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3분,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을 가진 군 통수권자이자 현직 대통령 윤석열이 기습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후, 해외에서 수많은 친구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태국의 작고 외딴섬에서 수년간 다이빙 강사로 일하면서 나는 전 세계에서 태국으로 여행 온 수없이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 45년 만의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뉴스를 각국 외신과 SNS를 통해 접한 친구들이 가장 먼저 걱정한 것은 나의 안전이었다.
“괜찮아? 너, 지금 안전한 거지?”
내가 태국에서 만난 친구들, 그중에서도 태국과 미얀마, 홍콩, 튀르키예 친구들이 가장 격하게 반응했다. 모두 자국의 비상계엄과 군사 쿠데타를 최근에 겪은 나라의 국민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은 태국, 미얀마, 홍콩, 튀르키예와 같은 반열에 선 나라가 되었다.
나는 나의 민주주의가 너무 당연했다
내가 태국 땅을 처음 밟은 건 2014년이었다. 당시 태국은 수년간 이어진 반정부-친정부 세력의 대립으로 극심한 정치적 분열을 앓고 있었다. 극과 극으로 나뉜 지지자들의 맞대응 시위로 양측의 물리적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군은 이를 빌미로 2014년 5월,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쁘라윳 짠오차는 국가의 위기 사태를 해결하고 국민의 안전과 사회 질서를 지키겠다고 했지만, 비상계엄 선포 이틀 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이는 1932년 태국이 입헌군주제로 전환한 이후 19번째 군사 쿠데타였다. 21세기 들어서도 두 차례나 발생했다.
ⓒ 조하나
인천발 방콕행 비행기는 텅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계엄령이 선포된 나라로 관광이나 여행을 가려하지 않았다. 나는 어차피 방콕에 내리자마자 멀리 떨어진 남동부 섬으로 바로 이동할 예정이라 불안한 마음에도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아직도 방콕 시내 곳곳을 지키던 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도시의 분위기는 침울했고, 무기력감에 휩싸였다. 군인들은 방콕에서 기차를 타려던 사람들을 여기저기 불러 세워 신분증을 검사하고 가방 안을 헤집었다. 쿠데타에 저항하는 민주 세력을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군은 막강한 권능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모든 공공 집회를 금지했으며 영장 없는 체포를 통해 주요 정치인들을 감금했다. 비상계엄은 다음 해인 2015년에 종료되었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육군 참모총장 쁘라윳 짠오차가 태국의 총리가 되어 2017년엔 아예 헌법을 개정했고, 입법부와 사법부가 군부 정권의 막강한 권능에 휘둘렸다. 쁘라윳 총리는 왕실의 지지와 군부 세력을 등에 업고 2023년까지 9년이나 집권했다.
나의 9년간의 태국 생활은 쿠데타를 일으킨 프라윳 군부독재의 집권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한동안 군부의 통제와 억압, 불법체포를 피해 도시에서 휴학하고 외딴섬에 들어온 태국 대학생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계엄령 선포와 군부 쿠데타로 줄었던 외국인 관광객은 나중에 더 늘어났다. 태국 바트화 가치가 바닥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군부 정권은 언론을 통제해 늘어난 외국인 관광객의 숫자를 태국의 경제 성장으로 둔갑해 선전했다. 하지만 내가 태국에서 살며 직접 본 서민들의 삶은 해가 갈수록 더 피폐해졌다. 도심에서 떨어진 작은 시골 섬에서 외국인으로 살았기에 태국의 군사독재가 내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진 않았지만, 취업비자를 갱신할 때나 관공서 일을 보기 위해 현지 공무원을 상대할 때면 무능하고 부패한 군부독재의 폐해를 절절히 체감할 수 있었다.
섬에서 만난 태국 친구들은 이따금 나에게 군사독재에 맞선 한국의 80년대 민주화 항쟁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혁명에 관해 묻곤 했다.
“80년대 시민들의 희생과 용기가 우리 세대에까지 DNA로 이어진 것 같아.”
그때 나는 책에나 나올 법한 기계적인 답을 했다.
“우리는 시민의 힘으로 세상을 바꾼 적이 없어. 민주화에 성공하더라도 이내 왕실과 결탁한 군부가 쿠데타로 다시 모든 걸 뒤엎었지. 우리에겐 실패의 경험이 더 많아.”
태국의 젊은 친구들은 ‘입헌군주제’라는 가면을 쓴 ‘전제군주제’와 부패한 정부, 시민 자유에 대한 억압 등에 대한 분명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학습한 무기력감에 짓눌려 체념하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그때 나는 오만하고 어리석었다. 이 넓고 아름다운 땅에, 아름다운 사람들로 가득한 땅에, ‘자유의 땅’을 의미하는 ‘타일랜드’라는 이름처럼 시민들이 깨어난다면 이 나라가 얼마나 더 빛나게 될까, 안타까워했다. 더 솔직해지자면, 21세기에 여전히 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이상한 나라에서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에 군대를 보낼 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나는 오만했고 어리석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 홍대 거리에 나가 ‘가만히 있으라’라는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에 참여하고,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 때는 태국 바닷속에 들어갈 때마다 수중 칠판에 ‘PARK OUT’이라 쓰고 다녔던 나에게 민주주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마치 공기와도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 거저 주어진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자유와 시민주권에 대한 신념과 사고방식이, 건방지게도 나는 태국 친구들에게도 당연한 거라고 기대했다. 21세기 글로벌시대에 누구보다 영미권, 유럽의 선진국에서 오는 수많은 여행자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노출되어 온 태국 친구들은 낡은 군주제를 비판할 수 없는, 시민의 권력으로 무언가를 요구할 수 없는 억압된 현실과의 괴리감에 더 괴로워하고 있었다. 오만하고 어리석었던 나는 태국 친구들의 무력감과 막막함을 세심하게 헤아리지 못했다.
날개만 있고 발은 없는 새
홍콩에서 온 블러썸이란 친구가 내가 일하던 다이빙 센터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해양생태학에 관심이 많은 재능 많고 똑똑한 친구였다. 평소 한국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 나에게 ‘언니’ 같은 한국어 단어를 써가며 살갑게 굴었다.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다이브마스터 과정을 마친 그녀가 홍콩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된 2019년 6월, 홍콩의 반정부 인사를 중국에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 반대 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이 시위는 21세기에 일어난 반정부 민주화 시위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시위로 기록됐다. 경찰의 강경 진압과 코로나 사태에 민주화 세력 분열까지 더해져 시위는 차츰 동력을 잃어버렸고, 결국 홍콩은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사실상 홍콩의 일국양제가 붕괴하고, 중국 공산당에 강제적으로 예속된 것이다.
홍콩 민주화 시위 ⓒ Thadde Comar
홍콩의 민주화 시위로 15명이 사망했고, 2,6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0,279명의 민주화 인사들이 체포되고 3,000명이 형사 고발당했다. 이후 중국은 더욱더 노골적으로 민주화 인사를 탄압했고, 홍콩 시민의 언론·집회·결사·표현의 자유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나는 태국에서 홍콩의 민주화 시위를 지켜보며 계속해서 블러썸의 안부를 물었고, 그녀는 어떤 날은 괜찮다가, 또 어떤 날은 친구나 지인이 경찰에 잡혀갔다는 소식에 절망했다가, 결국 가족과 함께 홍콩을 떠나 영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홍콩 민주화 시위 이후 중국의 홍콩 통제가 가속화되면서 홍콩은 매년 인구가 현저하게 줄고 있다. 지난 3년간 홍콩을 떠난 시민은 총 18만 3,700명에 이른다. 전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홍콩인들을 두고 한 외신은 ‘날개만 있고 발 없는 새’라고 표현했다.
홍콩 민주화 시위 ⓒ Thadde Comar
블러썸이 홍콩을 떠나 영국으로 이민을 간 해인 2020년, 태국의 군주제 폐지와 군부독재,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는 태국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섰다.
내가 그때 가장 치욕스럽고 부끄러웠던 건 당시 시위 진압을 위해 쓰인 살수차가 바로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한국이 수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한국에선 2015년 살수차 진압으로 백남기 농민이 사망한 이후 사용하지 않는 장비였다. 태국 정부는 철망과 방탄유리를 갖춘 살수차를 이용해 최루액과 페인트를 섞은 보라색, 빨간색, 파란색 물을 시위대에 분사했다. 대한민국 시민이 민주화를 위해 저항했던 장면의 이면에 정부가 그 치안 물자를 수출해 다른 나라의 독재와 폭정을 돕는 끔찍한 모순과 폭력의 악순환이 있다는 것을 목격하며 나는 치를 떨었다.
태국 민주화 시위 진압에 쓰인 한국에서 수입된 살수차
태국의 작고 외딴섬에는 미얀마에서 돈을 벌러 온 젊은 친구들이 많았다. 내가 자주 가던 한식당에서 일하던 씬과 뮤는 늘 K-팝을 틀어놓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내가 밥을 먹으러 가면 늘 옆에 앉아 ‘언니, 언니’ 하며 자기가 공부한 한국어를 나에게 자랑했고, 돈을 많이 벌어 언젠가 한국에 가서 한겨울에 내리는 눈을 맞아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언젠가 나도 미얀마에 꼭 가보고 싶다고, 아웅 산 수 치 여사를 만나는 게 꿈이라고 답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2021년 2월 1일, 뉴스를 본 나는 서둘러 한식당으로 향했다. 씬과 뮤는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오열하며 나에게 안겼다.
“언니, 우리 어떻게 해… 어떻게 해….”
미얀마에 있는 가족과 친구가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비무장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한 미얀마 쿠데타 군부
위헌이 명백한 불법 군사 쿠데타였다. 군부는 총선에서 민주 진영이 압승하자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대통령을 감금하고, 의회와 정부를 강제로 해산했다. 아웅 산 수 치 여사를 체포하는 순간, 군부는 부정선거의 예시로 트럼프와 2020 미국 대선을 언급했다고 한다. 2015년 총선 승리로 53년 만에 군부독재를 끝내고 맞이한 민주 정부였다. 그리고 겨우 5년 만에 미얀마는 다시 군부독재 체제로 돌아간 것이다.
미얀마는 1년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며 미얀마 주요 도시로 향하는 도로를 모두 차단하고, 전 공항을 폐쇄했으며, 미얀마 전 은행의 운영을 중단했다. 또한 미얀마 전역의 인터넷과 주요 통신 네트워크, 인터넷 서비스,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소셜 미디어, 모바일 데이터, 일부 와이파이 네트워크까지 차단했다. 국제사회에 미얀마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시민들이 VPN을 사용해 우회로를 찾으려 하자 군부는 이마저도 차단했다. 결국 시민들은 포스터나 전단지, 구두 소문 같은 전통적 방법을 활용해 시위 정보를 공유했다.
거리로 쏟아져 나와 냄비를 두드리고 군인들에게 물을 담은 비닐봉지와 플라스틱 물통을 던지며 평화적으로 저항하는 비무장 시민들에게 군경은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3개월간 800여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학교, 은행, 병원 등 모든 공공기관은 폐쇄됐고, 시위 중 총상을 입은 시민들은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길 위에서 죽어갔다. 그중 씬과 뮤의 오빠나 동생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지만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반복되는 야만의 풍경
군부의 잔혹한 유혈진압 속에서 미얀마 시민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2021년 미얀마 군부가 시민들에게 저지른 만행이 1980년 광주의 5.18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검지, 중지, 약지를 편 오른손을 하늘 높이 치켜드는 형태의 세 손가락 경례는 민주주의의 입법‧사법‧행정 삼권분립을 의미한다. 영화 <헝거게임>에서 시민들이 에버딘과 멜라크를 향해 이 경례를 하며 캐피톨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태국, 미얀마, 홍콩의 민주화 세력의 '밀크티 동맹'을 상징하는, 삼권분립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세 손가락 경례
아웅 산 수 치 정권에서 임명한 UN 주재 미얀마 대사였던 초 모 툰은 UN 총회에서 군부 쿠데타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한 뒤, 이 세 손가락 경례를 보여줬다. 이는 미얀마 군부에 대한 분명한 불복종 의사와 국제사회에 대한 간절한 호소였다.
미얀마 군부의 잔인한 폭력에 저항하는 시민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촉구하는 미얀마 대사
내가 태국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씬과 뮤가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쩌면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며 슬프게 웃었다.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위헌적인 군사 쿠데타가 발발한 지 거의 4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미얀마의 시민군은 군부에 대항하며 세계의 무관심 속에서 여전히 내전 중이다.
12.3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면 우리에게 벌어졌을 일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사실상 국회가 존재하지 않으며, 홍콩은 극히 제한된 입법 기구가 있긴 하지만 2021년 중국 정부가 주도한 선거제도 개편 이후 직선제로 선출되는 의원 수는 20명으로 감소했다. 후보자들은 출마 전 후보자 심사위원회에서 중국 정부의 기준에 부합하는지 검증을 받아야 한다.
홍콩을 떠난 블러썸에게 이민을 결정한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자유가 억압되고 모든 것이 통제된 사회에 길들여진 인간이 될까 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전체주의 사회의 끝없이 깊고 무감각한 회색빛 사회의 무기력감과 우울함,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분위기, 그리고 곧 닥쳐올 길고 긴 가난 때문이라고 했다.
12.3 내란 발발 후 여전히 내란 수괴 윤석열이 체포되지 않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달러 환율은 1,460원이다. 대한민국의 원화 가치는 전쟁 중인 러시아 루블화보다 낮아졌다. 2016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튀르키예는 지금까지 달러 환율이 15배 넘게 올랐다.
나를 더 두렵게 만드는 건 현재 태국의 상황이다. 2020년 깨어난 태국 시민들의 대대적인 민주화운동 이후 2년 뒤 치러진 태국 총선에서 야권이 압승했다. 세상이 드디어 바뀌는 듯했다. 하지만 총선에서 승리한 당이 군부 세력과 손잡으면서 시민들이 염원하던 정권교체는 사실상 무산되었고, 여전히 의회와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군부 세력이 시민들이 요구하는 사회 개혁을 사사건건 가로막고 있다.
나는 잠시 미국에 사는 삼촌을 떠올렸다. 트럼프 정권의 미국에서 차별과 조롱을 견디며 소수 이민자로 사는 것이 더 나을까, 독재 정권이 득세하는 대한민국에서 통제당하고 억압받으며 사는 것이 더 나을까, 잠깐 고민했다.
“한국만은 버텨줬으면 좋겠어.”
2시간 반, 영화 한 편 정도의 시간 만에 윤석열의 쿠데타 시도가 끝났다. 태국과 미얀마, 홍콩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산산조각 나버렸다. 나라 경제와 대외 신뢰도는 하루아침에 박살 났고, 대한민국은 여행 경고 및 여행 주의 국가가 되었다.
“한국만은 버텨줬으면 좋겠어.”
21세기에 군사 쿠데타를 맨몸으로 겪은 태국과 미얀마, 홍콩, 튀르키예의 친구들이 말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대통령이 기분 따라 홧김에 비상계엄을 선포할 수 있는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나라로 전락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국가 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는 종잇장 같은 나라가 되었다. 이 모든 책임은 국민의 몫이 되었다. 산산조각 난 경제 지표와 대외 신뢰도는 경기침체에 독처럼 퍼져 앞으로도 오래도록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암묵적 불신, 혐오와 냉소, 조롱, 피해의식으로 가득한 현실이 되었다.
윤석열이 간과한 것은 젊은 군인도 지휘관도 국민이고, 또 다른 대한민국 국민인 누군가의 아들이자 손주이자 아빠라는 보편적 인간의 가치와 상식이었다. 윤석열 정권 이후 탄압받아온 언론사 기자들과 레거시 미디어에서 쫓겨나 대안언론으로 이직한 언론인들의 직접 윤리와 희생, 사명감 같은 것도 윤석열이 알 리가 없다. 윤석열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고 고민해 본 적 없는 종류의 삶의 가치와 신념이니까.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알기 위해 반드시 군인이 되어야 하고 부모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은 보편적 가치와 상식을 공유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고 배려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인간의 능력을 공감 능력이라고 말한다.
하루아침에 한 국가의 원수에서 내란 수괴가 된 윤석열은 언제나 그랬듯 사과 한마디 없이 버텼다. 보통 사람들의 가장 보통의 일상,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기에 그는 미안하지도 않고 사과의 필요성도 못 느낀다. 그저 그는 화가 나고 분할뿐이다. 심지어 계엄군이 군 통수권자인 자신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아 이번 계엄이 실패한 거라며 오히려 군이 항명하고 반란을 일으켰다며 격노하고 있다. 여전히 자신은 잘못한 게 없으며 나라와 국민을 위해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에 차 있다.
윤석열이 또 하나 간과한 것은 제주 4.3을 거쳐 5.18 민주화운동이 6.10 민주항쟁으로 이어지기까지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 속에서 시민이 오랫동안 조금씩 쌓인 시대적 가치와 믿음이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각인된 문화적 DNA다. 한국 사회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어떤 강도로든 국가 폭력과 계엄군, 독재에 대한 국민적 트라우마가 깊숙이 깔려있다. 윤석열은 공동체를 위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맨몸을 던지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도 공감도 하지 못한다. 대한민국 국민 5명 중 하나가 영화 <서울의 봄>을 봤고, <소년이 온다>를 쓴 한강이 한국인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해, 같은 DNA를 공유한 인간이라면 5.17 군사 반란을 그대로 재현한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 나라는 없다
태어난 이후 십 대와 이십 대를 모두 군부독재 아래 보낸 우리 아빠는 성인이 되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통행금지와 불시검문, 검열에 익숙했다. 서른이 되기 전까지 직접 선거를 해본 적도 없다. 민주주의를 경험한 적이 없으니 딱히 좋고 나쁠 것도 없었다. 만화를 그리는 걸 좋아했던 아빠가 군사독재 시절이 아닌 사상의 자유가 허락된 시절 십 대와 이십 대를 보냈다면 아빠의 소년 시절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아빠는 동시대에 살면서도 오랫동안 알지 못했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에 대한 마음의 빚이 많다고 했다. 몰래 머리를 장발로 기르고 통금을 넘겨 술을 마시러 다니며 독재 정권 시절을 큰 탈 없이 보낸 아빠는 그저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멀쩡히 살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빠도 그 시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언제든 군부독재의 국가 폭력에 희생될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속에서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사회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가장으로서 그저 묵묵히,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오랜 군사독재 시절을 버텨내며 어느덧 모두에게 자연스러워진 국가 권력의 통제와 억압에 맞서,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이름도 없이 스러진 수많은 이들의 피로 쓰인 <대한민국 헌법>을 12월 3일 밤 이후 지금까지 새우잠을 자다 깨다 하며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 내려간다.
나는 수많은 무명씨들의 피로 쓰인 헌법 덕에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서 사상 검열과 통금 없이 대학에 다녔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완벽한 이상이 아니란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나의 대통령’ 노무현이 기득권의 조롱과 따돌림, 괴롭힘을 당하는 걸 끊임없이 지켜봐야 했고, 결국 그를 앞서 보내야 했다. 내란 수괴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두환이 겨우 몇 개월 후 사면받아 국민을 향해 호통치며 골프를 치고 다니는걸, 그저 가슴만 내리치며 지켜만 봐야 했다. 그때 어른들은 정치란 그런 거라고 했다. ‘가만히 있으라’라는 어른들의 말을 들은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을, 발을 동동 구르며 실시간으로 지켜봤고, 촛불을 들어 박근혜를 탄핵했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 이명박과 박근혜가 사면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2024년 12월, 45년 만에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를 들었다.
나는 민주주의를 너무 당연하게, 오만하고 어리석게 대했다. 야만적이고 비상식적인 헌법 유린과 군사 쿠데타는 대한민국 민주사회에 절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라 자신했다. 태국, 미얀마, 홍콩의 민주화 시위에서 대한민국의 민중가요가 울려 퍼질 때 나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우쭐하고 자랑스러워할 줄만 알았지, 그냥 언제나 거기 있을 줄만 알았지, 하루아침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이제 내 차례다. 광주 민주화운동 후에 태어난 나는 비록 광주를 지키지 못했지만 ‘광주 정신’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이 깃들 건강한 육체, 살과 피를 만들 것이다.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몰라 꿈조차 꾸지 못했던 아빠의 시대가 대신 희생한 선물 갚은 시간을 살며, 다음 세대로 굳건히 전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윤석열 따위가 감히 무너뜨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래도 되는 나라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