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폼 좋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트리거>
총기 청정국의 균열과 디스토피아적 상상력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트리거>가 폼이 좋습니다.
<트리거>는 ‘총기 청정국 대한민국’이라는 견고한 믿음에 균열을 내는 도발적인 설정에서 출발하는데요. 출처를 알 수 없는 불법 총기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택배처럼 배달되고, 이로 인해 연쇄적인 총기 사건이 발생한다는 서사는 권오승 감독이 언급한 “답답한 현실에서 ‘총 한 자루만 있으면’”이라는 발칙하고도 섬뜩한 상상력에 기반합니다.
이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은 공교롭게도 작품 공개 직전 발생한 ‘인천 송도 사제 총기 살인 사건’과 맞물리며 끔찍한 현실성을 획득했습니다. 아버지가 사제 총기로 아들을 살해한 이 비극적 사건으로 인해 제작진은 예정되었던 팬 이벤트를 취소해야만 했고, 이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대적 징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권오승 감독 역시 “마음이 아프다”며 애도를 표하면서도 “작품은 작품대로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창작물이 현실의 비극과 맺는 불편하고도 필연적인 관계를 드러냈습니다.
<트리거>에서 ‘총’은 서사를 이끄는 맥거핀에 가깝습니다. 진짜 질문은 ‘누가, 왜 방아쇠를 당기는가’에 있죠. 이 작품은 총이라는 물질적 도구를 통해, 시스템적 압박, 사회적 소외, 그리고 만연한 분노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한국 사회, 즉 ‘분노 사회’의 병리 현상을 해부합니다.
작품의 제목 ‘트리거’는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하며 서사 전체를 관통합니다. 첫째는 총의 물리적 방아쇠, 둘째는 개인의 억압된 분노를 폭발시키는 심리적 방아쇠, 그리고 셋째는 개인의 폭력이 연쇄적으로 이어져 사회 전체의 붕괴를 야기하는 사회학적 방아쇠, 즉 티핑 포인트입니다.
<트리거>는 이 세 가지 의미를 정교하게 엮어내며, 하나의 총구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어떻게 사회 전체의 파국으로 확장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이도와 문백: 구원과 파멸의 변증법
<트리거>의 서사는 이도(김남길)와 문백(김영광)이라는 두 인물의 위태로운 공조와 이념적 대립을 축으로 전개됩니다. 이들은 단순한 선과 악의 대립 구도를 뛰어넘어 붕괴하는 세계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철학적 응전을 상징하죠. 한 명은 폭력을 억제하여 질서를 지키려 하고, 다른 한 명은 폭력을 해방해 기존 질서를 파괴하려 합니다. 이들의 관계는 구원과 파멸 사이의 긴장감 넘치는 변증법을 형성합니다.
주인공 이도는 과거 분쟁 지역에서 활동했던 스나이퍼 출신의 현직 경찰입니다. 이 이력은 그에게 총에 대한 트라우마와 함께 ‘총의 양면성’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통찰을 부여합니다. 그는 총을 다시 드는 것을 고뇌하며, 가능하면 “총을 내려놓고도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내면은 폭력의 도구로 평화를 지켜야 하는 근본적인 윤리적 딜레마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너져 가는 세상 속에서 비폭력의 신념을 지키려는 그의 사투는 이 시리즈의 도덕적 무게중심을 잡아줍니다.
배우 김남길은 이러한 이도의 복잡한 내면을 절제된 연기로 탁월하게 표현합니다. 그는 이도를 사건을 주도하는 영웅이 아닌, 총을 든 사람들의 사연을 따라가는 ‘관찰자’의 시점에서 연기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선택 덕분에 시청자는 그의 고통스러운 공감의 시선을 통해 사회 붕괴의 참상을 목도하게 됩니다. 폭발적인 외부 사건과 대조되는 그의 고요한 눈빛과 미세한 표정 변화는 총을 든 자의 무게와 내면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반면, 문백은 시리즈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입니다. 처음에는 이도를 돕는 ‘미스터리한 조력자’로 등장하지만, 점차 불법 총기 유통의 핵심 인물이자 모든 혼란을 설계한 장본인임이 드러납니다. 그의 캐릭터는 자유분방한 겉모습과 치밀하게 세운 계획이라는 내면의 이중성으로 정의됩니다. 그의 극단적인 행동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그를 시스템의 희생자에서 세상을 향한 복수자로 변모시키죠. 그는 억압받는 자들에게 폭력적인 복수의 수단을 쥐여주는 것이야말로 위선적인 시스템의 민낯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는 인물입니다. 심지어 그는 그들의 폭력이 실제 정의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며 이도의 신념을 뒤흔듭니다.
배우 김영광은 문백을 연기하며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선보였는데요. 로맨스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맑은 눈의 광인’이라 표현될 만한 섬뜩한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내향적인 성격의 그가 의도적으로 외향적인 인물을 연기함으로써 만들어 낸 부자연스러운 활기는 캐릭터의 정체가 드러나기 전부터 불길한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이도와 문백의 관계는 시리즈의 핵심입니다. 총에 대한 가치관과 상황 대응 방법이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의 공조는 시작부터 위태롭습니다. 이들의 대립은 결함 있는 질서를 수호하려는 개혁의 길과, 모든 것을 불태우고 새로 시작하려는 혁명의 길 사이의 철학적 충돌을 상징합니다.
두 주인공의 이름은 이러한 철학적 대립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권오승 감독에 따르면, ‘이도(二道)’는 과거의 살인자(스나이퍼)와 현재의 구원자(경찰)라는 ‘두 갈래 길’ 위에서 고뇌하는 그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문백(門百)’은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백 개의 문’을 의미하며, 이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그의 복잡한 심리와 트라우마로 가득한 내면을 암시합니다.
<트리거>는 에피소드 형식을 통해 ‘총을 받은 사람들’의 사연을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이들은 단순한 ‘빌런’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특정 단층을 드러내는 사회학적 원형에 가깝습니다. 작품은 이들의 서사를 통해 개인의 일탈이 실은 사회 구조적 병폐의 결과물임을 누적적으로 고발합니다.
이들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짓눌린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총을 드는 순간 돌변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당신이라면, 쏘겠습니까?”
각 인물들의 서사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정면으로 겨눕니다. 고시원 총기 난사의 범인 유정태는 무한 경쟁의 압박과 열악한 주거 환경에 내몰린 청년 세대의 절망을 대변합니다. 그의 분노는 거대한 사회적 부조리가 아닌, 일상의 사소한 무시와 소음에서 촉발된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의 공동체성 붕괴를 상징합니다.
산업재해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 오경숙의 이야기는 거대 기업과 국가 시스템 앞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고발합니다. 세상이 그녀의 1인 시위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총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리게 만드는 유일한 확성기가 됩니다. 배우 길해연이 총을 받는 순간을 ‘악몽’이자 ‘끔찍한 경험’이라고 표현한 것은, 평범한 시민이 폭력의 유혹에 내몰리는 심리적 공포를 생생하게 전달하죠.
조직폭력배 구정만은 총을 계층 상승의 ‘기회’로 여기는 인물입니다. 그의 서사는 폭력이 권력을 쟁취하는 수단으로 통용되는 지하세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왜곡된 ‘상승 욕구’가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성공 강박과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학교 폭력 피해자 박규진의 사례는 가장 비극적입니다. 보호받아야 할 학생이 보호 시스템의 실패로 인해 가해자로 전락하는 과정은, 문백의 사상처럼 폭력이 어떻게 또 다른 폭력을 낳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이처럼 <트리거>는 가해자들의 서사를 통해 의도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허뭅니다. 방아쇠를 당긴 모든 인물은 그 이전에 사회적 무관심, 불의, 폭력의 피해자였죠. 총은 괴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고통에 치명적인 목소리를 부여할 뿐입니다. 이는 시청자에게 단순한 선악 구도를 넘어 이들을 괴물로 만든 사회 구조 자체를 성찰하게 만드는 불편한 공감을 요구합니다. 권오승 감독이 “이 작품은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며 “누가 왜 그 총을 들어야 했는가”를 묻는 이야기라고 강조한 것은 이러한 연출 의도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방아쇠를 당긴 사람들’을 연기한 조연들이 훌륭합니다. 특히 고시원 총기 난사 사건의 피의자 유정태 역을 맡은 배우 우지현은 <트리거>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멈출 수 없도록 만드는 놀라운 연기를 선보입니다. 유정태가 “누가 내 멸치볶음 먹었냐?” 외치는 장면에서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집니다. 수십 명에게 총기를 난사한 그에게 묘한 동질감마저 느끼게 되죠.
또한, 성범죄자 전원성의 배우 이석, 조직폭력배 구정만의 배우 박훈, 학교 폭력 피해자 박규진과 서영동의 배우 박윤호와 손보승의 연기와 캐릭터 해석력은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현실의 방아쇠: 인천 총기 사건과 <트리거>의 시의성
<트리거>가 던지는 질문은 인천 송도에서 발생한 비극적 총기 사건을 통해 더욱 날카로운 현실성을 띱니다. 이 사건은 드라마가 설정한 가상의 재난이 더 이상 상상 속의 일이 아님을 증명하며, 작품의 시의성을 극명하게 부각시키죠. 허구와 현실은 몇 가지 중요한 지점에서 섬뜩할 정도로 유사한 궤적을 그립니다.
첫째, 폭력 수단의 변화입니다. 인천 사건의 가해자는 “유튜브에서 총기 제작법을 배웠다”고 진술했으며, 실제로 여러 정의 사제 총기와 폭발물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총기 청정국’이라는 신화가 온라인 정보의 확산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줍니다. 이제 총기 소지의 가장 큰 장벽은 국가의 물리적 통제가 아니라, 누구나 접근 가능한 기술적 지식이 되었습니다. <트리거>에서 총이 택배처럼 배달된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이지만, 폭력 수단에 대한 전통적 통제력이 무력화되고 있다는 현실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서사적 과장입니다.
둘째, 폭력 동기의 내밀성입니다. 인천 사건의 동기는 ‘가정불화’와 ‘배신감’으로 요약됩니다. 전문가들은 이 사건을 가해자가 전처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가 가장 아끼는 존재인 아들을 공격한 ‘대리 복수’의 성격으로 분석했습니다. 이는 <트리거> 속 인물들의 폭력이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묻지 마 범죄’가 아니라, 자신을 무시하고 고통스럽게 한 특정 대상을 향한 원한의 표출이라는 점과 일치합니다. 오경숙이 회사를 향하고, 유정태가 이웃을 향하는 것처럼, 그들의 분노는 명확한 주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 폭력의 사회적 배경입니다. 두 사건 모두 ‘분노 사회’라는 더 큰 맥락 안에 위치합니다. 극심한 경쟁,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신뢰 붕괴,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좌절감과 울분은 한국 사회의 고질병으로 지적되어 왔습니다. 실제 연구들은 한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과 폭력 범죄율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증명합니다.
<트리거>의 세계는 이러한 현실의 압력이 극단적으로 응축된 실험실과 같습니다. 사회적 분노라는 인화성 물질이 가득한 공간에 문백이 ‘총’이라는 불씨를 던진 것입니다.
더 나아가 <트리거>는 범죄를 재현하는 미디어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성찰까지 담고 있습니다. 많은 범죄물이 사건의 자극적인 ‘과정(how)’에 집중하며 공포를 상품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트리거>는 각 인물의 서사를 통해 폭력의 ‘이유(why)’를 끈질기게 파고듭니다. 이는 범죄를 사회적 맥락에서 분리하고 선정적으로 소비하는 미디어의 관행에 정면으로 맞서는 시도입니다. 작품은 스릴러 장르의 문법을 사용해 역설적으로 범죄를 더 깊고 구조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무를 역설합니다.
구원은 없는가, 희망은 가능한가
<트리거>의 결말은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는 대신, 의도적으로 불편하고 철학적인 질문을 남깁니다. 단순하고 통쾌한 해결을 거부함으로써 폭력의 연쇄를 끊어낼 수 있는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시리즈의 클라이맥스는 문백이 기획한 ‘총기 합법화 집회’에서 펼쳐집니다. 그는 총기로 가득 찬 트럭을 몰고 군중 속으로 돌진하며, 사회 질서의 완전한 붕괴라는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려 합니다. 혼돈의 한가운데서 이도는 마침내 문백을 조준경 안에 포착하지만, 끝내 총을 쏘지 않기로 합니다. 총의 전문가인 그가, 폭력이 가장 정당화될 수 있는 순간에 총의 사용을 거부하는 이 행위는 그의 캐릭터가 도달한 최종 결론이자 시리즈 전체의 주제를 응축한 상징적 행동입니다. 그는 폭력의 논리를 따르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로 합니다.
이도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던 문백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의 자살은 ‘폭력만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자신의 신념이 부정당한 세계를 견딜 수 없었던 한 니힐리스트의 철학적 패배 선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백의 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이 남아 그의 유지를 이으려 하고, 사회는 이미 총기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도는 여전히 경찰로 남아 험난한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이처럼 열린 결말은 해답을 제시하는 대신, 앞으로 이어질 길고 고통스러운 투쟁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결말은 최근 한국 드라마에서 유행하는 ‘사이다 서사’에 대한 명백한 거부입니다. 주인공이 악당을 통쾌하게 처단하는 대신, <트리거>는 진정한 승리가 당신이 싸우는 괴물과 같아지기를 거부하는 데 있음을 역설합니다. 결국 <트리거>의 결말은 서사적 만족감을 희생하는 대신 주제적 완결성을 택함으로써 시청자에게 정의의 진정한 대가에 대한 묵직하고 불편한 철학적 질문을 남깁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트리거>는 ‘총’이라는 강력하고 다층적인 상징을 통해 분노의 시대에 우리가 마주한 책임, 정의, 사회 계약에 대한 근본적인 인문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이 작품에서 총은 단순한 살상 도구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힘없는 자에게 목소리를 되찾아주는 권력의 상징이자(오경숙), 세상을 파괴하려는 허무주의의 도구이며(문백),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와 무거운 윤리적 책임을 의미하는 도덕적 족쇄(이도)입니다.
궁극적으로 작품 속 총기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방아쇠를 가지고 있다”는 이도의 말처럼, 고압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내면에 잠재된 분노의 은유로 기능합니다.
작품은 폭력의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습니다. 방아쇠를 당긴 개인인가, 아니면 그의 손에 총을 쥐여준 사회인가? 가해자들에게 연민의 여지가 있는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트리거>는 개인의 폭력이 종종 집단적 사회 질병의 징후일 수 있음을 시사하며 책임의 소재를 개인에게서 사회로 이동시킵니다.
법적 정의가 실패한 세계에서 인물들은 각자의 ‘정의’를 실현하려 하고, 이는 ‘정의 추구가 복수가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폭력은 정의를 위한 정당한 수단이 될 수 있는가?’와 같은 딜레마를 낳습니다. 이도의 마지막 선택을 통해 작품이 내놓는 대답은 더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비폭력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외침입니다.
결론적으로, <트리거>는 어둡고 비관적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사회 비평입니다. 이 작품은 불평등, 소외, 그리고 들끓는 분노라는 한국 사회의 가장 깊은 불안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권오승 감독이 던지는 “당신이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트리거’를 당길까?”라는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문명의 취약성과 분노 대신 공감을 선택해야 하는 지난한 과제에 대해 성찰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이 위험한 상상력이 도달한 가장 중요하고도 묵직한 성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