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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Oct 10. 2023

P의 발바닥

19시경이었다.

그녀는 막 식사를 마치고 식탁에서 발을 디뎌 두 발로 섰다.

우연찮게 슬리퍼가 없어 맨발로 바닥을 꼭꼭 밟아가며 안방으로 향하던 중, 느꼈다.

슬리퍼가 없을 뿐인데, '발이 아프다' '발바닥이 차갑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았다. 고작 슬리퍼가 없다는 이유로 걷는데 불편함을 느끼다니. 

발바닥은 마치 방금 태어난 태아의 발처럼 말랑말랑했고 뜨거웠다. 바닥에 닿은 뒤꿈치의 감각이 생소했다. 밟지 말아야 한 것을 밟은 것 같았다. 이렇게 차갑고 딱딱한 바닥이라니, 이렇게 연약한 살점이 내 발바닥이라니.


그녀는 잠시 상실감에 빠졌다. 맨발로 산행을 하던 내 튼튼한 발은 어디로 간 거지? 모래사장을 밟으며 바다수영을 하던 내 거친 발은 어디 간 거지? 

믿을 수가 없어 여러 번 바닥에 발을 굴러보았다. 하지만 속살 같은 발바닥의 촉감은 여전했다.


"케이크 먹을 시간이야"

남자가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안방에 가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그녀의 남자와 아이들이 아일랜드 식탁에서 케이크를 꺼내고 있었다.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 이잖아요!!" 신난 아이 1은 까르르 웃어댔고 아이 2는 케이크에 초를꽃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홀린 듯이 식탁으로 돌아가 걸터앉았다. 기계적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촛불이 흔들렸다. 초의 개수를 세었다. 10개가 넘어갔다. 이토록 많은 시간 동안 내 발바닥은 약해졌구나. 예민한 감정이 슬며시 머리를 들자 다시금 노래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15개의 초와 2개의 내 발바닥. 


아이 1이 문득 말했다. "난 지금 이런 엄마의 모습이 싫어" 그녀는 물었다 이런 내가 왜 싫은지.

아이 1은 "감성적이고 때로는 자기 생각에 잠겨있는 엄마가 싫어. 주기적으로 그러더라. 작년 6월에도 그랬고 요즘에도 그래. 엄마는 너무 뒤죽박죽이야. 아빠를 봐 한결같잖아"

주기적이다.

한결같다.

뒤죽박죽이다.

형용사와 부사, 동사들이 뇌리에 박혔다.


"나는 이런 내 모습마저 사랑해, 아이 1 너는 나를 평가하고 판단할 자격이 없어. 난 그저 다채로운 나의 모습마저 사랑하고 있어"

그녀가 냉소적인 혹은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 '그러는 너는 한결같니'라고 이야기하려다 입을 다물고.


아이 1과 그녀 때문에 촛농은 계속 녹아내렸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초는 꺼졌다.

남자와 아이 1, 아이 2, 그녀는 말없이 케이크를 욱여넣었다.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생살이 돋아난 발바닥이 될 때까지 밖으로 한번 나가지 않은 나에게 '평'을 내리다니. 그녀 속에 있는 작은 아이가 눈물이 고인채 눈을 떴다. 


아이 1의 발바닥이 그녀의 발바닥을 노려보았다. '멍청해. 유약해. 어른스럽지 못해'

아이 1의 발바닥이 그녀의 발바닥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네가 그렇게 말랑말랑 해진 건 너의 탓이야. 겨우 장판을 딛고 일어날 정도잖아? 한심하긴.'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아이 1의 발바닥도 결국 나와 같아지면 어쩌나.


그녀는 발바닥들의 비아냥 거리는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조차 없었다. 

그녀의 발바닥은 정작 제 스스로를 대변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구마구 변론하기엔 아이 1의 발바닥은 철없이 어렸으며 그녀의 발바닥은 수십 년 땅을 밟은 터였다. 작디작은 귀한 아이 1의 발바닥에 상처를 줄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내 발이 왜 저 작은 발 앞에서 곤란해해야 하는지를. 왜 내 발바닥은 슬리퍼 없이는 마룻바닥을 제대로 딛지도 못하게 되었는지. 아이 1의 발바닥이 그녀의 발바닥과 같아지는 것이 왜 두려운지.


그때 남자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이 1의 발바닥의 타박이 멈췄다. 아이 2와 아이 1은 먹던 케이크가 엉망인걸 깨닫고 슬며시 자리를 떴다.


그녀는 엉망이 된 자리를 치우고, 양말을 신고, 덧신을 신고, 또다시 양말을 신고, 커다란 부츠를 꺼내 발바닥을 숨겼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같은 이정표가 또 나오고 또 나올 때까지 호숫가를 산책했다. 아무도 그녀의 발바닥이 말랑하다고 타박하지 않았다. 아무도 너의 발은 유약하여 쓸데없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멧비둘기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벤치에 한참을 앉아 뒤꿈치로 흙을 밀어도 보고 당겨도 보고 원을 그리기도 했으나 결국 그녀와 함께하는 것은 시간이라는 물리적 개념이 전부였다. 결국 그녀의 몫인 것이다. 아이 1도, 아이 2도 그 남자도 아무도 그녀를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부츠를 벗고 양말을 벗고 덧신을 벗었다. 또 그렇게 양말과 덧신을 벗었다.

말랑한 발바닥으로 호숫가의 작은 돌멩이, 마른 침엽수의 나뭇가지, 말라버린 거머리를 비적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뾰족한 시멘트가루가 발가락사이로 비집고 들어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집으로 도착한 그녀의 발바닥은

말랑하고,

말랑하고.

더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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