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당신이 매달 받아보는 청구서에 이전에는 없던 항목이 추가됩니다. 바로 ‘존재’를 위한 월간 구독료입니다.
만약 당신의 생명이, 매달 갱신하지 않으면 끊어지는 가느다란 데이터 스트림에 불과하다면. 만약 당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과 사랑의 감정마저 누군가의 서버에 저장된 채, 요금 미납 시 삭제될 수 있는 데이터라면. 이것은 먼 미래의 공상 과학이 아닙니다.
넷플릭스의 SF 앤솔러지 시리즈 <블랙 미러> 시즌 7의 첫 번째 에피소드, ‘보통 사람들’이 그려내는 세계는, 바로 그 지독하리만치 현실적인 가정을 우리 앞에 펼쳐 놓습니다.
이야기는 건설 노동자로 성실하게 일하는 남편 마이크(크리스 오다우드)와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 아만다(라시다 존스), 서로 깊이 사랑하며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는 소박한 꿈을 꾸는 평범한 부부의 초상으로 문을 엽니다.
그들의 행복은 아만다의 뇌종양 진단과 함께 무자비하게 산산조각 납니다. 바로 그 절망의 벼랑 끝에서, 게이너(트레이시 엘리스 로스)가 이끄는 기술 기업 ‘리버마인드(Rivermind)’가 구원의 손길을 내밉니다.
하지만 그들이 내민 계약서는 단순한 동의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식과 쾌락을 위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긴 파우스트의 전설을 21세기에 다시 쓴, 현대판 파우스트의 계약서입니다.
여기서 절망에 빠진 부부는 ‘파우스트’가 되고, 첨단 기술의 후광을 입은 기업 리버마인드는 ‘악마’의 역할을 합니다. 그들이 담보로 잡는 것은 추상적인 영혼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자율성, 기억, 관계, 그리고 의식 그 자체, 즉 인간성의 모든 것입니다.
‘생명 연장’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쾌락을 월 300달러라는 대가와 맞바꾸며, 그들은 앞으로 자신들의 존엄이 어떻게 조각조각 분할 상환될지 알지 못한 채, 미래의 눈물이라는 먹물로 쓰인 그 계약서에 절망 속에서 기꺼이 서명합니다.
영혼의 민영화: 구독 경제의 잔혹한 설계
‘리버마인드’의 사업 모델은 지독히도 교활합니다. ‘수술은 무료’라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으로 문턱을 없앤 뒤, ‘생명 유지’라는 대체 불가능한 서비스를 월정액에 묶어 영원한 고객으로 포획합니다. 아만다의 삶은 이제 온전히 그녀의 것이 아닙니다. 기업의 서버와 결제 시스템에 의해 매달 위태롭게 ‘임대’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플랫폼 자본주의가 사용자를 서서히 잠식하는 과정, 이른바 ‘엔시티피케이션(Enshittification)’의 끔찍한 실사판입니다. <블랙 미러>의 크리에이터 찰리 브루커가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이 개념은, 플랫폼이 사용자와 비즈니스 파트너, 그리고 자신 사이의 가치를 어떻게 교묘하게 이전시키는지를 설명합니다.
사실 이 기만적인 과정은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그것을 경험하면서도, 서서히 끓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익숙해져 버렸을 뿐입니다.
가령, 초창기 인스타그램은 친구들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즐거운 공간이었지만, 어느새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낯선 게시물과 끝없는 광고의 홍수 속에서 정작 친구의 소식은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한때 창작자들의 놀이터였던 유튜브는 이제 영상을 보기 위해 몇 개의 광고를 억지로 견뎌야 하는 인내심의 시험장이 되었고, 플랫폼은 바로 그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프리미엄 구독’을 또 다른 상품으로 판매합니다.
검색 포털의 첫 화면은 진짜 정보가 아닌 광고성 콘텐츠로 뒤덮이고, 온라인 쇼핑몰의 베스트 상품 목록에는 후원받은 제품들이 버젓이 올라와 있습니다. 좋았던 서비스는 서서히 나빠지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시간과 데이터, 그리고 돈은 교묘하게 플랫폼의 이윤으로 전환됩니다. ‘엔시티피케이션’은 이처럼 우리의 무감각과 체념을 먹고 자랍니다.
리버마인드는 바로 이 논리를 인간의 ‘생명’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가치에 적용함으로써, 그 비윤리성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첫 단계에서 리버마인드는 아만다에게 ‘무료 수술’과 ‘생명 연장’이라는 압도적인 가치를 제공하며 그녀를 플랫폼에 유인합니다.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서면, 플랫폼은 포획된 사용자를 착취하여 광고주와 같은 비즈니스 고객에게 가치를 제공하기 시작합니다. 아만다의 의지에 기생하는 광고를 송출하고, 그녀의 뇌 처리 능력을 몰래 훔쳐가 ‘럭스(Lux)’ 등급 사용자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이 단계입니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플랫폼은 사용자와 비즈니스 고객 모두를 희생시켜 모든 잉여 가치를 오직 자신에게만 돌립니다. 아만다의 삶의 질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는 것은, 이 논리의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이 시스템 전체는 우리 모두가 경험해 본 기만적인 설계, 즉 ‘다크 패턴(dark pattern)’의 정수입니다. 어느새 유료 결제로 슬그머니 바뀐 ‘무료 체험’, 미로처럼 숨겨진 해지 버튼을 찾아 헤매게 만드는 구독 서비스, ‘특별 혜택’을 거절하는 우리를 은근히 부끄럽게 만드는 팝업창, 항공권 예매 마지막 단계에서 슬그머니 추가되는 정체불명의 수수료까지. 사용자를 교묘하게 속이도록 설계된 이 모든 불쾌한 경험에는 ‘다크 패턴’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행동, 즉 계획에 없던 돈을 쓰게 만들거나 지키고 싶던 데이터를 넘겨주게 만드는 기만적인 설계입니다. 그리고 리버마인드는 이 기만적인 설계를 가장 끔찍한 극단으로 밀어붙입니다. 단순히 해지를 어렵게 만드는 수준을 넘어, 해지라는 행위 자체를 ‘가족을 버리시겠습니까?’라는 심오한 도덕적 실패로 재구성함으로써, 사랑과 죄책감을 그 어떤 기술보다도 강력한 족쇄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헬조선’의 위태로운 ‘보통 사람들’
‘보통 사람들’의 서사는 특히 미국의 영리 목적 의료 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비판적 은유로 기능하며, 한 번의 질병이 어떻게 중산층 가정을 재정적 파탄으로 몰고 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포는, 보편적 접근과 사회적 연대에 기반한 공적 의료 시스템을 갖춘 한국의 시청자들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불안으로 다가옵니다. 바로 현재의 시스템이 붕괴되어 저런 악몽 같은 미래를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이미 비급여 항목의 확대로 시스템 내부에 존재하는 보장의 격차에 대한 현실적 불안입니다.
이 가상의 청구서가 유독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미 우리가 현실의 수많은 청구서 더미에 짓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적인 주택 가격, 허리가 휘는 사교육비, 불안정한 미래. 이것은 통계 이전에, 부동산 앱을 켤 때마다 느끼는 막막함, 학원비 결제일이 다가올 때의 한숨,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이미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든 ‘삶의 구독료’입니다.
2024년 기준, 대한민국의 가구는 평균 9,128만 원의 빚을 짊어지고 있고, 자녀 한 명에게 들어가는 월평균 사교육비는 47만 4천 원을 넘었습니다. 하지만 이 구조적 절망의 진짜 모습은 ‘월급’과 ‘총재산’의 차이를 볼 때 더욱 명확해집니다.
쉽게 말해, 매달 버는 돈(소득)의 격차보다, 각자 가지고 있는 집이나 땅, 주식 같은 총재산(자산)의 격차가 훨씬 더 심각하다는 뜻입니다. 비유하자면, 사람들의 달리기 속도(소득)는 비슷해 보여도, 어떤 사람은 저 멀리 결승선 앞에서 출발하고(자산), 어떤 사람은 한참 뒤에서 출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최근 통계는 이 출발선 간의 격차가 12년 만에 가장 크게 벌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성실하게 일해서 부를 쌓아 올라가는 ‘계층의 사다리’가 거의 부서져 버렸다는, 씁쓸한 현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통계는 단지 그 집단적 불안에 구체적인 숫자를 부여할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집단적 무력감, 즉 ‘수저계급론’의 서늘한 현실을 반영합니다. 안정적인 중산층이었던 마이크와 아만다 부부가 단 한 번의 질병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은, 바로 이 공포를 스크린 위에 완벽하게 재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파산한 사회적 계약은, 마침내 세계 최저 출생률이라는 가장 조용하고도 단호한 선언으로 귀결됩니다. 2024년 대한민국 합계출산율 0.75명. 이 차가운 숫자는 미래를 향한 이 땅의 젊은 세대가 던지는 집단적 거부권 행사와 같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향한 이기적인 외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무한경쟁과 불안의 세계로 내 아이를 차마 밀어 넣을 수 없다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태의 사랑이자 마지막 책임감의 발로일지도 모릅니다.
존엄의 경매장: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
아내의 생명을 ‘구독’하기 위해, 마이크는 자신의 존엄을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덤 더미스(Dum Dummies)’라는 자해 영상 유료 시청 사이트. 그곳은 현실의 틱톡이나 트위치에서 나타나는 ‘선물 구걸(gift-begging)’ 문화를 극단화한, 디지털 시대의 콜로세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엽기적인 설정이 아니라, 현대 노동의 가장 불안정한 형태인 ‘긱 이코노미(Gig Economy)’, 즉 플랫폼 노동 현실의 극단적 축소판입니다. 아마 우리 대부분은 배달 음식을 시키며 앱 지도 위에서 라이더의 아이콘이 위태롭게 움직이는 것을 보거나, 별점 평가로 누군가의 수입에 영향을 미쳐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소비자로 참여하는 그 시스템의 반대편에, 마이크와 같은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그는 ‘독립 계약자’라는 이름 아래 아무런 고용 보장이나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직 익명의 온라인 군중이 던져주는 변덕스러운 보상에 의존합니다. 플랫폼은 실시간 현금 보상을 제시하며 노동을 게임처럼 만들고, 스트리머들 간의 경쟁을 부추겨 더 자극적인 행동을 유도하는 ‘바닥을 향한 경주’를 만들어 냅니다.
여기서 어떤 이들은 질문을 던질지도 모릅니다. ‘리버마인드의 가장 비싼 ‘럭스’ 등급은 가입자에게 새로운 기술을 즉시 다운로드해주는, 거의 마법과 같은 기능을 제공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마이크가 그 기능을 이용해 고수익 전문 기술을 배워 이 모든 재정적 비극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을까?’
하지만 바로 이 질문이야말로, 이 에피소드가 겨냥하는 시스템의 가장 교활한 지점을 놓치게 만듭니다. 에피소드는 끊임없는 재정 압박과 아내의 상태에 대한 감정적 소진을 통해, 시스템 자체가 피해자에게서 합리적이고 장기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정신적 여유마저 빼앗아 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당장 다음 달 구독료가 통장에서 빠져나갈 것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에게, 미래를 위한 ‘현명한 투자’는 허황된 사치일 뿐입니다. 그것은 오를 수 있는 사다리가 아니라, 그들을 끊임없이 소진 시키는 쳇바퀴인 것입니다. 따라서 마이크의 선택을 탓하는 것은, 결국 구조적 실패의 책임을 무력한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마이크는 마치 칼 마르크스가 19세기에 예견했던 ‘소외(Alienation)’의 모든 단계를 21세기의 방식으로, 하나의 거대한 추락처럼 온몸으로 겪어냅니다. 그 첫 단계는 자신의 노동 생산물인 ‘굴욕적인 자기 파괴 영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 영상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라 익명의 관객과 플랫폼의 소유가 됩니다. 자신의 행위가 자신의 것이 아닐 때, 그 행위의 과정, 즉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된 노동’ 역시 고통스러운 강요일 뿐입니다.
마이크의 노동은 자기실현을 위한 자발적 활동이 아니라, 오직 생존 자금을 벌기 위한 끔찍한 의무가 되어버립니다. 이처럼 강요되고 고통스러운 노동은 결국, 자유로운 의지로 창조적인 활동을 하며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성마저 갉아먹습니다. 인간이 돈을 위해 기꺼이 망가지는 ‘어릿광대’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 완벽히 분리된 존재는 필연적으로 타인으로부터도 고립됩니다. 동료 셰인에게 그 현장을 들켰을 때 마이크가 느낀 극도의 수치심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마지막 연결고리인 타인과의 관계마저 완전히 끊어지는 순간의, 실존적인 고통입니다.
행복이라는 스펙터클, 그리고 사랑의 종언
이 부부가 지키려 했던 그림 같은 교외의 집과 소박한 행복은, 기 드보르의 통찰이 섬뜩하게 현실이 되는 순간, 하나의 ‘스펙터클’이었음이 드러납니다. 드보르에게 스펙터클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휴가지에서 멋진 풍경보다 ‘인증샷’을 찍는 데 더 몰두하고, 슬픈 날에도 SNS에는 행복한 모습을 연출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는 우리의 모습을. 마이크와 아만다 역시 더 이상 직접적으로 행복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채와 질병이라는 현실을 가리기 위해 ‘행복한 중산층’이라는 이미지를 소비하고 연기하는, 자기 삶의 ’구경꾼‘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 비극은 관계의 가장 내밀한 공간에서 그 정점을 찍습니다.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가 갈파한 ‘감정 자본주의’의 논리는 사랑마저 계산 가능한 거래로 만듭니다. 우리는 어느새 관계에 ‘투자’하고, 감정 노동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며, 사랑의 성공과 실패를 효율성의 잣대로 평가하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결혼기념일의 진정한 행복, 즉 ‘진정성’을 느끼기 위해 리버사이드 ‘럭스’ 등급의 30분짜리 ‘부스터’를 구매해야 할 때, 그들의 사랑은 진솔한 교감을 잃고 관리되는 자원, ‘차가운 친밀성’으로 얼어붙게 됩니다. 더욱 교묘한 것은, 이 시스템이 강요하는 ‘치료적 서사’입니다. 관계의 모든 실패는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개인들이 ‘더 나은 등급을 구매하지 못한 실패’로 규정됩니다. 기술이 야기한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기술을 더욱 성실하게 소비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이 끔찍한 순환 속에서 그들의 관계는 서서히 질식해 갑니다.
이야기의 끝에서, 인격이 완전히 잠식당한 아만다는 마침내 간청합니다.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닐 때, 광고 영상이 자신의 얼굴 위에서 깨진 화면처럼 깜빡일 때, 이 삶을 끝내 달라고. 그리고 마이크가 아내의 얼굴에 베개를 눌러 생명을 거두는 그 마지막 순간, 우리는 이 모든 비극이 응축된 하나의 장면과 마주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시스템이 그녀의 영혼을 이미 살해한 뒤였음을, 마이크는 단지 고통받는 육신의 기능을 멈추어준 것뿐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삶으로부터 사랑하는 이를 해방시키려는, 이 뒤틀린 세상이 허락한 유일한 자비이자 가장 끔찍한 형태의 사랑 행위입니다.
‘차가운 친밀성’의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의 증명이 상대를 소멸시키는 행위가 되어버린 이 역설. 그리고 그 직후, 마이크는 ‘덤 더미스’ 라이브 스트리밍 화면 앞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하며, 그들을 완전히 집어삼킨 시스템이 거둔 최종적인 승리를 완성합니다.
최고의 상품이 된 비판
마침내 우리는 이 모든 사유의 끝에서 가장 심오하고도 불온한 진실과 마주합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분석과 비평, 그리고 그 대상이 된 <블랙 미러>의 저항적 서사마저도, 결국 넷플릭스라는 거대한 구독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안전하게 유통되고 소비되는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아이러니가 아닙니다. 이는 시즌 6의 ‘존은 끔찍해’ 에피소드에서 스트리밍 플랫폼이 개인의 삶을 실시간으로 콘텐츠화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바로 그 비판을 자신들의 플랫폼인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했던 것과 같은 맥락의, 시스템의 가장 완벽한 승리 선언입니다. 시스템은 자신을 향한 가장 맹렬한 비판조차 집어삼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는 영양분으로 소화해버립니다. 마치 감옥의 설계자가 수감자들에게 ‘이 감옥은 얼마나 탈출하기 힘든가’에 대해 강연하며 입장료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스템의 자기 보호 기제와 냉소주의는, 작가진이 다른 에피소드에 숨겨놓은 섬세하고도 잔인한 장치를 통해 그 정점을 찍습니다. <블랙 미러> 같은 시즌, 시즌 4의 후속작인 ‘USS 칼리스터: 인피니티 속으로’의 마지막, 스쳐 지나가는 뉴스 자막 한 줄에 ‘리버마인드 CTO 사임’이라는 문구가 등장합니다. 마이크와 아만다, 한 가족을 완전히 파멸시킨 그 거대한 비극의 사회적 결과가, 고작 고위 임원 한 명의 사임이라는 ‘꼬리 자르기’로 정리되었음을 암시하는 씁쓸한 이스터에그입니다.
두 인간의 처절한 죽음과 파괴된 존엄은, 거대 기업의 리스크 관리 보고서의 한 줄과 책임자의 교체로 아무렇지 않게 소모되고, 시스템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포입니다.
<블랙 미러>가 비추는 것은 단지 디스토피아적 미래나 우리 사회의 민낯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 자신의 모습, 즉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명민하게 간파하면서도 그 시스템의 가장 성실한 고객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분열된 자아입니다.
이 에피소드가 던지는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생명과 존엄을 위한 구독료는 얼마인가?’
‘인간의 저항과 각성마저 기꺼이 구매할 수 있는 이 시스템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