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하면서 요즘 내가 즐겨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토비를 갓난아기처럼 무릎에 올려놓고 둥가 둥가 안아주는 것. 또는 기저귀 갈아줄 때 토비가 신생아였을 때처럼 토비 얼굴 가까이,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눈을 들여다 보고 우쭈쭈 하며 뽀뽀해주고 입가며 정수리 쪽 달콤하고도 고소한 애기 냄새를 맡는 것. 예전에는 토비가 일방적으로 안아달라 요구했다면 요즘엔 내가 일부러(토비는 거부할 때도 있다) 안아서 집 안을 한 바퀴 빙 돌기도 한다. 점점 엄마 품에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게 내 눈으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두 돌 아기는 독립적이다. 벌써부터 약간 아쉽다. 토비가 갓 태어났을 때 그 모든 것을 더 즐겼어야 했는데.. 그러나 사람은 지나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 법.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처음 아기를 안았을 때 기쁨보다는 이 아이를 어떻게 케어해야 할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설렘보다는 막연하고도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그 순간을 즐기지 못했다. 토비가 갓 태어난 순간부터 백일 전후까지 많은 육아 선배 이웃들이 내게 '지금 그 순간'을 맘껏 즐기라 했다. 그땐 알 수 없었다.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즐기란 거지? 하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 순간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고 그때의 기쁨은 오로지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물론 현재 토비를 키우는 데 드는 또 다른 보람과 기쁨이 존재한다. 그리고 한결 더 수월해졌지만(아마 익숙해진 것일 테지만) 다시 반복하라고 하면 망설여진다. 만약 누군가 내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의향이 있냐고 묻는다면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나는 No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때가 그리운 것은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토비 얼굴과 표정에서 그녀의 신생아 적 모습을 발견하며 기뻐하고 더 살펴보려 한다. 심지어 토비 입체 초음파 했을 때 본, 찌푸린 그 못난이 얼굴도 요즘 간혹 보일 때가 있는데 난 그 얼굴을 보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자녀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는 데 매우 많은 시련(플러스 기쁨)이 함께 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열심히 키울 수 있는 원동력의 8할이 무려 그 아이의 3세까지의 예쁨과 사랑스러움이라 하니. 그 말의 참 뜻을 알 것 같다. 토비의 낮잠도 밤잠도 모두 내가 곁에 누워서 재우는데 가끔 그녀가 내 시선보다 아래, 즉 내 가슴 쪽으로 얼굴을 향해 있을 때 나는 내 품에 처음 안겼던 붉그스름하고 작고 따뜻한,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나를 바라보던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그 날 처음 만난 듯 하지만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이의 순수 그 자체인 맑고 투명한 눈빛을 마주 할 때, 나는 종종 쑥스럽다. 가끔은 내 존재 자체가 죄인 같다고 느껴진다. 그 정도로 아이들은 맑은 영혼의 소유자다.(그건 동물도 마찬가지. 세상에 동물보다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은 없다고 생각..) 그 눈빛이 나를 정면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바라볼 때 나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겸손해진다. 아이는 내가 좀 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이는 내가 살아갈 목적을 더 분명하고 명확히 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어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강력한 에너지를 잠재적으로 갖고 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녀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