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부터 쓰던 연필깎이가 있다.
연노란색 몸통에 이상한 표정이 그려진 것이다.
조금 낡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직 멀쩡한 편인데
안쪽 칼날 부분이 고장 난 건지
가끔은 연필을 넣는 족족 부러뜨리기만 하고
제대로 깎질 못한다.
요즘 내가 이 연필깎이 같다.
겉모습이 완벽한 것은 아니어도 정상인 듯 보이고
실직을 한 것도 아니며, 소중한 사람들도 내 곁에 있다.
그러나 오로지 나만 알 수 있는 균열이 있어서
어떨 땐 뭘 해도 내가 망가졌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된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너무 말랐다는 생각이 들었고
최근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을 떠올려보니
미각을 제대로 사용한 지 너무 오래됐다는 걸 깨달았다.
나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했다.
나는 내가 아직도 너무나 어리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 나를 챙겨주는 것이 당연할 만큼은 어리지 않으며
떼쓸 수 있는 나이도 지났다는 사실이 선명해질 때면
설레면서도 무섭고, 무서우면서도 아프다.
나는 어린아이의 '나'와 이별하는 중인 것이다.
이럴 땐 아주 사소하고 당연한 일이 소중해진다.
평소에 늘 하던 일을 조금 더 집중해서 하게 되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살아있다는 느낌은 내가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주도권과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에서 오며
이러한 확신은 내게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샤워를 하면서
물이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에 집중하는 것.
빗에 달린 플라스틱 돌기에 감각을 쏟아붓고
머리카락을 천천히 오래 빗는 것.
아침에 창문을 열어놓고 천천히 호흡하면서
가슴속이 서늘한 공기로 가득 차는 느낌을 의식하는 것.
길을 걸을 때 머리칼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느낌과
코 끝이 추위로 얼얼해지는 감촉에 집중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생명력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 허락된
단순하고 아름답고 거짓 없는 감각이며
다른 강렬한 자극에 가려져 무미건조하게 여겨질 뿐,
내 마음이 보내는 다양한 신호들을
동물적 감각을 통해 체감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방법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느끼길 선택할 수 있고
이러한 선택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충분한 통제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 자신이 망가졌다고 느낄 때마다
늘 하던 집안일과 몸가짐을 더욱 세심하게 하고
산책을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늘 내 편이 되어주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내 얼굴 점점 썩어가는 것 같다'고 물었다.
사실 친구에게 물은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알려준 거다.
친구는 '넌 지금도 예쁘고, 늘 예뻤다'고
아무런 걱정 하지 말라고 했다.
친구는 내 외관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예쁘다고 말해준 것이라기보다
내 생김새가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내가 여전히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내가 세계 최고 추녀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들
어김없이 나와 친구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자기도 요즘 힘들어서 얼굴이 썩어가는 주제에
남의 얼굴 곱다고 해주는 게
나는 왜 그렇게 고맙고 아팠을까.
어제 내가 무얼 먹었는지는 잊어버리더라도
망가진 연필깎이든 망가진 손톱깎이든 간에
내가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나에겐 나를 치유할 것과 일상을 회복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꿈결에도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렇게 조금씩 살아내다가 어느 날은
나에게 온 마음을 다해서
'넌 지금도 예쁘고, 늘 예뻤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