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1] 환자복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걷는 법이 아니라, 살아가는 법을 묻던 그날

by 하프웜

그날은 대수롭지 않은 하루였다.

단순한 촬영 지원. 그저 자리를 채워주면 되는, 흔한 업무의 연장선.

그런데 그날, 내게 환자복이 건네졌다.


“그냥 걸쳐만 주세요. 분위기만 내시면 돼요.”


별생각 없이 하얀색 환자복을 입었다.

천이 피부에 닿는 순간, 기묘한 기분이 스며들었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병원 특유의 냄새와 함께 내 몸이 환자라는 설정 속으로 자연스럽게 밀려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묘하게 재밌었다.

작게 웃으며 어깨를 털어냈다.

그 순간까지는 분명 가벼운 해프닝이었다.



복도를 걷는데

휠체어를 탄 한 환자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눈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걸으세요? 치료는 어디서 받으셨어요?”


순간, 웃음이 멎었다.

내 귀에 들어온 건 질문이었지만,

그 속엔 다른 울림이 있었다.


간절함. 부러움. 두려움.

그는 내 발걸음에서 자신이 닿고 싶은 미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직원이라는 사실을 바로 설명할 수도 있었지만, 입술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너무 진지해서, 내 대답 따위는 사소해져 버렸다.



나는 환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나를 환자로 받아들였다.

아니, 어쩌면 환자가 아니라, ‘먼저 도착한 환자의 미래’로 본 건지도 모른다.


내가 평범하게 걷는 동작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기적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

내 다리가 옮기는 한 걸음이, 누군가의 희망이자 질문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깨달음이 심장을 서늘하게 쓸고 지나갔다.


그날 이후로 나는 걸음걸이를 의식하게 되었다.

발을 내딛는 사소한 순간에도 누군가의 시선이 닿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혹시 내가 너무 가볍게 걸어버리면, 누군가 마음이 무너질까.’

‘혹시 내가 힘겹게라도 천천히 걷는다면, 누군가 위안을 얻을까.’


그 생각들은 내 어깨에 작은 무게처럼 내려앉았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 무게는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조금 더 사람답게,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재활병원에서 일한다는 건 그런 일의 연속이다.

직원과 환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들.

오늘은 환자가 내게 농담을 건네고, 내일은 직원이 환자보다 먼저 지쳐 보인다.

웃음과 눈물이 같은 복도에 흘러넘치고, 서로의 삶이 조금씩 뒤섞인다.


그날의 환자복은 단순한 의상이 아니었다.

잠시나마 내가 환자의 세계 안으로 스며들게 한 통로였다.

그리고 그 통로를 지나오며, 나는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이 병원을 보게 되었다.


처음엔 우스운 해프닝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되었다.

그 질문은 농담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걸으세요?”


그는 걷는 법을 묻지 않았다.

그는 ‘나는 언젠가 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까, 나도 다시 설 수 있을까’라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 그 질문이 사실은 삶 전체를 향한 물음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재활병원은 환자가 다시 걷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하지만 동시에 직원들이 다른 사람의 절망을 함께 짊어지고 걷는 법을 배우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사팀으로서 나는, 그 수많은 걸음과 많은 사람들의 노력 뒷면을 마주하는 사람이다.


나는 지금도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아마 평생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내 마음속에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걷는다는 건, 기다림을 견뎌낸 시간의 선물이니까 당신도 곧 그 선물을 받을 수 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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