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뽑아주는 여자.

by 하나

선명한 잔상이 하나 있다.


너와 나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는 네게 나의 무릎을 내어주고 너는 그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 나의 무릎에 맞닿은 너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는 나의 뒷모습 너머로 햇빛이 한가득이다. 언제든지 맘만 먹으면 꺼낼 수 있는 그 날의 한 장면이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우리 둘의 표정을 상상해보고는 한다. 나는 한 껏 너의 흰머리 뽑기에 집중해 있었을 테고 너는 햇볕 아래 고양이처럼 나른함을 만끽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너의 흰머리를 뽑아 주던 가장 멀리 있는 기억이다. 이 날이 너의 새치를 뽑아준 첫날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저 너의 흰머리카락을 뽑아줄 때마다 네가 입대하기 며칠 전 학교 동방(동아리 방)에서 서로에게 집중하던 그 선명한 잔상이 떠오른다. 얼굴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추억 속에서 우리는 오직 둘이서만 가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하염없이 행복했다. 그리고 곧 긴 시간을 떨어져 지내야 하는 안타깝고 슬픈 현실을 받아들이느라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런 감정의 떨림들이 남아있다.


"이리 와서 누워. 흰머리 뽑아줄게. 뽑은 지 한참 됐지?"

잔뜩 예민해져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앉아 있는 너에게 특효약을 건넨다. 족집게와 거무튀튀한 종이 한 장을 준비해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내 무릎을 베개 삼아 몸을 동그랗게 말아 누운 네가 참 작고 여려 보인다. 그리고 또다시 그 날의 기분 좋은 떨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보, 예전에는 자기 머리카락이 너무 거칠어서 뽑고 나서 손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는데.......

자기도 이제 머리카락에 힘이 많이 없어졌다. 그 날 기억나지? 동방에서, 그 날 자기 머리카락 손으로 뽑아 주고 며칠을 손끝이 얼마나 아팠다고......."


"그랬었나? 그래, 내 머리카락이 좀 억세긴 했지......."


"자기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았구나, 오마야~~ 여기도, 저기도 장난 아니네......"


이쯤 거들어주면 주저리주저리 네가 힘들었던 일들을 풀어내기 시작한다. 네가 빗장 풀려 수다 삼매경에 빠지면 조용히, 부지런히 흰 머리카락을 뽑는데 열중한다. 한 동안 그러다 보면 동방에서의 그 날처럼 너의 목소리에 힘이 빠지고, 몸도 이완되어 슬금슬금 잠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언제인지도 까마득한 그 날의 너는 잠이 몰려오면 내 허리춤을 꼭 끌어안고 자면 그만이었건만, 지금은 잠시 눈을 감고 있으면 고새를 못 참고 하나, 둘, 셋, 아빠에게로 파고드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으로 우리의 아니 나의 추억 여행은 끝이 난다. 그리고 너의 긴장 풀기도 끝이 난다.


요즘 나도 흰 머리카락이 하나, 둘 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는 역할을 바꾸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행위에 그쳤다. 반대의 역할은 우리 둘에게 전혀 의식이 되지 못했다. 이 의식은 오로지 '나로부터 너에게로'의 방향으로만 발현된다.




여보, 내가 평생 자기의 흰머리를 뽑아주겠어.

그런데 온통 흰머리가 되면, 그때는 어쩌지?



글을 쓰다 보니 언젠가는 네 머리카락이 온통 하얗게 뒤덮여 더 이상 흰 머리카락을 골라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온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우리 만의 이 비밀 의식을 그만두어야 하는 세월이 오겠구나. 그때쯤이면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두 손 잡고 지금의 이 날들을 함께 추억하며, 서로에게 더 이상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선선한 삶이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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