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돌을 던진 사람은 뒤돌아서면 잊을 일이니까.
요새 다양한 시도로 글을 써보고 있어요.
이 글은 친구에게 말하듯 대화체로 써 봤습니다.
지인들 사이에서 내 별명 중 하나가 ‘사과하세요.’야. 부당한 일을 겪으면 그 자리에서 똥인지 오줌인지 가리지 않고 질러버리거든.
“사과하세요.”
당연히 한 번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은 적은 없었어. 오히려 그렇게 말해서 얻어맞을 뻔한 적만 있었지. 그럼에도 나는 사과하라고 상대한테 말하는 사람으로 살 것 같아. 그렇게 날 만들었던 사건이 있거든.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고 친구도 많은 나를 보면서 넌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왕따를 많이 당했어. 눈치가 없고, 사회성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지. 그중 가장 힘들었던 왕따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
그 시절 당했던 왕따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게 할 만큼 대단했지. 학교 짱에게 찍혀서 왕따가 되었거든. 평범했던 학교 생활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지. 생각해 보면 아주 우스운 일이 발단이었어. 하루는 학교에 도착해서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는데 한 여자애가 책상에 걸터앉은 채로 내게 말을 거는 거야. “네가 겨움이야?” 그렇다고 하니까 중학교 때 잠깐 사귀었던 남자 친구 사진을 아직 갖고 있냐고 물어봤어. 그렇다고 하자 그 사진을 자기한테 달라는 거야. 밑도 끝도 없이. 뭐래? 얜. 난 생각도 하지 않고 ‘싫다’고 했어. 그건 그 아이와 나의 추억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말도 안 하고 주는 건 예의가 없는 것 같다고 따박따박 말했지. 나를 빤히 쳐다보던 아이가 알겠다며 돌아갔고, 그 일은 까맣게 내 기억 속에서 잊혔어.
그러고 나서 이주 정도 지나서 매점에 친구랑 간식을 사러 가는데 나를 지나가던 여자애가 어깨를 일부러 툭 치는 거야. “아야!”하고 아파하는데 비릿하게 웃으면서 “미친년아, 눈 똑바로 달고 다녀. 디지게 맞기 싫으면.”라고 말했어. 그 말이 내 귀에 닿기도 전에 그 여자애의 친구들이 까르르 웃기 시작했지. 어안이 벙벙했어. 뭐 이런 개뼈다귀 같은 게 있지? 열 받았지만 쪽수가 밀리니까 참기로 했지. 근데 그게 시작이었어. 급식 시간에 밥을 먹고 있으면 그 무리의 아이들이 내 옆을 지나가면서 “씨발 존나 똥 마렵네.” “똥내 나네”하면서 보란 듯이 욕을 했고, 수학여행을 가서는 모자를 쓰고 온 나한테 “병신 모자 쓰고 왔냐며” 대놓고 쌍욕을 했지. 처음에는 너무 당황해서, 그러고 나서는 무차별적으로 당하기 시작했어. 쉬는 시간이면 우리 반에 일부러 찾아와서 내게 욕을 했고,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가다가도, 수없이 욕을 들었지.
‘나한테 그러지 말라고 해볼까?’ 주변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그 무리의 짱이 얼마 전에 다른 학교 애들이랑 패싸움을 해서 상대 애 손가락이 분지러졌다더라, 쟤네들은 면도칼을 들고 다니면서 얼굴을 긋는다더라 하는 답변만 들었지. 무서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참으면 그만하겠지 싶었지만 괴롭힘은 나날이 지독해졌고, 그 패거리가 무서워서 반 친구들도 서서히 내 곁에 오지 않았어. 난 최대한 숨죽이고 눈에 띄지 않게 살려고 발버둥 쳤지.
널 죽여버리고 싶다고, 네가 불행해지길 바란다고 몇 번이나 편지를 썼어. 빼곡하게 내 분노를 표현했지. 편지를 다 쓴 후에는 다 찢어버렸어. 보낼 용기가 없었거든. 혹시나 그 편지로 더 괴롭힘이 심해지거나 끌려가서 맞을까 봐 두려울 뿐이었어. 그렇게 점점 없는 사람처럼, 묵묵히 받아내는 시간을 견뎠지. 지옥 같던 일 년이 지나고 새 학기가 왔어.
새로운 반이 배정되었고, 봄방학을 마친 후에 ‘이번 학년은 정말 새롭게 잘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반에 들어섰어. 칠판에는 앉을자리와 함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내 자리를 확인해 보니 1 분단 맨 끝 창가 자리였어. 짝꿍을 확인한 순간 당장 집으로 뛰어가고 싶었어. 왕따 시켰던 무리에서 나를 가장 저질스럽게 괴롭혔던 아이의 이름이었어. ‘정한나’. 성이 같은 우리는 가. 나. 다 순의 지옥에서 다시 만난 거야. 그년과 짝꿍으로 새 학기를 시작한다는 건 나가 죽으라는 이야기와 같았어. 아직도 절망스러웠던 그 순간이 기억나. 작년보다 더 힘든 한 해를 보낼 것이라는 직감과 함께 멍하니 운동장을 바라보며 앉아있었어. 도망칠까? 도망친다고 방법이 있을까?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온 통 머릿속에는 살 궁리뿐이었지.
그때, 옆에서 소리가 들렸어. “겨움아, 안녕?” 그 애였어. 비릿하게 웃으면서 내게 미친년, 병신 같은 년, 더러운 년, 온갖 욕을 가장 많이 퍼부었던 정한나. 근데 그 애가 환하게 웃고 있었어. 나에 대한 아무 적대 감 없이 자기 친구를 대하 듯 말이지. 당황스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채하면서 “어.. 안녕?”하고 대답했어. 그리고 한나는 반에서 나를 가장 잘 챙겨주는 친구가 되었어. 좋아하는 사람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라는 미술시간에 부끄러운 듯 카드를 써서 보내 주고, 같이 팔짱을 끼고 매점에 가서 과자를 사 먹기도 했지. 나를 괴롭혔던 중심인물, 학교 짱은 다른 반이었는데, 하나랑 잘 지내게 되면서 걔하고도 웃으면서 얘기하고, 밖에서도 만나서 노는 사이가 되었어. 어이없게도 나를 괴롭혔던 무리들과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게 된 거야. 이것들이 단체로 약을 먹거나, 기억상실증이 걸린 건가 싶을 정도로 너무 다른 태세에 한동안 적응이 되지 않았지. 그러나 난 살기 위해서 빠르게 적응하고 그 친구들과 깔깔거리면서 2학년을 보냈어.
2학년을 마치고 3학년 반 배정이 발표 났을 때, 한나는 나랑 다른 반이 되어서 아쉬워했어. 마지막 인사를 하던 날 사실 난 미치도록 묻고 싶었어. ‘나한테 왜 그랬냐고. 내가 너희 때문에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아느냐고.’ 말이야. 입 안에만 맴맴 돌던 그 말을 결국 하지 못했어. 그 말을 뱉는 순간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다시 살아나서 한나를 비롯한 그 무리가 날 다시 괴롭힐까 봐 무서웠거든.
천진난만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그 아이들을 보면서 ‘돌을 던진 사람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삶의 진리를 배웠어. 그때부터 난 나를 부당하게 대하거나 상처 주는 모든 것에 반항해도 괜찮다는 용기를 얻었어. 어차피 저 사람은 뒤돌아 서는 순간 잊을 것이고, 기억조차 못할 거라는 걸 깨달았거든.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저항해야, 저항했다는 사실이 내 자신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배웠어. 마지막까지 한나에게 나를 왜 괴롭혔는지 물어보지 못했던 건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으니까.
그 일 덕이었을까, 고등학교 3학년 수시를 합격하고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데 그날 주류 담당 아저씨가 평소보다 일찍 물건을 배달했어. 크리스마스이브날인데 이러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다면서 나보고 저녁에 약속이 없냐고 했지. 집에 가서 가족과 보낼 거라고 했더니, 그러지 말고 자기랑 밥이나 먹자는 거야. 난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어. 그랬더니 이 아저씨가 내 팔을 강하게 잡아당기면서 “내가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나랑 밥이나 먹자니까?”하더라고. 당황한 나는 점장님한테 도와달라고 했어. 점장님도 웃으면서 “아니 우리 딸을 지금 어딜 잡아당기는 거예요?”했는데, 그 아저씨가 그때 “그럼 젖탱이를 잡아요?”라고 말했지. 점장님은 당황해서 허허허~ 웃었고 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어. 그 아저씨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일 이야기를 이어 나갔고, 출출하다면서 빵 하나를 계산해 달라고 했지. 바코드로 빵을 찍고, 가격을 확인하는 내내 내 머릿속은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어. ‘내가 지금 이 순간을 그냥 넘기면 난 두고두고 후회할 거야. 그냥 넘기지 말자. 이건 부당해.’ 심장이 튀어나올 듯 긴장되었고, 아저씨의 눈도 쳐다보지 못할 만큼 무서웠지만 입을 열었어.
“아까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신 거... 사과하세요.”
아저씨는 멈칫, 하더니 갑자기 머리를 90도로 숙이고 “아이고오~ 죄송합니다아아~.”하고 비아냥거리더니 껄껄 웃었어. 난 얼음처럼 멈춰 그 자리에 서서 차갑게 그 아저씨를 쳐다봤어.
일을 마치고 집에 걸어오는 길,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어. 그 병신 새끼에게 사과하라고 말한 내가 대견해서 미칠 지경이었어. 기분이 좋았지. 앞으로 그 누구도 함부로 날 대하지 못하게 할 거야. 난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지. 그렇게 십 대의 마지막이 가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