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악하게 시인을 이용하는 방법
아침을 먹다가 엄마를 마주하면 그만 입맛이 똑 떨어져 버리는 문제를 가지고 며칠을 고민했다.
엄마가 건네는 아침인사에 기분이 엉망으로 망가져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꾸해 버리니 이런 불효자식도 없다. 집을 나오면 바로 후회할 일을 왜 되풀이 하게 되는 걸까.
오늘 간만에 엄마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원인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나는 엄마의 고민들을 외면하고 싶었나 보다. 피로에 잠긴 엄마의 얼굴에서 짐작할 수 있는 육체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들이 밥 먹는 나를 압박했을 테고 그 문제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우울했던 것 같다.
엄마에게 효도하는 길은 번듯한 돈벌이와 역시 번듯한 돈벌이를 하는 남자와의 결혼인 것 같지만,
나한테는 둘 다 너무나 먼 이야기 같아서 이럴 때는 그냥 가벼운 농담으로 넘기자 싶었다.
"엄마 나는 돈 벌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아."
"그럼 엄만 죽어."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엄마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엄마의 수명이 속수무책으로 깎여나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엄마가 본인의 입으로 죽음을 거론했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웬만하면 죽을 때까지 알고 싶지 않은 비밀 같은 것이었는데.
남들은 쉽게 취직하고 쉽게 결혼하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인간의 단계들을 밟아 가는데 나만 혼자 매번 어렵고 고통스럽고 불리한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몸이 아프면 약을 먹어야 하듯이 이런 울적한 시기에는 시가 필요하다. 나는 너무나 영악하게도 단 돈 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시집을 사서(아니면 가끔 인터넷 검색을 통해 무상으로) 시인들의 고통을 훔쳐보고 거기에서 위안을 받는다. 나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인간들이 백지장에 토해놓은 핏물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내 고통 역시 보편적인 감정이며 심지어는 그들에 비교할 것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는 것이다.
뭐랄까. 너무나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나보다 심각하게 아픈 환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알고나서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지는, 그런 느낌.
다행히도 시인들은 우리보다 가난하고 비루하고 연약하며 우울한 사람들이고 같은 고통이라도 예민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시라는 것은 웬만한 면역주사보다 정신건강에 잘 듣는다. 그래서 시를 읽는다는 것은 흔히 오해를 하고 있듯이 ‘있어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아가는 것처럼 절박한 것이다. 따라서 지하철에서 간혹 누군가 시집을 들고 있으면 멋있다고 생각하기 전에 이 사람 어느 마음이 아픈 것일까 하는 걱정과 염려가 먼저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후에 자신의 아픔에 시를 처방했다는 그 감수성에 조금 호감을 느껴도 좋다.
가끔 시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아 어렵고 답답하고 짜증이 날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약이 나에게 맞을 수는 없는 법.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상징과 은유들 때문에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긴하지만, 그렇게 불평하며 대충대충 시를 읽다보면 내 마음에 콕 박히는 구절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것 때문에 시를 읽는 것이다. 어차피 시를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고, 시인 본인도 좋아하지 않을 테니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상상하고 이기적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나같이 게으르고 영악한 독자는 정신이 아플 때에 자주 시집을 펼쳐들고 무턱대고 읽다가 효과를 보면 그 즉시 시집을 덮고 즐거워진다. 그래서 나는 의사와 마찬가지로 시인들에게 고맙다. 나대신 미지의 고통들을 탐사하고 약도를 그려놓고 또 치료까지 해주기 때문에.
그러니까 마음이 아프다면 시인들의 고통을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고마워하면 된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환절기> 중에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