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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맑음 Oct 24. 2021

행복한 아이들의 ‘겨울 왕국’

전원주택에 이사 와서 열 번의 겨울을 보냈다. 첫 해 겨울 아침 블라인드를 젖혀 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엄마! 아빠! 눈 왔어요!”


첫째와 둘째가 내복 위에 점퍼만 대충 걸치고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아파트였다면 그런 옷차림으로 나가지는 못했을 텐데 여기는 우리 집 앞마당이 아니던가. 나는 아이들 목에 목도리만 둘러주면 되었다. 아이들은 깔깔 웃으며 눈을 뿌리고 눈을 모아 담으며 하얀 눈 세상을 만끽했다.


모래놀이터 속 작은 장난감과 네대의 자전거 그리고 장난감 포클레인 위에 소복소복 내려앉은 눈을 보니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이곳 자연으로 잘 왔다고 첫해 내린 하얀 눈이 나를 포근히 안아주는 느낌이었다. 온 세상이 고요했다. 시끄러웠던 내 마음도 눈과 함께 내려앉았다.


외국의 어느 집처럼 우리 집 뒷마당에도 커다란 전나무를 심었다. 이 전나무에 반짝이줄을 빙빙 둘러가며 아이들과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했다. 그날 밤 밤새 폭설 수준의 눈보라가 몰아쳤는데 우리가 꾸민 오색줄도 하얗게 변해갔다. 매서운 겨울바람과 함께 휘몰아치는 눈발을 보면서 잠시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눈이 수북이 내려앉은 소나무가 버거워 보였다. 폭설 수준의 눈을 따뜻한 집안에서 바라볼 수 있어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우리는 잠이 들었다.


“세아, 현준아 1층 거실로 내려와 봐! 눈 내린 풍경 좀 봐봐! 장난 아니야!”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고 입이 쩍 벌어졌다. 언제 폭설이 내렸냐는 듯 세상은 고요했다. 무거운 침묵이 하얗게 내려앉아있었다. “히야! 히야!” 감탄과 탄성이 절 로터 져 나오는 풍경이었다. 어디 강원도 산골에 여행 와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현실감이 없었다. 이 아름다운 설경의 무대가 우리 집이라니.. 아파트에 살 때는 볼 수 없었던 ‘하얀 겨울 감성’이었다.


우리 옆집은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사실 집이라 1층 한옥으로 아담하게 지어졌다. 그 덕분에 아름다운 기와에 소담스럽게 내려앉은 하얀 풍경을 감상하는 특권을 누렸다. 단층이라 시야도 탁 트여 앞마당 설경도 무척 아름다웠다.


쌓인 눈을 그냥 구경할 우리가 아니었다. 온 가족이 힘을 모아 첫 번째 눈사람을 만들었다. 태준이가 태어나기 전이라 네 개가 아닌 세 개다. 집안에 있는 난로 속 검은 잿가루를 가져다가 눈 코를 그려주었다. 입과 모자는 모래놀이, 소꿉놀이 장난감을 이용해 꾸몄다. 드디어 우리 집 입구에 세 개의 커다란 눈사람이 세워졌다. 마치 우리 집을 지키는 수호 눈사람처럼 신랑이 출퇴근을 할 때 배웅과 마중을 해주었다. 온 가족이 집을 드나들 때마다 기쁘게 맞아 주었다.


또다시 내린 폭설로 눈사람이 더 뚱뚱해졌다. 초저녁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의 하얀 풍경은 신비로웠다. 우리 집은 눈의 나라 ‘겨울 왕국’이 되었다. 엘사의 얼음궁전이 부럽지 않은 겨울 풍경이었다. 겨울 숲 같은 뒷마당으로 걸어 들어가다 보면 마법 동굴이 연결이 되어 또 다른 얼음 세상으로 나를 데려갈 것만 같았다.


신랑이 눈썰매를 사 왔다. 아이들을 태우고 얼마나 빨리 내달리던지 쓩쓩 속도감에 사진이 모두 흔들렸다. 그날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나는 아이들이 튀어나갈까 봐 ‘여보 살살..”마음을 졸이며 바라봤었다. 아이들은 일단 눈밭을 보면 벌렁 드러누워 천사 날개를 만들었다. 내복이 젖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았다. 그 해 태어난 넷째 막둥이는 집안에서 누나 형아들이 노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봐야 했다. 어느 강원도 산골에 사는 아이들 같다. 2층에서 내려다본 앞마당 풍경은 동화나라처럼 사랑스럽다.


뒷마당에 펼쳐진 소나무 숲 설경을 감상하는 건 정말 백미였다. 한 폭의 수묵화가 그려진 병풍을 보는 것 같았다. 친한 지인들도 눈만 내리면 우리 집에 오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언제나처럼 기와에 내려앉은 눈은 사람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얀 눈 세상은 내 안에 시끄러운 검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화로운 하얀 마음을 불러내 주었다.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눈싸움 놀이를 하는 건 조금 힘든 일이었다. 첫째 세아는 긴 머리가 젖지 않도록 빨간 우산을 펼쳐 들고 동생들이 던지는 눈을 피하며 놀았다. 때마침 펼쳐 든 우산이 빨간색이라 하얀 눈 세상과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감상하는 내 마음도 함께 몽글거렸다. 참 예쁜 풍경이다. 짧은 여름 내복 차림이어도 좋았다. 신나게 놀고 들어와 따뜻한 난로에 몸을 녹이면 되고 젖은 옷은 빨아서 말리면 되니까.


집안에서 바라만 보면 넷째 태준이가 드디어 눈놀이에 합류했다. 하얀 눈밭을 총총 걸어 다니며 눈밭에 쓰러진  벌렁 누워있는 누나를 걱정스레 일으키고 고사리손으로 눈사람 만드는 것을 도왔다. 태준이 인생 첫눈 놀이였다. 작은 아이 눈앞에 펼쳐진 하얀  세상은 얼마나 방대하고 거대할까.. 아이들에게 하얀  세상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둘째 현준이는 사진 찍는 나를 향해 눈을 뭉쳐서 던졌다. “현준아, 엄마 사진 찍잖아 좀 봐줘!” 웃으며 애원하던 그날의 내 목소리가 웅웅 들려오는 것 같다.


완전체 네 아이들과 함께 뒷마당 전나무에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했다. 오색줄만 두르는 건 조금 심심한 것 같아서 풍선을 후후 불어 매달았다. 바람이 불면 풍선이 붕붕 떠올랐다. 전나무는 괴로웠겠지만 우리는 무척 즐거웠다. 풍선은 하얀 눈을 여러 번 맞으며 점점 바람이 빠져나갔다.


눈을 치우는 제설도구 ‘넉가래’ 아빠가 치우는 모습을 몇 번 본 둘째 현준이가 넷째 태준이에게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자기 몸보다 3배는 커 보이는 넉가래를 들고 있는 태준이 모습이 귀엽고 재밌었다. 셋째 경준이는 그새 아주 작은 미니 눈사람을 하나 만들었다. 사철나무를 이용해 눈코 입과 모자의 데코는 내가 도와주었다. 미니 눈사람이 참 사랑스럽다.


왼쪽/ 현준 —> 가운데/경준 —> 오른쪽/ 태준

10년간 저장된 겨울 풍경의 사진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둘째 현준이가 입었던 노란 점퍼를 셋째 경준이가 입고 있었고 다음 해 넷째 태준이가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모두 같은 아이인 줄 알뻔했다. 엄마인 나도 헷갈릴 정도였다. 이 사진을 보여줬더니 세아도 한참을 웃었다. 옷의 색상이 세월의 흐름을 잘 말해주고 있다. 처음에 오렌지빛이었던 점퍼는 노란색에서 다시 물 빠진 누런빛을 띠고 있다. 아들이 셋이라 알뜰하게 옷을 물려 입힐 수 있어 참 좋았다.


어느 정도 자란 아이들은 눈밭에 한번 나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알아서 척척 스키복으로 완전 무장을 하고 나왔다. 그래야 몸이 젖지 않아 따뜻하게 오래 놀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예외 없이 완전 무장을 하고 나와서 눈밭에서 함께 뒹굴었다. 엄마가 함께 놀아주는 것은 아이들끼리만 노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아이들은 엄마가 옆에서 자리만 지켜줘도 그저 행복해했다. 이날 찍어둔 우리의 셀카는 두고두고 꺼내 볼 때마다 마음이 뭉클하다.


또다시 형 옷을 입고 누운 셋째 경준이와 경준이 형의 옷을 물려 입고 서있는 넷째 태준이가 보인다. 키가 부쩍 큰 세아는 내 노란 점퍼를 걸쳐 입고 나가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지난날 가뿐했던 눈썰매에 네 명의 아이들이 올라타니 눈썰매 기차가 되었다. 묵직해진 아이들 몸무게에 힘겹지 않을까 살짝 걱정했는데 신랑과 아이들은 모두 함박웃음이다. 신랑은 썰매기차를 끌고 마당을 몇 바퀴 돌더니 대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 혹시나 했는데 눈도 없는 언덕 아래로 기어이 끌고 내려갔다. 속수무책으로 끌려내려 간 아이들은 숨을 헐떡 거리며 다시 뛰어 올라왔다. 알고 보니 겨울이라 운동이 부족하다 느낀 신랑이 아이들을 뛰게 하려고 생각해낸 지혜였다.


셋째와 넷째가 눈밭에서 까르르까르르 난리다. 초등학생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눈이 좋은 아이들이다. 애기 눈사람을 만드는 건 자동 수순이다. 우리 집 조명 위에 하얀 눈이 두껍게 내려앉은 모습은 이국적인 정취가 느껴졌다. 전나무는 하얀 떡 나무가 되었고 소나무 사이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은 겨울 풍경도 장관이었다.


‘엄마! 첫눈이에요!” ‘와! 눈이다!”


거실에 앉아있다가 내리는 눈발을 보고 내복 차림 그대로 뛰쳐나가 강아지처럼 방방 뛰어다니던 녀석들.. 햇살 같은 미소를 보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앗, 차거” “와! 신난다!”


아이들은 깔깔 웃으며 내리는 첫눈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이토록 눈에 진심인 아이들. 열 번의 겨울을 보내며 우리 가족은 자연이 주는 축복 같은 따뜻한 시간을 누렸다. 여기가 행복한 아이들의 진짜 “겨울 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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