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는 깊은 삶의 통찰을 담은 철학적 우화이자 블랙 코미디 애니메이션입니다. 총 10편의 에피소드는 각기 독립적인 완결성과 깊이를 지녀, 마치 잘 쓴 단편 소설 연작을 읽는 듯한 감흥을 선사합니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이어지지만, 각 편마다 담긴 섬세한 의미의 결들은 우리를 잠시 멈춰 서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만들죠.
한동안 범람했던 ‘종말론’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이 작품은 흔하디흔한 ‘종말’이라는 소재를 더없이 차분한, 마치 블루지한 선율이 흐르는 그래픽 노블 같은 그림체로 풀어냅니다. 이 미니멀리즘적 접근은 단순히 스타일을 넘어, 화려함과 과잉의 시대에 본질에 집중하려는 태도를 반영하며, 여백의 미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사유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요함으로 맞서는 실존
행성 ‘케플러 C9’이 지구를 향해 돌진하고, 인류의 멸종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7개월입니다. 세상은 거대한 카니발처럼 변했습니다. 쾌락주의에 흠뻑 빠진 군중들 사이에서, 마흔둘의 캐럴은 홀로 섬처럼 존재합니다.
캐럴의 시계는 홀로 다른 박자로 째깍입니다. 창밖 하늘이 평소와 달리 섬뜩한 핏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목격하지만, 그녀는 늘 하던 대로 자신만의 루틴을 따릅니다. 지극히 사소하고 반복적인 감각들 속에서 그녀는 종말의 무게를 견디고, 아니, 살아가고 있습니다.
캐럴은 습관의 중독자이자, 늘 약간은 불편해 보이는, 조용한 여성입니다. 가끔, 아주 희미하게, 텅 빈 복도에 홀로 남겨진 그림자처럼 마음 한구석의 서늘한 공허함이 그녀를 스치기도 했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들고 다음 서류로 시선을 옮깁니다. 어쩌면 그녀의 과거 속 어떤 균열, 혹은 세상의 예측 불가능함에 대한 오랜 응시가 역설적으로 그녀를 이토록 변치 않는 일상의 견고함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억눌렸던 자유를 만끽하며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한 거친 꿈을 좇기로 합니다. 캐럴의 부모님마저 종말을 앞두고 때아닌 다자 연애를 선언하며 호화 크루즈 여행길에 오르죠. 해외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스카이다이빙 영상을 보내오는 동생 역시, 남들처럼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하려 하지 않는 캐럴을 걱정합니다. 하지만 캐럴은 세상이 끝장나는 그 순간을 붙잡고 요란을 떨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분노에 가까운, 그러나 더없이 단단한 인내심으로 자신의 일상을 고요히 살아갑니다. 이는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린 세상에 대한 그녀만의 소극적 저항을 넘어선 ‘형이상학적 반항’이자 ‘실존적 결단’으로 읽힙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캐럴은 혼돈 속에서 ‘늘 하던 것을 할 자유’를 선택함으로써 자신만의 질서를 구축하고, 무의미에 맞서 의미를 창조하려는 인간 본연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직시할 때 오히려 진정한 실존을 회복할 수 있듯, 캐럴은 종말이라는 극단적 유한성 앞에서 ‘지금, 여기’의 가치를 더욱 단단하게 붙잡습니다.
그녀는 화폐의 가치가 무의미해진 상황에서 매달 날짜를 맞춰 어떻게 해서든 신용카드 대금을 결제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이런 행위는 무너져 가는 세계 앞에서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한 마지막 실존적 의식입니다. 마치 부서진 배의 마지막 조각배 위에서 노를 젓는 선원처럼, 그녀는 필사적으로 삶의 의미를 부여잡고 있습니다.
물론, 일상이라는 것은 때로 우리를 질식시키는 권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무한히 반복될 것 같은 지루함 속에서 우리는 종종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기도 하죠.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케플러 C9’이라는 절대적 종말은 캐럴에게 그 지루함마저도 붙잡고 싶은 소중한 것이 될 수 있음을, 그 단조로움 속에 숨겨진 삶의 경건함을 일깨워 줍니다.
알베르 카뮈가 시시포스의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인간 존엄의 가능성을 보았듯, 캐럴에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단조로움은 그 자체로 의미이자,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견고한 리듬입니다. 카뮈에게 반항하는 인간은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것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존재이며, 캐럴의 묵묵한 일상이야말로 종말이라는 거대한 부조리에 맞선 가장 적극적인 ‘아니오’일 것입니다.
그녀는 절망 대신 의미를, 포기 대신 지속을 선택함으로써 반항합니다. 이 지극한 평온은 스토아학파가 갈망했던 ‘아파테이아(apatheia)’, 외부 세계의 광풍에도 꺼지지 않는 내면의 등불 같은 평정심과 맞닿아 있으며, 혼돈의 한가운데서 자신을 지켜내는 ‘고요한 용기’, 그 자체입니다.
삶의 빈틈을 메우는 소중한 일상
두 차례 에미상을 수상한 작가 댄 거터먼은 이 작품을 ‘일상에 관한 러브레터’라고 소개했습니다. 이 정의는 작품의 정수를 정확히 꿰뚫습니다. 캐럴은 전통적인 영웅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녀는 조용하고 때로는 불안해하며 수줍음이 많지만, 결코 무기력하지 않으며 세상을 냉소하지도 않습니다. 그녀가 일하는 사무실 ‘The Distraction’은 문자 그대로 종말로부터의 ‘주의 전환’을 위한 공간이자, 이미 가치가 사라진 돈을 다루는 회계 업무라는, 어찌 보면 가장 무의미해 보이는 노동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캐럴과 동료들은 이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적 업무와 공간 속에서 서로에게 미약하지만 필요한 존재가 되어갑니다.
완벽한 이해나 살가운 위로는 아닐지라도, 어색한 침묵 속에 간헐적으로 오가는 짧은 농담, 탕비실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나누는 멋쩍은 미소, 혹은 누군가의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사탕 하나처럼,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희미하게 감지하며 보이지 않는 연대를 쌓아갑니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존재의 무게를 나누어 가집니다.
그들의 연대는 때로는 너무나 희미하여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장 절실한 순간에 서로를 지탱하는 가느다란 실핏줄과도 같습니다. 이는 현대사회의 직장생활이 갖는 양면성, 즉 소외와 무의미함, 동시에 소속감과 관계 맺음의 장에 대한 깊은 은유로 읽힙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The Distraction’에서 무의미와 의미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캐럴은 일상의 노동에서 성스러움을 발견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쌓아가죠.
각각의 에피소드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슬프고, 달콤하면서도 초현실적이며, 깊은 멜랑콜리를 자아냅니다. 우리 인생에서 명확히 파악하거나 해석하기 어렵고, 적절히 배치하기도 힘든 그 모든 복잡다단한 감정과 상황들이 작품 속에 섬세하게 직조되어 있습니다.
작품 속 간간이 숨겨진 ‘이스터 에그’를 찾는 재미도 있습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자동차 번호판에 새겨진 ‘CL 2NE1’이라는 글자처럼 말이죠. 레딧(Reddit)의 한 사용자는 이를 ‘Carol (CL) to anyone (2NE1)’, 즉 주인공 캐럴이 타인과의 연결을 무의식적으로 갈망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재치 있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는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들이 느끼는 근원적인 외로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타인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인간 본연의 그리움에 대한 은유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캐럴이 K-팝 팬이었을 거라 짐작하기도 합니다. 공식적인 제작 의도를 떠나 이러한 사소한 발견과 해석의 즐거움이야말로 이 작품이 지닌 또 다른 매력입니다.
애니메이션의 절제된 색감과 때로는 정지된 듯한 화면 연출은 캐럴의 내면 풍경과 그녀가 느끼는 시간의 무게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합니다. 이 작품은 캐럴이라는 인물이 가진 설득의 힘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과 일상을 진지하게 반추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가장 평범한 사무 공간, 일상적인 대화들을 마치 처음 보는 풍경처럼 제시하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우리는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는 단조로움이 주는 역설적인 편안함에 관한 이야기이자, 삶의 빈틈을 메우는 소중한 일상적 의식들에 관한 더없이 근사한 실존주의 코미디입니다.
*씬스틸러: 도나의 자동차 번호판은 CL - 2NE1 이다.
엔딩보다 찬란한 순간, 지금을 살다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는 우리가 이제껏 보아온 그 어떤 종말 이야기보다 덜 호들갑스럽습니다. 이 세계에서 종말은 일상의 한 조각이 됩니다. 대신 카메라는 종말과 ‘엔딩’ 그 자체보다, 그 마지막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 시작되는 감정들, 그리고 지속되고 반복되는 일상의 힘에 고요히 집중합니다.
이 시리즈를 보면서 제가 잡지사 기자로 일할 때 만난 박웅현 선생님과의 인터뷰가 떠올랐어요.
“행복은 ‘찬란한 순간의 합’이지, 절대 목표점이 아니에요. ‘점’이 아닌, ‘합’이란 말이에요. 인생을 산다는 건 ‘비어있는 목걸이 줄에 찬란한 순간의 진주를 몇 개를 꼽고 죽느냐’예요. 명문대에 가기 위해 명문고를 가려 노력하죠, 대학 합격하고 이틀 정도 파티해요. 또 삼성에 가려고 스펙 관리 시작해요. 그러다 삼성에 들어가면 또 이틀 정도 파티해요. 그리고 부장이 되기 위해 노력하죠. 인생을 레이스라 생각하지 말아요. 이처럼 불행한 게 어디 있겠어요? 목표점만 바라보고 가다 보니, 찬란한 순간을 놓치는 거죠. 그렇게 올라간 목표점에서는 ‘이게 무슨 행복이야’ 하는 생각이 드는 거고요. 지금 빛나고 있는 저 햇살, 어제 우리 딸애와 나눠 먹은 사케 한잔, 이런 순간들이 모여 행복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해요.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존감이에요. 자존하는 사람은 중심을 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바깥을 봐요. 안을 보는 사람은 사색을 하지만, 바깥을 보는 사람은 눈치를 보죠. 스펙 관리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가?’보다 ‘남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죠.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아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자존이에요.”
캐럴은 마치 이 말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듯합니다. 종말이라는 유한한 시간 앞에서, 그녀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과거에 대한 후회보다는 ‘지금, 여기’의 일상, 그 순간순간의 작은 일들에 집중하며 ‘찰나의 영원성’을 살아냅니다.
그녀는 종말을 앞두고 거창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대신, ‘The Distraction’에서의 소소한 성취, 동료와의 예상치 못한 교감, 혼자만의 시간에 느끼는 평온함 같은 ‘찬란한 순간’들로 자신의 마지막 날들을 채워갑니다. 이는 ‘자존하는 사람은 중심을 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바깥을 본다’는 박웅현 선생의 말처럼, 외부의 평가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건강한 자존감의 발로이며, 현대인들이 타인의 인정에 대한 갈망 속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가치입니다. 캐럴의 이러한 태도는 만연한 쾌락주의나 소비주의적 가치관에 대한 무언의 비판이자, 대안적 삶의 방식을 조용히 제시합니다.
혹여 삶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은 듯한 불안감에 휩싸인다면, 캐럴을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복잡하고 불완전하며 때로는 엉망진창으로 보이는 우리네 삶을 끌어안고, 그 안에서 기쁨과 감사를 발견하며 축복하는 방법이 실은 그리 복잡하거나 불안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진실을, 캐럴은 그녀만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속삭여 줍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이 사이보그가 되어 화성에서의 영생을 꿈꾸는 시대에, 어쩌면 우리는 캐럴처럼 더욱더 ‘인문학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질문에도 즉각 정교한 답을 내놓는 AI의 시대, 세상은 마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설계된 기계의 효율성을 숭배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캐럴이 보여준 ‘비효율적’이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삶의 방식은, 마치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손으로 빚어낸, 투박하지만 그 자체로 고유한 온기를 지닌 질그릇과 같습니다. 기계는 정해진 답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제공하지만, 그 질그릇에는 빚는 이의 숨결과 삶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듯, 캐럴의 삶은 우리에게 더욱 근원적이고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캐럴은 정답 없는 종말 앞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질문하고, 또 답을 찾아갑니다. AI가 제시하는 명쾌한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어쩌면 영원히 답을 찾지 못할지라도 그 물음 자체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인간 고유의 영역, 즉 스스로 의미를 직조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본질적인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는 능력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합니다.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는 바로 이 질문, ‘나는 무엇으로 나의 시간을 채우고, 어떤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설 것인가’라는 물음을 우리 각자의 마음에 날카롭게, 그러나 한 줄기 희망의 빛처럼 따스하게 새겨놓습니다.
속도와 성과만이 미덕이 된 이 시대의 보이지 않는 종말 앞에서, 캐럴의 ‘멈춤’과 ‘일상 지키기’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저항이자, 가장 절실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종말’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매 순간 우리 곁에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며,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캐럴의 선택은, 그 끝없는 물음에 대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단단한 하나의 응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