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

2021년 4월 26일의 기록

by 키오스크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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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 나는 헤르만 헤세에 푹 빠져있었다.

아빠 옆자리에 앉아 헤르만 헤세의 <청춘은 아름다워>를 읽으며 할머니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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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할머니가 투박한 손으로 모난 여름 자두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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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의 자두를 잊을 수가 없다.

눈 감으면 아른거리며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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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의 큰딸이었던 나는 태어날 당시 할머니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내 작은엄마가 아들을 낳자 실제 사랑은 나에게서 그쪽으로 옮겨갔다.

아주 당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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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생을 잊지 못하는 부산 사직동 시영 아파트를 떠나

우리에게 말도 없이 밀양의 아파트로 집을 옮긴 할머니.

그렇게 어느 날 옮긴 집에 어느 날 아빠랑 내가 단둘이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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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빽한 볕이 들어온다 하여 밀양이라던데

정말로 빛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밀양에서의 1박2일은 지금도 내 품 안에 그득히 안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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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내가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큰고모와 큰 고모부도 내려왔다.

넷이서 다 함께 밀양강을 따라 이어진 길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대도시에선 느낄 수 없는 작은 도시의 오밀조밀함 앞에서 마음이 평온했다.

지금 생각해도 밀양의 풍경은 꿈속에서 엿보고 온 곳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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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날 밀양 읍성을 따라 높이도 올라갔던 것 같다.

뒷짐 지고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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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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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위엔 오리 배가 떠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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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강을 따라 걸은 뒤에는

이곳에 내려온 나의 작은 목적을 실현하기로 했다.

어차피 어른들은 내가 듣기 싫은 말들만 들어놓을 테니

함께 있어도 즐겁지 않을 것이었다.

"저는 밀양 시내 구경할 테니 저기 앞에서 내려주세요." 하고서

어른들이 타고 있던 차에서 내려 문을 쾅 닫았다.

내가 아빠와 밀양에 내려갔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영화 <밀양>을 보고 엄청난 영향을 받았던 때였는데

마침 할머니가 뜬금없이 밀양으로 이사 갔다기에 이 동네에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

국문학 시간엔 <밀양>을 주제로 신랄한 발표도 했던 터라

밀양이라는 이름 두 글자에 흠뻑 매료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준 피아노를 찾아갔다.

"준아~ 준아~" 부르며 곧장이라도 신애가 안에서 나올 것만 같았지만

간판만 있을 뿐 안에는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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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으니 신애가 머리를 자르던 '가위 든 남자' 미용실도 나왔다.

시내가 자그마해 다 거기서 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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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시내를 구경하고 구석구석 걷고

필름 사진을 찍으며 내 눈에 모두 담았다.

그렇게 밀양역 앞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들어오니

아빠는 밀양 근처에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며 저녁을 먹고 들어온다고 했다.

'아 아빠도 친구가 있겠구나' 문득 생각했다.

긴 시간이 흘러 고향 친구를 만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라고

마음 한편으로 궁금해했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가 차려주신 저녁상을 혼자 먹고,

또 집을 나가 할머니 집 근처를 배회하며 밤의 밀양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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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할머니 집 현관에서는 밀양역이 내려다보였다.

참 좁은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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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구축 아파트를 가본 적이 없던 때라

할머니가 살고 있는 옛날 아파트가 신기하고, 정겹기 그지없었다.

오래오래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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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할머니가 차려주신 아침을 먹고

아빠와 밀양에서의 마지막 산책을 나갔다.

밀양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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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이 무수히 펼쳐진 둑길을 헤치고 아빠는 강을 향해 걸었다.

그 뒤를 따르는 나는 연신 이 시골 풍경을 담기에 바쁘다.

늘 간절히 바랐던 소박한 시골 풍경에 흠뻑 취해

이 시간 역시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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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펼쳐진 고가 대교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무궁화 열차가 다니는 길이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갈 때면 밀양을 꼭 지나는데

기차 안에서 우리 할머니 집이 보인다.

밀양을 지나는 길에는 늘 마음속으로 할머니에게 안부를 묻는다.

손녀 지나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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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졸졸 흐르는 밀양강에 다다랐다.

물이 깨끗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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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고동을 잡는 아저씨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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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좋아하는 아빠는

시골 소년처럼 두 팔을 걷고 물에 손을 담근다.

여기엔 무엇이 사는가~ 궁금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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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찾은 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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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빠와 나는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짧지만 강렬했던 밀양의 추억.

잊을 수 없는 저 기억 너머에 기차를 타고 다녀오는 곳만 같다.

아빠와 함께 한 여행이라서,

밀양의 볕을 즐길 수 있어서,

할머니의 투박한 손길을 느낄 수 있어서

바람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고 유영하다 돌아올 수 있어서

모든 게 좋았던

6년 전 그 해 여름이었다.



-2015년의 여름을 회상했던 2021년 어느날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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