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많은 사람을 어찌할 것인가?
종로구에 사는 미정은 집 밖에 나오지 않은 지 세 달이 되었다. 나이는 31세. 직업은 없다. 일을 그만둔 지는 육 개월 째이다. 통장 잔고가 바닥나고 있다지만 도무지 몸을 일으켜 나갈 힘이 나지를 않았다. 집안은 쓰레기로 덮인 지 오래다.
그녀는 취업을 다소 늦게 한 편이다. 재수 1년, 대학 4년, 공무원 시험 준비 3년, 취업 준비 2년. 서른에 처음 마주한 사회는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직속 상사는 업무가 서투른 그녀에게 폭언을 일삼았다. 대가 없는 야근과 아무렇지도 않게 강요되는 회식에 숨이 막혔다. 그녀는 상사를 탓하다, 사회를 탓하다, 이내 그녀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사회가 이런 모습인 걸 몰랐던 게 아니다. 아니까 공무원 시험에 도전한 거였다. 결국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여 작은 회사에 취직한 그녀만 문제인 것 같았다. 그녀는 중증 우울증을 진단받고 퇴사했다. 회사에서 나온 후에도 해방감보다 살아남지 못한 자신을 향한 책망이 그녀의 일상을 지배했다. 그녀는 아무도 초라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궜다.
경기도 수원에 사는 형섭은 방 안에 틀어박힌 지 1년이 넘었다. 경기도 모처의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울산의 조선 공장에서 일하다 2년만에 일을 그만뒀다. 쇳가루가 목에 박히는 듯한 느낌을 견딜 수 없다고 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부모는 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학에도 가지 못하고 일도 금방 그만두는 그가 사람 구실을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부모의 모멸적인 시선은 내면의 분노로 바뀌었다. 그는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인터넷 게임과 커뮤니티 활동을 하며 보낸다. 숙식은 집에서 해결하지만 가족 구성원과 소통하지 않는다.
서울에 거주하는 19세에서 39세 사이 고립 청년은 13만 명 규모로 추산된다. 이들은 대부분 실직이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립을 선택했다. 먹고사는 행위 이외의 행동을 하지 않는 이들은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고는 하나 사회 어느 곳에서도 활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들은 잠시 죽어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저편에 자신의 신체를 구겨 넣었다. 멀쩡하게 활동할 수 있음에도 도무지 나오지 못하는 13만 명의 사람들. 이들은 어쩌다 집구석으로 들어간 것일까? 다르게 말해 우리는 어쩌다 이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릴 수밖에 없었을까?
가자,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사회는 하나의 피라미드요, 당신은 저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 지금 청년 세대를 구성하고 있는 90년대 출생자들은 상위 클래스를 선망하며 이들처럼 되는 방법이 있다고 교육받았다. 각종 자기 계발서와 위인전이 90년대생을 자극했다. 반기문의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민사고 출신에서 미국 명문대에 합격한 학생의 <공부 9단, 오기 10단> 따위의 책이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다. 저자들은 한껏 거들먹거리며 인내하고 참으면 어느샌가 인생의 열매가 맺힐 것이라 주장했다.
토마 피케티는 2013년 <21세기 자본>을 통해 노동 소득의 성장 속도가 자본 소득의 성장 속도보다 빠를 수 없음을 논증하였다. 2023년의 우리는 이제 일반적인 수준의 노동 만으로는 사회 상위 계층으로 올라설 수 없다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90년대생이 한창 레이스에 열중하고 있을 당시만 하더라도 커리어에서의 성공이 상위 계층 진입의 주요 수단으로 평가받았다. 각기 다른 출발선에 선 이들은 특목고-일류대학-대기업-성공이라는 일련의 공식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이 레이스에서 트로피를 거머쥘 수 있는 자는 전체의 5% 미만이다. 90년대생들이 치른 수학능력시험은 2013년 기준 62만 명이 응시하는 시험이었다. SKY로 불리는 최상위권 대학 입학 정원은 모두 합해 1만 명 정도로, 단순 계산에 따르면 응시자수의 1.6%만이 첫 번째 레이스를 통과할 수 있었다. 정원이 정해져 있는 이상 어떤 이의 승리는 어떤 이의 패배를 의미했다. 문제는 62만 명 모두가 자신이 그 1.6% 안에 들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70~80년대생이 졸업 후 3저 호황이라는 짧은 황금기를 누린 것과 대조적으로 80년대 후반~90년대생은 IMF 경제위기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벼랑 끝 고용 시장까지 고려해야 했다. 이제 명문대에 갔다고 대기업에 갈 수는 없다. 대기업에 취직한다고 해도 거기에서 살아남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강한 노동 강도, 군대식 조직 문화, 여성의 경우에는 성차별로 인한 조기 경력 단절까지 고려해야 한다. 산 넘어 산이라는 표현이 딱 적절했다. 청년은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안정 지향적인 청년은 공무원 시험 준비에 돌입했고, 성취 지향적인 청년은 스펙 쌓기에 열중했다. 1학년을 마치고 뜻있는 고시생들은 휴학을 결정했으며, 섣불리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지 못한 이들은 공모전 포스터로 가득한 게시판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명문대에 입학한 20살들은 새내기의 낭만보다는 먹고사니즘에 열중했다. 본디 한국 사회는 높은 노동 강도로 중년을 열심히 갈아 넣는 대신 청년을 대학 캠퍼스의 낭만 아래 살짝 놓아두는 경향이 있었다. 10년대 학번부터 그 경향성은 청년에 의해 자발적으로 무너졌다.
그렇게 살라고 누가 칼 들고 협박함? 너무나 모범적인 90년대생
90년대생은 외친다. 사회가 하라는 대로 하며 살아왔더니 숨 막히는 직장 생활만 남았을 뿐이라고. 사회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행복이 보장되는 거 아니었어요? 이들의 항변에는 자신의 불행에 스스로의 책임 따위는 없다는 무책임까지도 느껴진다. 기성세대는 억울하다. 누가 모범적으로 살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나? 그놈의 사회라는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었나? 알 수 없는 억울함으로 퇴사하는 90년대생과 기성세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
90년대생은 모범적이다. 60년대생은 독재정권에 맞섰고, 70년대생은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80년대생은 오렌지족으로 길거리를 누볐으나, 90년대생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적이 거의 없다. 그들의 전장은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이다. 일간베스트 사이트를 조직하여 혐오를 발산했고, 디씨인사이드 갤러리에서 선을 넘을 듯한 드립을 치며 놀았다. 90년대생은 온라인에서의 전투력과 오프라인에서의 전투력에서 크게 차이를 보인다. 위험 회피 성향이 강하며 남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 직장 생활에 적응을 못했다고 해서 모두 집안에 틀어박히는 것은 아니다. 꼭 정석적인 루트대로 가지 않아도 경제적인 성공을 얻을 수는 있다. 사실 원래 인생은 다양하고, 삶은 복잡한 것이 아니었던가? 문제가 있다면 90년대생 대다수가 그 단순한 인생의 진리를 10대가 아닌 30대가 되어서야 겨우 깨달을 듯 말 듯 하다는 데 있다. 청년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성공 공식에 자신의 삶을 옭아맨다. 판교 신혼부부가 아니면 결혼할 자격이 없다. 대기업에 들어오려면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한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명문대 출신이 아닌, 대기업 출신이 아닌 사람은 전부 사회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가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사회는 애초에 그런 곳이 아니지 않은가?
다시 피라미드로 돌아가보자. 지금의 청년 세대는 사회를 슬픈 하나의 삼각형으로 인식하는 데 익숙하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자기 계발서를 통해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피라미드의 중간 단계에는 소위 말하는 명문대-대기업-성공의 공식을 이행하고 있는 자들이, 아랫 단계에는 어릴 적부터 들었던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의 사람들이 위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를 가슴속 두려움의 이정표로 삼아 싫어하는 공부를 꾸역꾸역 해내며 현재의 즐거움을 희생한다. 마침내 무언가 도달할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스펙’을 쌓은 순간이 되면, 자본으로 자본을 만들어낸 사람과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고 산 사람들의 성공을 목도한다. 스스로 만들어 낸 도그마에 자아를 가둬버린 청년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뱉는다.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왜 사회는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을 주지 않는 거죠? 몇몇 90년대생은 자신이 희생하여 공부한 대가로 당연하게도 서울 경기의 괜찮은 아파트, 매력적인 배우자, 그리고 괜찮은 인생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열심히 하지 않은, 다시 말해 이 사회를 버텨내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가질 자격이 없다는 말과 동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이란 피라미드처럼 혹은 사다리처럼 굴러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쉽게 주어지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죽도록 가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
자기 측정과 자기혐오의 사이에서
회사원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자신의 현재 사회경제적 수준을 가늠해 달라 요청하는 게시글이 업로드된다. 이 정도면 결혼하기 어떤 것 같아? 모은 돈은 xx 천만 원, 부모님 노후 걱정 없고 사는 곳은 강남구! 175cm에 67kg인데 이 정도면 결혼 준비 다 했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가 ㅅㅌㅊ인지 ㅎㅌㅊ인지를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싶어 한다. 이제 모든 것은 평가의 대상이다. 얼굴도, 몸도, 자산도, 결혼 가능성도 모두 평가받을 수 있다. 청년 세대에 만연한 자기 측정 문화는 자기혐오의 문화와 맞닿아 있다. 개인의 고유함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평가하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인식한다. 청년 고립 문제는 자기 측정과 자기혐오의 사회에서 주관적 실패를 경험한 청년이 자신의 존재를 지워간 결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노동 시장에서의 실패가 좌절감의 방아쇠를 당긴다.
스스로를 고립시킨 청년은 사회적으로 죽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비교와 경쟁, 사다리와 피라미드의 문화 속에서 한 번의 실패로 사람을 죽이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삶은 일시적 성공과 영원한 실패. 끊임없는 사다리를 오르고 허들을 넘는 과정이다. 우리는 언젠가 즐기는 시간도, 초라한 자신을 견디며 상처를 드러내는 경험의 미학도, 초심자와 서투른 자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도 잊어버릴지 모른다.
주의할 점은 앞으로 청년 고립 문제가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다니엘 서스킨드는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를 통해 인공지능의 발전이 지금의 일자리 상당수를 대체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전까지 기술의 발전은 일자리를 없애는 동시에 생산성을 향상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자리 보완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높은 숙련도를 필요로 하는 고임금 일자리와 손기술을 필요로 하는 저임금 단순 노동 일자리 수요는 꾸준했다. 다만 인공지능이 발전하면서 향후에는 고숙련 일자리도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인공지능은 이제 법률적, 의학적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소설이나 노래 가사를 쓸 수도 있다. 이전까지 절대 대체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직업들도 인공지능에 의해 일부 대체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다시 말해 미래에는 노동의 수요 자체가 크게 줄 가능성이 높다. 이 말은 노동 시장 진입 자체에 실패하는 청년 비율이 높아진다는 말과 동일하다.
시작하는 청년을 죽이지 않는 사회
우리는 스스로를 죽이는 사람들을 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계속해서 사회가 하나의 삼각형이요 사다리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어떤 문턱을 넘지 못한 이들을 조롱하기만을 반복해야만 할까? 고립 청년 지원을 위한 해결책은 여러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해결책이 세태에 대한 분석을 빠뜨린 채 영혼 없는 격려만을 반복할 뿐이라면, 우리는 스스로를 죽이는 청년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핵심은 교육-노동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서열놀이와 인생이 실패의 연속임을 깨닫지 못하도록 제한적인 경험에 아이들을 가두는 사회의 폐쇄성이다.
실패나 성공은 순간인 반면, 삶은 잔인하게도 계속된다. 실패를 경험했다고 삶 자체를 송두리째 어둠으로 만든 사람은 청년 그 자신일까, 그의 부모일까, 아니면 그에게 무수히 조롱의 메시지를 던진 미디어일까? 분명한 건 미정과 형섭이 겪은 실패가 영원하지 않으며, 그들이 언젠가 반드시 행복한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공과 실패를 구분 짓고 피라미드론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당신은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시작하는 청년을 죽일지 살릴지는 어쩌면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 글 시작의 사례는 가상으로 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