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과 오른손의 이야기.
M은 두 개의 손이 있다.
두 손은 서로 만날 일이 흔치 않았다. 그녀는 손뼉을 잘 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그녀가 다니는 회사의 창립기념일 행사나, 환영 송별회 때 의미 없이 몇 번 손바닥을 마주치는 시늉을 할 뿐.
그녀는 작은 회사에서 경리 업무를 맡고 있다. 작은 회사여서 직원들이 급여까지 지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하루종일 작은 의자에 앉아 데스크톱에 딸린 자판을 두드리는 게 깨어있는 시간의 8할이다.
그녀의 경제력 또한 손뼉을 치지 못하는데 한몫을 한다. 빠듯한 월급에 서울 한복판의 월세는 버거웠다. 공과금을 내고 나면 남는 돈으로 통신비 생활비등을 지출해야 했다. 몇 주 전부터 L매장의 캐시미어 장갑이 눈에 밟혔으나, 눈물을 머금고 가판대의 울 장갑을 사야 했다. 예쁜 꽃을 사서 집에 들여다 놓고 싶은 날이면, 가방에 있는 지갑을 꼭 쥐고 들꽃을 바라보며 집으로 귀가했다. 그런 빠듯한 생활에는 감동이 없기 마련이며,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손뼉 또한 칠일이 없었다.
두 손을 모으고 영화를 보거나, 두 손을 꼭 깍지 끼고 공연을 볼 시간조차 조차 없었다. 두 손을 모으기엔 그녀의 인생이 너무 팍팍했다.
오른손과 왼손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게 살아왔다. 낮에는 키보드 위에서 정신없이 자판을 두드려대고, 저녁엔 오른손이 요리를 하면 왼손은 그사이 전화를 받았다. 오른손이 커피봉지를 잡으면 왼손이 잽싸게 끝을 잡아당겨 커피봉지를 뜯었다. 둘 사이엔 말이 없었으나 죽이 척척 맞았다. M의 팍팍한 인생에 오른손과 왼손은 불평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양팔에 달려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며 그렇게 살아나갔다.
어느 날이었다.
왼손이 현을 잡고 있는 그날, 오른손이 현을 튕겼다. M의 집에 있는 작은 어쿠스틱기타가 먼지를 털고 나온 날이었던 것 같다. 왼손이 열심히 현을 바꿔 잡는 동안 오른손은 커다란 구멍 위에서 춤을 추었다. 세 개의 손가락을 한 번에 써서 화음을 만들기도 하고 다섯 손가락을 차례로 써서 선율을 만들어냈다. 오른손의 우아한 춤에 왼손은 잠깐 넋을 잃었다. 내가 알고 있던 오른손. 네가 보고 싶었어.
왼손은 오른손이 그리워졌다.
어느 날이었다.
오른손이 현을 튕기는 동안 왼손이 현을 바꿔 잡고 있었다. M의 집에 있는 작은 어쿠스틱기타가 먼지를 털고 나온 날이었던 것 같다. 오른손이 열심히 박자를 맞추는 동안 왼손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현을 잡았다 놨다 했다. 네 번의 움직임이 있으면 현을 바꾸어 쥐었다. 어떨 땐 8번 만에 저 멀리서 현을 바꾸어 잡기도 했다. 왼손이 쓸고 다니는 현의 쓰윽거리는 소리와 꾹꾹 눌러 집는 포인트를 바라보며 왼손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곁에 있던 오른손. 네가 그리웠어.
오른손은 왼손이 보고 싶었다.
어렸을 때의 왼손과 오른손은 자주 만났었던 것 같다.
모래성을 쌓을 때도 둘이 토닥토닥 모래를 다듬었다. 피아노를 칠 때는 서로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M이 열심히 공부를 하는 날이면 왼손은 재빨리 오른손에게 지우개를 건네주었다. 그런 오른손과 왼손은 M이 깍지를 끼고 등기지개를 켜는 순간 잠깐씩 만나서 서로를 위로했다. M이 수줍게 웃을 땐 두 손이 함께 입을 가려주었다. M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날 때는 두 손 모두 예쁘게 색칠을 하기도 했다. 손톱에 색칠을 하고 나면 M은 꼭 양손을 햇볕에 가져다 쫙 펴서 자신의 두 손을 감상하곤 했다. 그 순간은 참 따뜻했다, 화사했다. 손가락 사이로 나오는 빛이 M의 얼굴을 웃게 했다.
모든 것이 기억났다.
그때, 오른손과 왼손은 가슴에 무엇인가 쿵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커다란 볼링공이 떨어지는 것과 맞먹는 소리였다.
왼손과 오른손은 기타를 치다 말고 양쪽 무릎에서 서로를 가만히 바라다보았다.
우리가 이야기한 게 언제인지, 우리가 서로를 만나 살을 맞댄 것이 언제인지 둘은 서로 생각에 잠겼다. M도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오랜 시간 잊고 살던 선율에 그만 M도 감상에 젖은 듯했다. 한참 동안 치던 기타를 내려놓고 M은 울기시작했다.
오른손이 먼저 가서 M의 눈물을 닦아주고 내려왔다. 이번엔 왼손이 다녀왔다. 손등으로 닦다가 손바닥으로 닦다가. 왼손과 오른손은 M을 애써 위로하려 했지만
결국 그들도 함께 울고 말았다.
오른손은 왼손의 따뜻한 감촉이 그리웠고, 오른손은 왼손의 마디마디에 담긴 상냥함이 그리웠다. 그들은 그렇게 가까이 있었지만, 만날 수 없었다, 아니 만나지 못해 왔다. 서로 살을 부대껴서도 안되고, 서로 지그재그로 깍지를 끼어서도 안되었다. 그럴 여유가 없는 M의 오른손과 왼손이기 때문이었다. 왼손과 오른손은 오랫동안 서로를 그리워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알면서도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에 왼손과 오른손의 마음은 서리를 맞은 듯 아려왔다.
이 모든 건 잘 못 살아온 M 때문이야. 네가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지 못했어. 둘은 M을 원망했다. 사실 M의 탓은 아니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단지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면 그들이 만나지 못했던, 그들의 삶에서 삭제된 시간에 대한 괴로움이 그들을 미치게 만 들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M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울기 시작했다.
오른손과 왼손은 서로의 모서리에 기대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왼손의 손꿈치와 오른손의 손꿈치가 만나 서로의 얼굴을 비볐다. M의 눈물에 마냥 기뻐할 순 없었지만, 그 짧은 순간을 감사했다. 너와 내가 이렇게 만나 체온을 나눈 게 언제인지, 서로의 감촉을 공유한 게 언제였는지, 왼손과 오른손은 말이 없었다.
그들의 만남은 M의 울음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M의 슬픔에서 비롯되는 만남에 그들은 가슴이 아팠으나 행복했다. M의 슬픔이 느껴져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내일이면 다시 울 장갑 안으로 들어가 서로를 마주하지 못한 채 출근길에 오르겠지, 작은 키보드 앞에서 서로 말없이 자판을 두드리겠지, 의미 없는 전화를 받고, 각자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겠지.
그렇기에 이 순간이 소중했다. 서로가 서로를 다시금 각인하는 시간이었다. 금방 사라질 서로의 향기를 맡고, 촉감을 기억하려 애썼다. M의 눈물을 받던 양손의 손바닥이 말했다. "모든 건 영원하지 않아"
그때였다.
M이 두 손을 깍지 끼고 무릎을 세워 일어난 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