벌려보면, 이미 깊게 달아오른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겉만 타 보였을 뿐, 보이지 않는 속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익어가고 있었다.
부러움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조급함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들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성취를 볼 때마다 "나는 왜 아닐까"라고 묻던 나에서, "내 속은 얼마나 익었을까"를 묻는 나로 바뀌어가고 있다.
성장은 군고구마처럼 균일하게 익지 않는다. 어떤 부분은 불에 오래 닿아 뜨겁고, 또 어떤 부분은 여전히 설익은 상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불균형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과정임을,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나를 만들어왔음을 조금씩 알게 되는 중이다.
당장 내 이름이 메인 자리에 걸리지도 않고, 공모전 발표 때마다 번호가 불리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만이 전부일 필요는 없다. 어느 날 떨어진 낙엽이 조용히 가방에 붙어 있던 것처럼, 시간은 소리 없이 흔적을 남긴다. 내 글도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쌓이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 이르게 군고구마를 꺼내면 겉은 뜨겁지만 속은 차갑다. 그동안 나는 그 상태를 스스로에게 강요해 왔던 것 같다. 빨리 익어야 한다고, 빨리 보여줘야 한다고, 준비되지 않은 속까지 억지로 다그치며.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려 한다. 누군가의 속도가 반짝인다고 해서 내 온도가 식는 건 아니었다. 내 불도 이미 묵직하게 타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불이 조금 멀어 보였을 뿐.
가을은 유독 마음의 표면을 건드린다. 그러나 동시에 알려준다. 남의 불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대신, 내 불의 온도를 들여다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언젠가 내 군고구마도 스스로 벌어져 달큼한 맛을 보여줄 것이다. 그때는 기다림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을 믿고 싶다. 아니, 이제는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조급함도 부러움도, 내가 멈추지 않고 익어가고 있다는 증거니까.
나는 지금도 달궈지고 있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