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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ley Sep 18. 2023

거짓 자아가 없는 이의 사회화

솔직함은 무기일까요, 무례함일까요? 가식은 배려일까요, 기만일까요?

며칠 전에 여행 간 친구들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너네는 나를 왜 좋아하는거야?'라는 질문을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렇게 직접적으로 친구들에게 나랑 왜 노는지 물어본 건 처음인 듯 했고, 또 대부분 1대1의 인간 관계를 가져오던 나에게 여러 명의 친구에게서 동시에 이유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그들은 내게 '거짓자아가 없기 때문에'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가진 좋은 점과 나쁜 점, 내가 가진 행복과 불행을 모두 그들 앞에 담담하게 꺼내놓을 줄 알고, 내 감정과 생각을 투명하게 내뱉는 사람이라 좋다고 했다. 거짓 자아가 없다. 살면서 처음 들어 본 문장이었지만, 듣자마자 나를 표현하기에 그만큼 적확한 표현을 없으리라 생각했다.


학창 시절이면 으레 누군가를 함께 뒷담화하는 시간이 온다. 같은 무리에서 놀면서도 그 중에 한명을 은근히 떼놓는 시기가 온다. 참 웃기게도 그건 누구 한 사람에게 특정되지 않고 때에 따라 돌아가며 차례가 오고, 때로는 그 대상이 나이기도 했다. 그 시절 그 관계가 내 인생에 처음 가진 제대로 된 인간관계였는데, 그 때를 되돌아보면 아직까지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이해가 안가는 점이 하나 있다. 친구들은 나와 같이 누군가를 뒷담화 하다가도 그 친구가 등장하면 그 친구에게 세상 다정해지고, 친절해진다는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나와 같이 욕하던 친구를 세상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이도 없고 화도 조금 났다. 그 때는 그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몰랐고, 알 수 없는 나이었다. 그러나 크면서 깨달은 그 때의 감정은 아마도 '불안'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저 친구가 지금 저러는 것처럼 어디가서 내 욕하고 내 앞에선 나를 좋아하는 척 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이었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이 간극을 가장 이해할 수 없었고 무서워했다. 그래서 나는 학창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솔직함'에 목을 맸다.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솔직하지 못한 것에 치를 떨었다. 그래서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각자의 속에 있는 모든 말과 생각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언제나 내가 마음을 준 사람들에게 내 밑바닥까지 모두 까보였다. 그게 내겐 그들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던 내가 한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하고 이런 생각을 전환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나의 상사였던 분이 내게 일을 맡기셨는데 아마 단순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노하우가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 분이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신 탓인지, 나는 이 일에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파티션 너머로 나지막하게 "하루 종일 붙잡고 있네"라고 말하시는 걸 얼핏 들었다. 참고로 이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나는 불안이 높은 사람이고, 불안해지면 내가 사로잡힌 생각을 파고드는 사람이기에, 내 기준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다는 생각에 매몰된 나머지 잘못들은 걸수도 있고, 혹은 저 문장의 주어가 내가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루종일 눈치를 보고, 솔직함이 무기였던 사회 초년생의 나는 저 문장을 듣고 최대한 빨리 처리하여 상사 분께 완료했다고 보고를 하며 한 문장을 덧붙였다. "너무 오래 걸렸죠?" 그리고 그분은 답하셨다. "아니? 생각보다 빨리 했는데?"


상사 분의 반응을 보고 난 두가지 생각을 동시에 했다. '아, 아까 그 말의 주어가 내가 아니었나?'와 '거짓말하시는군.'이라고. 첫번째 생각이 진실이었다면 다행일테지만, 두번째라면 그건 내가 치를 떠는 일이었다. 여기서 내가 솔직하지 못한 것에 치를 떠는 이유가 나타나는데, 나는 열심히 배우고 나아져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정말 생각하신 것보다 일을 오래했다면 그 피드백을 내게 전해야 내가 그 점을 개선하고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던 학창시절의 뒷담화 얘기도 유사한 맥락인데, 나는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는 친구의 단점이 있다면 그 점을 그 친구가 알아야 고치고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내가 그 점을 앞에 가서 짚어주지 못한 점은 나도 비겁하지만, 그래도 뒤에서는 욕만 하고 그 앞에 가서 그 문제를 알아챌 수 없도록 하는 건 오히여 그 친구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 내 문제를 고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내 입장에서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기만당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에 나보다 사회생활을 몇 년 더했던 친구에게 이 일화를 털어놓았는데, 이야기를 다 듣고 친구가 말했다. "근데 그 상사분 입장에서는 그게 너를 배려한 걸수도 있어. 거기서 인턴인 애한테 '그러게 오래 걸렸네'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비난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그 분 입장에선 그게 널 배려한걸 거야." 그 때 처음으로 그동안 내 친구들이 했던 행동과 그 상사분이 하신 행동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배려였다는 걸 깨달았다. 솔직함만을 정답으로 내세우는 나에게 그 행동은 기만이었으나, 오히려 그들에게는 나의 솔직함이 무례함이였던 것이다. 그 때 나의 솔직함이 무조건 강점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사회화라는 건 이 솔직함과 어느 정도의 배려를 위한 가식이 합쳐졌을 때 진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좀 나은가? 아주 조~금 사회화가 된 것도 같지만 여전히 나는 내 친구들에게 거짓 자아가 없어서 좋다는 얘기를 듣는다. 여전히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배려가 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 성격이나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 그걸 들고 내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확인받는다. 내가 이러한 나쁜 행동을 이전에도 한 적이 있느냐고, 내가 너희에게 이런 친구냐고. 그럼 대부분은 아니라고 답한다, 혹은 더 어릴 때는 그랬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렇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이렇게 확인 받으면 마음 한편이 놓인다. 이 마음은 그들이 나를 참아내고 있을까봐 두려운 마음이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과도한) 배려는 받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친구들이 (그렇게까지 순진하거나 바보는 아닌 줄 알지만) 내가 그들을 불쾌하게 하는데도 나를 견뎌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남들한테 솔직한 만큼, 우리 사이의 부정적인 문제도 최대한 서로 꺼내놓고 풀었으면 좋겠다. 여전히 그게 우리가 오래갈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내가 가진 이 솔직함이 회사에서도 무조건적인 단점이 아니긴 하지만, 또 무조건적인 장점이 된다고도 말할 수 없다.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이런 내가 정말 싫어할만한) 한국의 보통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어느정도의 가식과 배려를 장착하고 하는 의사소통에 익숙해져 있고, 나는 그 중에서 나와 같은 방식으로 소통하는 이들만 찾아서 함께 일할 수 없는 것이 회사이므로, 이젠 조금씩 나도 솔직함 위에 배려를 덧씌우는 점을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얼마전 이 지점이 부족하여 좋지 못한 피드백을 전달받은 일이 있었기에, 아직까지 내가 갈 길이 멀다고 더욱 더 느끼게 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내가 또 사회화가 덜 된 부분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부터 이미 변화의 길에 들어섰다고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내 친구들이 나를 좋아하게 한 가장 큰 이유인 나의 솔직함을 아주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 위에 상황에 따라 적절히 필요한 배려의 색을 입혀가며 잘 활용할 수 있겠지. 그렇게 나는 오늘 또 한뼘 더 사회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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