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한 장면들의 묘사가 나온다. 이게 정말 성경책이 맞나 싶을 정도이다.
일례로 북이스라엘의 왕인 ‘므나헴’은 전쟁할 때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그곳을 치고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랐다는 기록이 있다. (열왕기하 15장 16절)
이러한 잔인한 죄조차 성경은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간단히 평가해 버리고 만다.
상식적으로도 어떻게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가른 잔인한 죄와.. 그저 제사 제도 조금 바꾼 죄가 동일하게 비교될 수 있을까 싶지만 성경은 여지없이 단호하게 ‘여로보암의 죄’를 최고의 죄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런 상식 밖의 단호함 속에는 언제나 무언가 깊은 울림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늘 눈앞에 일어난 사건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금 눈 앞에 일어난 사건은 그 사건의 본질이 아닌, 그저 본질의 한 측면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 당장 눈 앞에 일어난 일은 병으로 치면 ‘증상’에 불과할 때가 많다. 배가 아픈 증상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그저 단순한 소화불량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생명이 위독한 심각한 질병일 수도 있다. 만일 의사가 오로지 증상에만 주목하여 처방한다면 그는 십중팔구 돌팔이 의사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증상을 있게 한 ‘원인’을 찾아 처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의 죄는.. 말하자면 모든 증상의 원인과도 같은 죄이다. 북이스라엘의 모든 타락상의 원인을 추적해 올라가다 보면 거기에는 항상 ‘여로보암의 죄’가 있었다는 말이다.
신앙이란 단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절대자’와의 만남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 ‘절대자’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물론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복의 근원이다. 제사하는 이유도 그분께 복을 받기 위함이요 또한 그분께 죄를 용서받기 위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복을 주시는’ 분으로 알고 섬기는 것과 그저 복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기복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분명 다르다.
하나님을 나의 행위에 자동적으로 응답을 해주시는 분 정도로 여기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물 건너간 신앙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하나님과 커피 머신과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일까?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성전을 찾고 거기서 제사하는 신앙적 행위를 너무나 단순한 기복 신앙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인격적인 ‘부모님’ 수준에서 거의 ‘자판기’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여로보암의 죄’의 실체인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절대자에 대한 관념이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행동은 사실 내재되어 있는 자신의 가치관이 밖으로 ‘드러난 표현’에 불과할 뿐이다.
여로보암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심겨있던 ‘인격적’인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점차 사라지고
대신에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복을 부어주는 ‘자판기’ 하나님이라는 편리한 관념이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편리한 개념은 점점 더 자라나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나의 만족’과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일이라도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게 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로보암의 죄'가 가지는 무서운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