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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후 Nov 07. 2018

영화 리뷰 <가끔 구름>

'가끔 구름' 다음엔 맑을까, 아니면 흐릴까?


박송열 감독은 2018 인디포럼의 데일리와 가진 인터뷰에서 <가끔 구름>을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명훈(박송열 분)과 그의 연인인 무명배우 선희(원향라 분)의 일상을 담은 연애물”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언급한 ‘일상’은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경향이다. 허문영 영화평론가는 2001년 ‘씨네21’에 기고한 <오인된 일상성>이란 글에서 일상을 담은 한국 영화를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8월의 크리스마스>로 시작하여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로 내려오는 (근작을 찾는다면 <6년째 연애중>과 <연애의 온도>도 들어감직한) 일상의 멜로드라마 계보다. 사소한 것에서 갖가지 에피소드와 우스갯소리를 뽑을 것, 극의 흐름은 절제의 이름으로 잔잔하게 갈 것, 시대상은 가능한 무시하고 순진한 척 굴 것 등을 규칙으로 제시한다.


다른 일상의 영화, 다른 말로는 ‘일상성의 미학’이라 불리는 계보는 <강원도의 힘>에서 출발한다. 허문영 영화평론가는 일상적인 것들을 동원하되 전면적 재구성을 통해 관습적 드라마의 갇혀 있는 의식의 각질을 집요하게 가격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김혜리 기자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재료로 영화 만들기를 특징으로 삼았다. 홍상수, 김종관, 장건재, 김대환, 장우진 감독 등의 작품이 대표적인 경우다.


박송열 감독의 <가끔 구름>은 어떤 일상의 영화에 속할까? 가장 비슷한 영화는 장건재 감독의 <잠 못 드는 밤>이다. <가끔 구름>엔 결혼을 하고 싶으나 현실의 벽에 부딪힌 명훈과 선희가 등장한다. 이들은 <잠 못 드는 밤>에서 아기를 갖는 문제와 사랑이 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닌 신혼부부 현수(김수현 분)와 주희(김주령 분)의 과거로 다가온다. 극 중에서 꿈을 활용하여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 방법은 비슷한 듯 다르다. 박송열 감독이 <잠 못 드는 밤>의 조연출 출신이란 점을 떠올리면 장건재 감독으로부터 영화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정리하면 이야기(일상의 조각들)와 형식(현실과 꿈을 섞은 구조)을 결합한 <가끔 구름>은 <잠 못 드는 밤>처럼 일상성의 미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가끔 구름>은 박송열 감독의 전작인 단편 영화 <밤과 꿈>에서 이어지는 연작으로 읽을 수 있다. <밤과 꿈>에서 대리운전을 하는 꿈꾸는 남자(최동석 분)는 막연하게 다른 세계를 동경한다. 감독은 경제적으로 절박한 사람이 몸담는 대리운전을 통해 한국 사회의 비루한 단면을 관찰하려 한다. 그는 우리 사회를 어두운 ‘밤’으로 보았다. <밤과 꿈>엔 타인의 운전석에 머물던 꿈꾸는 남자가 한 여성으로부터 “아저씨는 꿈이 뭐에요?”라고 질문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고 싶다”고 대꾸한다. 그는 꿈을 들려주며 삶의 주체로 변하고 진짜로 꿈꾸는 남자가 된다. 끝에 비발디의 <사계> 중 봄 악장을 들려준 건 곧 아침, 바꾸어 말하면 희망이란 내일이 온다는 부연 설명과 다름이 없다.


<가끔 구름>에서 ‘밤’과 ‘꿈’은 확장된 이야기로 펼쳐진다. 영화는 오래된 연인들이 부딪히는 현실과 꿈을 좇는 사람들이 겪는 현실이란 두 가지 밤을 하나의 이야기로 포갰다. 명훈은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감독을 꿈꾸나 현실은 밤에 대리운전으로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신세다. 연기 수업으로 돈을 버는 선희는 매번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통에 무명 배우를 면치 못한다. 결혼하고 싶은 명훈과 선희의 ‘꿈’은 경제적 어려움이란 ‘밤’ 앞에 번번이 깨진다.


박송열 감독은 다양한 방법으로 꿈을 건드린다. 감독이 만들고 싶은 작품이란 꿈은 인물의 대사를 통해 표현한다. 선희가 오디션을 보는 곳에서 여성 감독은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건 행동들의 이면에 있는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선희의 언니가 쓴 글을 읽은 명훈은 “나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야. 어떤 큰 사건으로 괜히 자극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이야기로 사람의 마음을 잔잔하게 흔들어 놓는 거”라고 대답한다. 두 대사는 <가끔 구름>을 읽는 주석이자 박송열 감독이 추구하는 영화를 의미한다. 한편으로 감독은 “남들 다 일하는 데 우리만 노는 거 아니야?”라든가 “지금은 이렇게 노는 게 너무 괴로워!”란 대사를 재미있는 상황에 넣어 자신의 속내를 가벼운 톤으로 털어놓기도 한다.


꿈은 명훈과 선희가 마음속 깊이 감추었던 불안을 묘사하는 방법으로도 사용된다.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명훈을 보며 속이 상한 선희는 화를 내며 “돈 한 푼 없는 거지새끼”라고 쏘아붙이다가 “돈만 밝히는 쓰레기 같은 년”이란 말을 듣자 뺨을 때린다. 선희 자신이 그렇게 변할지 모른다고 느낀 불안의 표출이다. 명훈은 헤어지자는 선희의 문자를 받고 그녀의 집에 갔다가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며 “선희야, 이건 아니다.”라고 내뱉는다. 선희가 떠날지 모른다는 명훈의 불안이 꿈으로 드러난 셈이다. 흥미로운 건 상상의 장면들을 굳이 꿈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이후 장면과 무리 없이 이어지게끔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희미하게 지운 재기발랄한 시도다.


<가끔 구름>이란 제목 그대로 영화엔 구름을 보여주는 장면이 다섯 차례 나온다. “영화 속에 사계절을 담고 싶었다”는 박송열 감독의 희망을 고스란히 투영한 듯 구름은 아는 동생과 선희가 대화를 나눌 때(봄), 명훈을 만나러 가는 선희를 보여줄 때(여름), 지인과 통화하는 선희를 담을 때(가을), 명훈과 선희가 차 속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겨울) 등 계절마다 한 번씩 화면을 장식한다. 또한, 구름은 연인 사이의 감정을 뜻한다. 꿈속에서 명훈과 선희가 다투고 난 뒤 카메라는 다음 장면으로 하늘의 구름을 잡는다. 그 순간, 제목 <가끔 구름>은 연인 관계에서 가끔 구름이 낀 흐린 날이란 표현이 된다.



<가끔 구름>은 첫 장면에서 낮에 밝은 미소를 띤 선희를 명훈이 카메라로 포착했던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준다. 그 속엔 행복이 가득하다. 다음 장면에선 밤에 무표정한 얼굴로 대리 운전을 하는 명훈이 있다. 화면은 무기력함과 피로함이 묻어난다. 한때는 행복했으나 지금은 변해버린 연인의 모습을 의미하는 장면 연결과도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선희를 안은 명훈은 절규하듯 “우리 사랑 좀 하자”라고 외친다. 영화의 행복했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뒤에 흐르는 음악은 슈만의 <어린이 정경> 중 ‘꿈’이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선곡이다. 슈만이 <어린이 정경>을 작곡한 1838년은 연인 클라라와 사랑에 빠진 시기였다. 슈만은 클라라의 아버지가 반대하여 가정을 이룰 수 없었지만, 언젠가 그녀와 함께하는 미래란 꿈을 <어린이 정경>에 담았다.


‘가끔 구름’ 다음엔 맑을까, 아니면 흐릴까? 아직은 알 수 없다. 박송열 감독은 화면과 음악으로 지금은 비록 가끔 구름으로 흐릴지언정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다시 해가 떠오를 것이라는 희망과 바람을 드러낸다. 나 역시 명훈과 선희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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