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번역이지만 다른 버전으로 나온 민음사 판본. 문학사상에서 나온 '상실의 시대' 판본도 유명하나, 이번에 읽은 것은 민음사 판본이라 두 가지를 걸어둔다. (이미지 출처:민음사)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
"물론.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야."
(본문 22p)
2016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집필한 '노르웨이의 숲'이 30주년을 맞아 리커버 에디션으로 한국에 출판되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이 2021년 1월 28일이니, 전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 소설이 벌써 35주년을 맞이한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지금 기준에서 상당히 오래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컨텐츠가 빠르게, 다량으로 소모되는 요즘 시대에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해도 무리가 아닐 듯 싶다. (출판사가 그것을 인지하였는지는 모르지만, 노르웨이의 숲 뿐만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의 또 다른 대표작 태엽 감는 새 연대기도 본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다시 출판했다. 이것도 언젠가 읽어볼 생각이다.)
나는 여태까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과는 상당히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대표작이 전부 장편인데다가,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1Q84의 압도적인 분량이 기억에 많이 남아 있어서 시도해보려고 하지도 않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고, '문장은 잘 쓰는데 이야기가 이게 뭐야'하는 감상을 남은 기억이 있을 정도니까. 그리고 20살이 된 2020년 생일에, 나와 마찬가지로 책을 좋아하는 지인에게 이 책을 선물 받았다. (이 지인에게 이번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도 선물받았다. 그것도 다 읽으면 마찬가지로 여기에 글을 남길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정직하다. 1980년대에 나온, 남성 소설가에 의해 쓰인,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20대 초반 남자 주인공의, 사랑과 이별, 죽음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 그대로가 담긴 소설이다. 문장은 단정하고 시니컬하며, 캐릭터와 대화는 실감나고 시대에 대한 묘사도 꼼꼼하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잘 쓰인 소설'이라고 불린다. 잘 쓰인 소설이 오래되면 고전이 되니, <노르웨이의 숲>은 모던-클래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이야기다. 그렇지만 저 위에 반점으로 분리해둔 키워드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 1980년대에 쓰여졌기 때문에 성 인지 감수성과 감성이 더 이상 현대적이지 않다. 특히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는 방식이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굉장히 거북하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둘.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사회상을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어느정도 그 때의 분위기를 알아야 소설에 몰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셋. 사랑과 이별, 죽음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만큼은 진실되며 변하지 않는 가치다.
이런 점때문에 이 이야기의 많은 것들이 걸린다. 읽고 나서 좋은 독서 여행이었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책 표지를 덮은 뒤 '2021년에 읽기에는 좀...'과 같은 소리가 지금 나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시대를 풍미한 것들은 모두 시간이 지나며 퇴색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모든 고전들이 지나가는 통과의례다. 노르웨이의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코멘트를 달자면, 앞으로 이 소설은 고독과 함께 방랑하는 청춘과 계속 있을 것이다. 재즈와 비틀즈를 사랑하고,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길 좋아하며 쓸쓸함이 유독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언젠가 운명처럼 만나게 될 소설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이다. 자학처럼 들렸다면 내가 올바르게 쓴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가득한 감상이다. 소설을 읽고 난 뒤 분노에 휩싸인 채로 적어내려가는 것이니, 비판적이고 비관적인 어투로 적혀있다는 것을 감안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썼다고 해도, 이 책을 꽤 감명 깊게 읽었고 어쩌면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아주길 바란다. 지인의 말을 인용하자면, 나도 이 책으로 인해 '하루키의 저주'에 걸리게 되었으니까.
서른 일곱살 주인공 와타나베. 그는 독일로 향하고 있었고, 보잉 747기에 앉아서, 비행기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를 듣고 과거를 회상한다. 그의 젊은 시절에 함께 했던 연인, '나오코'를 추억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대학에 막 입학하여 문학을 공부하는 주인공 와타나베의 추억은 기쁨보다는 슬픔이, 충만함보다는 외로움과 고독함이, 삶의 환희보다는 죽음의 불안이 담겨 있다.
대학에 다니는 와타나베는 같은 고향 출신인 나오코와 친하게 지내며 연애 관계에 골인하기까지 이른다. 그들은 '기즈키'라는 친구를 사고로 잃어버린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였고, 대학에서 다시 만나 좋은 사이가 된다. 그렇지만 나오코는 기즈키가 죽은 아픔을 극복하지 못하여 정신병에 걸리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시설'에 들어가게 된다. 그동안 와타나베는 발랄하지만 변덕스러운 '미도리'와 만나 미묘한 관계를 이어가고, 가끔 나오코가 있는 시설에 가서 '레이코 씨'와 함께 나오코를 위로하고 시설의 일을 돕는 등 일상을 보낸다. 여기까지가 중반의 줄거리.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소설은 선정적인 장면이 많이 나온다. '신조차 모독하는 지상 최강의 야스머신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모 커뮤니티가 붙여준 별명답게, <노르웨이의 숲>에는 섹스 이야기가 정말 많다. 자, 차근차근 짚어보자. 소설 초반. 와타나베의 선배인 나가사와는 여자친구가 있음에도 여러 여자들과 원나잇을 즐기는 플레이보이로, 와타나베는 그의 소개로 어쩌다 낯선 여자들과 자게 된다. 처음에는 감흥이 없다가, 나오코의 생일에 벌어진 모종의 사건 이후 관계가 소원해지자 나가사와와 함께 여자들을 '헌팅'한다.
"나는 여자들과 자면서도 늘 나오코 생각을 했다. 어둠 속에 하얗게 떠오르는 나오코의 벗은 몸과 내뿜는 숨결, 빗소리를 생각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할수록 내 몸은 더욱 굶주림과 목마름에 떨었다." (본문 93p)
어..음..네.
소설이라는 매체에서 선정적인 장면을 사용하는 걸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 욕망, 관계를 외적으로 표현하는데 이야기 상에서 필요한 도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섹스일 것이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숲>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이고, 주된 주제는 닿을 수 없는 여주인공 '나오코'에 대한 그리움과 여러 인물과 부대끼는 젊은 와타나베의 외로움과 고독함, 그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초상이다. 즉, 주인공에게 이입해야 쓸쓸하고 서정적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데 이런 지점에서 현대의 독자들은 이탈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나오코의 몸을 묘사하는 것에도 부적절한 것이 많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성의 몸을 자꾸만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숭배하려 들며, 그것을 나오코를 향한 와타나베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과 같은 예시를 보자.
"이 얼마나 완벽한 육체인가. 나오코가 어느새 이리도 완벽한 육체를 갖게 된 걸까? 그 봄날 밤에 내가 안았던 그녀의 육체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을까?" (266p)
"지금 내 앞에 있는 나오코의 몸은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나오코의 몸은 몇 가지 변모를 거친 끝에 지금 이렇게 달빛 속에서 완벽한 육체로 새로 태어났다고 나는 생각했다." (268p)
으음..........
이런 반박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 그 육체를 찬미할 수도 있고,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나오코가 작중에서 어떤 인물로 사용되고 있을까?
작중 나오코는 와타나베가 하는 사랑의 대상이며, 능동적인 면보다는 수동적으로 휘둘리는 면모를 보인다. 사랑했다고 봐도 좋을 '기즈키'의 자살 이후 우울에 빠져 슬픔에 헤어나오지 못하며, 와타나베가 '시설'에 편지를 보내거나 찾아와서 함께 자거나 하지 않으면 우울해하기만 하는, '대상화된 우울한 여성 캐릭터'다.
<노르웨이의 숲>의 나오코를 '비탄에 빠진 성녀 캐릭터'라고 칭하고 싶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남자 주인공에 의해 숭배되지만 그 자체로는 우울에 빠져 있고 그로 인해 남자 주인공의 반동을 이끌어내는 캐릭터라는 뜻이다. 그리고 실제로, 소설의 결말에서 나오코가 죽음으로 인해 와타나베는 어두운 시대를 살아낸 청소년에서, 삶을 살아가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나오코와 함께 지내던, 열 네살 차이 나는 레이코와의 격정적인 섹스와 함께.
다음으로 넘어가보자. 짤막하게 나오는 레이코의 서사를 비판할 시간이다. 작중 레이코는 어딘가 병들어있는 어른으로 나온다. 나오코와 함께 시설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그는 트라우마로 인해 피아니스트를 그만둔 충격으로 불행한 삶을 살게 된 인물이다. 시설에서 치료를 받다가 나와서, 피아노 학원 선생이 되어 가르치던 한 살 어린 학생과 만나 결혼하여 행복하게 지내나 싶더니, 어떤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나락으로 몰락하게 된다.
자신보다 피아노를 잘 치는 천재 학생이 등장한다. 열 세 살. 그는 좋지만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로, 폭력의 불안에 시달려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자연스레 자신을 칭찬해주기도 하고 잘못된 걸 바로잡아주는 피아노 학원 선생인 레이코에게 의지하고 학원을 좋아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열 세살 꼬마가(??) 그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연히 레이코는 어른이니 아이를 거부하고 내치지만, 아이는 반대로 레이코가 폭력적으로 자신에게 강요했다며 부모에게 거짓 해명을 한다. 레이코가 살던 곳에 그가 레즈비언이자 정신병원 입원 경력이 있다는 소문이 곡해되어 퍼지고, 남편과의 다툼이 이어진다. 여자아이 하나 때문에 가정이 망가진 것이다. 그리고 레이코는 타인이 두려워져 다시 시설로 가게 된다.
하아.........
작중에는 아이가 선천적인 동성애자라는 것을 넌지시 알리기도 하고, 레즈비언이라는 존재를 지우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노르웨이의 숲>에 등장하는 레즈비언 장면은 전부 퀴어를 대상화하고 이해하지 못한 채로 집필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안일함의 나열이다. 무엇보다 '아이가 동성 어른을 성적으로 유혹한다'는 장면은 작위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작가가 일부러 '여자아이의 악마화'를 하고 있지 않나고 생각될 정도로.
작품에서 와타나베가 만난 여성 등장인물 중에는 '미도리'도 있다. 발랄하지만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고, 와타나베에게 야한 얘기를 자주 하며 자유로운 삶을 사는 인물로 그려진다. 소설에서 '미도리'는 남성들이 주로 편견을 씌우는 '가벼운 여성'의 이미지에 부합한다. 깐깐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자주 실망하고 멋대로 거리를 벌리다가도, 문득 외로움을 느껴 다시 누군가에게 연락을 걸고 마는. 이렇듯 남성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점에서 그려진 여성 캐릭터는 생동감 있기 보다는 평면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패턴에 가깝다. 뇌졸중에 걸린 아버지를 간호하는 반전 매력도 이제는 그렇게 새롭지 않다.
소설의 결말은 여러 가지 방면에서 인상적이다. 나오코는 결국 상실감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목을 매 자살한다. 그 소식을 들은 와타나베는 충격에 빠져 방황하다, 레이코를 만나고 둘만의 장례식(비틀즈의 노래를 메들리로 연주하는데, 이 부분의 음악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으면 정서를 따라잡을 수 있어서 좋다.)을 치르고 죽음을 극복한다. 레이코와의 격정적인 정사 이후 그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미도리가 그리워진 와타나베는 그에게 연락해본다. 오래된 침묵 끝에 미도리가 답한 말. '넌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 와타나베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며, 혼란스러워하며 미도리를 찾아 헤매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적 강점은 '모호한 서사가 주는 여운'과 '시대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씁쓸함'이라고 알고 있는데,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이런 부분이 결말 지점에서 폭발한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한 채로 방황하던 와타나베의 갈 곳 없음을 소설 속의 현실로 끌어옴으로서 독자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그동안 쌓아온 서사가 마음 속에 퍼질 수 있도록 결정타를 남기는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오코의 자살 부분이 마음에 걸린다. 이 작품이 우울하다, 비관적이다, 쓸쓸하다, 여운이 남는다는 대부분 나오코의 죽음에서 기인하는 것일테다. 그러나 이런 소설적 장치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현대의 독자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작가는 남주인공의 반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나오코를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의도적인 여성 캐릭터의 죽음'을 받아들인 독자들은 금방 눈속임임을 알고 있다. 여성을 언제까지 이렇게 납작하게 사용할 것이냐면서. 내가 그러했듯이.
<노르웨이의 숲>은 신비로운 성향이 강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치고는 리얼리즘의 성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르웨이의 숲>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대라는 어두운 시대를 살아간 와타나베의 성장담이자 연애담이며, 동시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가 그 당시 시대에 남긴 코멘트에 가깝다. 위에서 열심히 비판하였듯, <노르웨이의 숲>은 잘못 독해하면 행복하게 연애하다가 갑자기 여자 주인공들이 토라지거나 달라붙거나 하며 주구장창 섹스만 하다가 자살하는 이야기가 된다. 작품이 쓰인&작품의 시대상을 동시에 보아야 그나마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이해한다고 해서 완전히 작품을 공감하고 찬양하게 될 수 있단 소리 역시 아니다.)
1960년대 일본. 이 시기의 일본은 '전학공투회의', 줄여서 '전공투'라는 일련의 학생 운동이 벌어진 시기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 운동은 도쿄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지만, 그만큼 빠르게 진압되었다. 자유와 혁명,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은 거대한 권력 앞에 무너졌고 당시 젊은이들은 좌절을 겪었다. 이런 '절망한 청춘'의 모습이 노르웨이의 숲에서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작중 와타나베는 "거대한 자본이 투자되었는데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다고 대학이 '예, 알곘습니다' 하고 해체될리 없다"고 냉소하며 운동을 벌이는 학생들이 "대학의 주도권을 어디로 옮기던 아무래도 좋았다"고 생각하며 "동맹 휴교가 분쇄되던 말던 특별한 감회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논평한다. "동맹 휴교를 외치던 녀석들이 자리 맨 앞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아이러니를 묘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101-102p) 이런 운동권의 모순과 실패는 다른 등장인물에 의해 지적되기도 한다. 대학에 입학한 미도리는 포크송 동아리에 들어갔고, 그곳의 운동권 학생들에게 "마르크스를 읽으라"고 강요당하지만 이해하지 못하여 "멍청이 취급을 당했다"고 술회한다. (353-354p) 심지어 여성 회원들에게 야식용 주먹밥을 만들어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언급되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런 1960년대를 배경으로 방황하는 청춘을 그려냈다.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는지도 모르고, 이것으로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으며 매일매일을 술과 섹스로 허탕하게 보내는 젊은이의 초상을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와타나베부터 시작해서 '미도리', 그리고 '나가사와' 등 이들은 거리에서 방랑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오코'와 '레이코'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주 일관된 인물들의 모습이다. 이렇듯 <노르웨이의 숲>의 세계는 혁명하는 데에 실패한 걸 본 세대가 겪는 좌절과 고독함, 그럼에도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막막함, 그리고 그를 버텨내지 못해 죽어버리고 마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이 소설은 시대착오적인 여성관과 맥락 없는 섹스씬 때문에 갈수록 점점 빛을 바래고 있지만, 골동품이 골동품이기에 가치가 있듯 아예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시대에 흐르는 어떤 감정을 포착하는 것이 바로 예술가가 할 일이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단정한 문장과 대중문화(특히 서양)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통해, 신비롭고 서정적이지만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그 어려운 일을 550p의 분량으로 해냈다. 그렇지만 이제 이 소설이 현대적인 감성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긴 여정 끝에는 무언가가 있지만, 2021년에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인 여성관이 걸린다. 그럼에도 고독함과 외로움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앞이 보이지 않는 회색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다면 함께 그 속을 걸어줄 인물들이 이 속에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