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그렇게 삶을 살아내고, 또 살아간다. 문어 선생님처럼.
나는 상당한 넷플릭스 애독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2016년 1월 넷플릭스가 처음으로 한국에 론칭했을 때부터 나는 넷플릭스 구독자였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룸메이트와 넷플릭스 패밀리 회원으로 가입해서 보던 익숙한 경험과 그 당시 하우스 오브 카드의 새로운 시즌을 한국어 자막으로 따끈따끈하게 보기 위한 나의 열망이 나를 넷플릭스 초기 구독자로 이끌었다. 넷플릭스의 구독 초반에는 한국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생경한 소재들의 외국 드라마들을 보려 넷플릭스를 켰다. 하지만 넷플릭스 5년 차 고인물 구독자가 되어가면서 점점 외국 드라마보다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유튜브나 웹사이트에서 리뷰를 해주는 인기 콘텐츠는 아니기에 내가 원하는 종류의 다큐멘터를 찾아내기까지는 꽤나 긴 인고의 시간이 필요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새롭게 나오는 드라마들은 다양한 프로모션과 함께 화려한 광고 영상을 제공해주지만, 다큐멘터리의 경우 대부분 드라마처럼 프로모션이나 눈길을 사로잡는 짧은 광고 영상 하나 없는 것이 대부분 있었기에, 내가 개척자이자 탐험가가 되어 숨은 보석 찾기를 자처해야만 했다. 하지만 외국 드라마 콘텐츠들에서는 느끼기 힘든 여운을 오랫동안 남겨주는 다큐멘터리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나는 그 노력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찬바람이 불어오던 10월의 어느 주말 저녁, 여느 때처럼 저녁식사 후 모든 정리를 마친 후 나와 남편은 자연스레 커다란 티브이 앞에 앉았다. 오늘도 넷플릭스에 숨어 있는 보석 같은 다큐멘터리를 찾기 위해 넷플릭스 버튼을 눌러 스크 롤러를 내리던 중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다큐멘터리 제목 하나가 보였다.
My Octopus Teacher - 나의 문어 선생님
문어가 선생님이 어떻게 될 수 있겠냐라는 우스운 생각과 함께 (내가 알고 있는 문어라곤 월드컵에서 우승할 국가를 예측하던 똑똑한 문어가 전부였다.) 왜 문어가 주인공의 선생님이 되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함께 들었다. 이런 양가감정 사이에서 나와 남편은 한 시간 반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의 다큐멘터리를 함께 시청하기로 합의했다. 적어도 감독이 우리에게 왜 문어가 선생님인지는 알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Craig Foster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오랜 시간 동안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직함이 부담으로 다가온 그는 그로 인해 무너진 삶을 방치해버리고 있었다. 삶의 목적이었던 존재가 삶의 방해물로 느껴질 때, 우리는 무기력한 자신과 조우하게 된다는 사실을 감독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었다. 감독은 결국 자신을 다시 세우기 위해 가장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폭풍의 곶'으로 이주하게 된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매일같이 마주하는 일상을 보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는 어쩌면 삶의 답이 자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렇게 돌아간 바닷가에서, 감독은 대서양의 차가운 물속을 가르며 바닷속을 탐험하기를 시작했다. 험한 파도가 그를 매섭게 반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파도는 매서울지언정, 파도를 품고 있는 바닷속은 고요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함을 무한히 느낄 수 있는 바다에서 그는 기이한 물체 하나를 만나게 된다. 바닷속 바닥에 흩어져 있을 법한 아무런 일관성도 없는 조개껍질들로 이뤄진 하나의 둥근 물체. 무엇인가를 피하기 위해 잔뜩 긴장하여 웅크린 물체와의 만남,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감독과 문어 선생님의 첫 대면이었다.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매우 단순하다. 우연히 만난 암컷 문어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 감독이 매일같이 그녀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 다큐멘터리의 전부이다. 감독은 천적을 피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암컷 문어를 관찰하다 결국은 자신을 친구로 받아들이며 먼저 빨판을 내미는 암컷 문어와 새로운 형태의 우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1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는 암컷 문어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가 가르쳐주는 삶의 자세를 배우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 나아간다. 그리고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관계의 종착지에 다다른 순간 그는 그녀의 삶의 마지막 순간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생태계 속 한 생명체로써의 역할만을 수행하는 것으로 그녀와 그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야생동물에게 환대나 지속적이며 안정된 우정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 잘 보일 필요도 없으며 더불어 우리의 마음을 얻어낼 수 있는 달콤한 언어를 내뱉을 능력 또한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사회에서 지속하고 있는 '관계'의 깊은 이면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전제가 존재하기에,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존재의 관계가 존재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아무런 목적 없는 관계가 존재하기 어려운 인간사회에서, 우리는 꽤 자주 '관계' 그 자체에 환멸을 느끼기도 한다. 1년간 연락이 없던 친구에게서 온 새해인사를 전하는 카톡에서 반가움을 느끼기보다, 인사 뒤에 이어질 친구의 대화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익숙한 나는 모든 종류의 관계를 만들지 않으려 노력한다. 관계에 대한 회의론적 접근 때문인지 몰라도 어른이 된 이후, 나는 관계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도, 그리고 그리 큰 기대를 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문어 선생님과 감독이 보여주는 새로운 종류의 관계에 큰 흥미를 느꼈다.
다큐멘터리 속 암컷 문어가 우연히 만난 인간과의 관계에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암컷 문어가 인간에게 자신을 대신해 사냥을 해오길 바라며 관계를 맺었을까? 그녀가 인간이 자신을 천적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임을 바라며 관계를 맺었을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해줄 일 없는 신기한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다큐멘터리 속 암컷 문어는 아무런 목적 없이 먼저 그녀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저 인간, 그 존재 자체를 반기며 아무런 판단과 목적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관계 그 자체를 맺는 데에 집중했다. 아마 감독은 그런 문어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소중함과 더불어 나와 관계를 맺는 생명체에 대한 존중을 함께 느꼈을 것이다. 인간의 존재 그 자체보다는 인간의 목적화와 도구화만이 관계를 이루는 주된 요소가 되어버린 현대 사회에서 감독과 문어 선생님의 관계는 우리에게 진정한 관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암컷 문어가 살아가는 바닷속 세상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암컷 문어 주변에는 천적인 파자마 상어가 득실거렸지만 그런 문어에게는 생존법을 가르쳐주는 부모도, 지인도 없었다. 그저 스스로 배우고 살아남을 뿐이었다. 살아갈 날이 1년 남짓밖에 남지 않은 암컷 문어는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천척을 피해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곳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었다.
매일 열심히 상어를 피해서 살아보려 하지만 쉽지 않았으며, 결국에는 상어에게 자신의 다리 하나를 내주고 만다. 그렇게 피를 흘리며 돌아간 자리에서 문어는 자신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그 시간을 아쉬워하며 다른 무엇인가를 해내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리고 홀로 웅크려 지켜낸 시간을 지나, 결국에는 자그마하고 조금은 부족해 보이지만 걸어내기에 충분한 새로운 다리를 그녀는 만들어냈다. 자신의 삶이 예전에 비해 훨씬 더 수고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전과 같이 상어를 피해 다녔고, 먹이를 구하며 자신에게 남은 시간들을 최선을 다해 살아갔다.
나에게도 사회는 수많은 천적들이 존재하는 무서운 바닷속 생태계와 같았다. 나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사람들, 나의 부족함을 들춰내어 수치스러움을 안겨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 하지만 생계라는 이름 아래에서 그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고 나를 야단치고 나약한 나의 존재를 비난하는 사람들까지. 그들 속에서는 나는 문어처럼 피 흘리고 살갗이 뜯겨 나아가는 경험을 매일같이 해야만 했다. 수많은 아픔 속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지만 나는 꽤 오랜 시간 내가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프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정말로 사회에서, 세상에서 버림받을 것만 같았고, 지푸라기 끈처럼 잡고 있는 임시적인 인간관계마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프다고 웅크리고만 있으면, 사회에서 도태될 운명임을 스스로가 입증하는 격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내 주변을 둘러싸고 존재하고 있는 그 누구도 내게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치유의 시간을 가지라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내게 모두가 힘든 세상에서 혼자만 아픈척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도 도태되어 사라지지 않기 위해 나는 상처가 덧나는지도 모르고 마치 단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삶을 살아가는 데에 온 정신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결국에 나의 아픈 몸과 마음은 오랜 시간 낡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 못해 올해 초 크게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터져버린 상처는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모른 채로 나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처럼 더 이상 일어나서 앞으로 걸어 나갈 힘과 삶을 이끄는 희망조차 사라져 버렸다. 만약 내가 다큐멘터리 속 문어처럼 나 자신의 회복력을 믿고, 상처를 인정하며 혼자 웅크리며 치유의 시간을 가졌더라면, 적어도 몸과 마음이 터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닷속 문어 선생님이 나와 달리 스스로를 믿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은 상어에 의해 다리가 잘려 나아갔을지라도 홀로 아픈 시간을 보내고 또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부족하지만 꼭 필요한 다리가 생길 것이란 사실을 문어 선생님은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괜찮아질 힘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무기력에 둘러싸여 '해도 안될 거야'라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내가 지니고 있는 회복의 힘을 믿지 않았다. 그런 내게 다큐멘터리 속 문어 선생님은 스스로를 믿어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던져주는 듯했다. ' 우리 모두는 아플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스스로 그 아픔을 치유해낼 힘 또한 있다'라고.
꽤 오랫동안이나 나는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어 괴로워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대부분이 고통스러울 것임을 알면서도 왜 살아야 하는가, 그 답을 찾지 못해 나는 괴로웠다. 무엇인가 되려도 애를 쓸수록 더 나은 미래가 주어지기는커녕 되려 더 큰 고통만이 나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20대의 긴 터널을 지나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공부를 열심히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고, 그래서 공부 그 자체를 삶의 이유로 삼았다. 그렇게 성인이 되어 도착한 대학에서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스펙을 열심히 쌓으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속임을 당해 도착한 곳은 기대한 천국이 아닌 또 다른 지옥일 뿐이었다. 30대가 되어서야 더 이상 속고만 살 수 없다며 스스로 삶의 이유를 찾아보겠다며 꽤 오랜 시간을 노력했다. 다른 종류의 성취를 하면 삶의 이유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부지런하게 살아보면 삶의 이유를 알아낼 만큼의 능력이 생기지 않을까? 삶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 나는 또 열심히 무엇인가를 쫓았다. 과거에는 쫓을 목표를 정해놓고 달렸다면, 이제는 쫓을 목표를 찾아내기 위해 다시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력질주를 하면 할수록, 무엇인가를 갈구하면 할수록 나는 나의 못난 부분과 만날 수밖에 없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 친구의 성취나, 같이 있던 대학원 동기의 논문 투고 소식이나, 아는 지인의 출판소식을 들을 때마다 역시나 '나는 도태할 운명인가'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이들을 부러워하며, 내게 주어진 삶의 의무나 이유 따위는 없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일 수였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다큐멘터리 속 문어 선생님은 내게 삶은 그저 살아내는 것이 이유라고 알려주었다. 천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리가 잘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항시 목숨을 잃을 수만 가지의 이유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묵묵히 오늘과 다가올 내일을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었다. 삶에는 본디 거창한 목표도 대단한 이유도 없다는 것을 문어 선생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 자체가 삶의 목표이자 이유라는 것을.
지구별에 도착해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는 자연 속을 살아가는 생명체라는 같은 특질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인간과 문어의 삶의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큐멘터리는 아름다운 바닷속 모습과 함께 보여주었다. 문어 선생님은 한 시간 반이란 시간 동안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나에게 수많은 질문의 대답을 알려주었다. 나 자신의 회복력을 믿으며, 자신의 상처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라고 전하며, 매일 밤 우울감과 무력감에 빠져, 스스로 아무런 삶의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결론 내리고 말아 버리는 내게 삶은 그저 살아내고 살아가는 것이라 이야기해주었다. 문어 선생님 자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