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모두맑음 Jul 12. 2021

아이들 낮잠 재우고 집에서 영화 보던 날!

셋째 경준이 세살, 넷째 태준이 한살 때.

10년 전의 일이다.


세 살 경준이와  한 살 태준이를 겨우 겨우 낮잠 재운 뒤, 시원한 냉커피 한 모금 마시며 한숨을 돌릴 때였다.


“띵동! 띵동!”


인터폰을 보니 친언니였다. 맨발로 달려 나갔다. 친언니도 반가웠지만, 언니가 사들고 오는 샌드위치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더 반가웠다. 힘든 육아로 방전된 나에게 살과 피를 수혈해주는 고귀한 양식이 아닐 수 없었다.


“언니! 내가 맨발로 뛰쳐나온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 때문이야!”

이런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언니를 반갑게 맞았다. 아파트가 아닌 전원주택 그것도 어느 강원도 산골짜기 같은 인적 드문(그땐 그랬는데, 지금은 땅이 없다) 첩첩산중에 외로이 살고 있던 나에게는 친언니가 은인중 은인이요, 귀인중 귀인이었다.


“언니, 지난번에 온다고 했다가 못 온날, 나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나 그때 혹시 우울증인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니까? 진짜 잘 왔어. 어서 들어가자.”

언니 손을 잡고 아니, 커피와 샌드위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경준이 태준이는 뭐해?”

“으응, 지금 막 둘 다 낮잠 재웠어.”

언니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내가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


“참! 언니, 혹시 그 영화 봤어?!”

“으응? 어떤 영화?”

“왜 그 이정재랑 전도연 나오는 영화… 뭐더라.. 아.. 맞다. 하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내가 말했다.


“아니? 못 봤는데? 그런데 그 영화는 왜?”

“아.. 그 영화 되게 야하대. 이정재랑 전도연 배드신이 어마어마한가 봐.”

내 동공이 점점 더 또랑또랑해지고 있었다. 약간의 미묘한 정적이 흐른 뒤.. 내가 언니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언니.. 마침 애들도 자는데, 우리 유플러스로 돈 내고 그 영화 볼까?”

“지금?”

“어.”

지금이 아니면 절대로 안 된다는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럴까? 그럼?”

언니는 내 이글거리는 눈빛에 그만 굴복당하고 말았다.


“앗싸! 도대체 얼마나 야하길래 그 난리들일까? 흐흐흐..”

나는 야한 웃음을 흘리며  재생 버튼을 꾹 눌렀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깰까 봐 소리는 최대한 작게 줄이고, 설레는 마음으로 소파 깊숙이 엉덩이를 파묻었다.



문제의 통창! 이 어마어마한 뷰를 보라! 문제의 옆마당에서 뒷마당까지 생생한 사건현장.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언니, 저기 좀 봐라. 우리 집 통창! 이만한 뷰가 또 어딨냐? 완전 무슨 자동차극장 저리 가리지? 꼭 이쪽이 대형 스크린 같네.”

프르른 자연을 품고 있는 우리 집 거실 통창을 손으로 가리키며 호기롭게 말했다.


어느덧 영화가 시작되고, 전도연이 아슬아슬한 자세로 이정재의 애간장을 녹일 때는 “어머, 어머, 저러면 남자가 어떻게 안 넘어가니?” 언니와 맞장구를 치면서 점점 영화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갔다. 드디어, 바로 그 문제의 장면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이정재가 와인병을 들고 전도연의 방을 찾아왔다. 누워있던 전도연이 화들짝 놀라(아니, 기다렸을지도) 몸을 일으키고 와인을 병째 마시는 이정재에게로 다가갔다.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전도연이 알 수 없는 요상한 자세를 취할 때는 “어머, 왜 저래. 어머머 미쳤나 봐.”를 연발하며 민망한 마음에 더 호들갑을 떨었다. 영화는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나는 침을 꼴깍거리며 끌려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드넓은 거실 통창으로 갑자기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순간, 영화 속 무슨 그림자들이 우리 집 거실 창에 비추이는 건가, 아님 이쪽이 스크린 인가? 착각이 들었는데.. 아니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오! 아! 우! 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시아버님이 손님들을 이끌고 우리 집에 오시다니! 아버님은 앞마당부터 빙 둘러보면서 우리가 있는 옆 마당 뒷마당으로 자랑스레 손님들을 이끌었다. 누가 보면 우리 집이 모델하우스인 줄.


시아버님 얼굴엔 함박꽃이 피어났고 해 같이 빛나는 얼굴로 점점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님, 제발 오지 마세요. 일단 거기 딱! 멈추세요.’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속은 썩어가고 있었다. 순간 너무 놀란 나는 빛의 속도로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어서 빨리 전원을 꺼야만 했다.


휴, 눌렀다. 정지 버튼을. 티브이 화면을 보니 알몸의 이정재와 전도연이 민망한 자세로 그대로 얼음이 되어있었다.



에그머니! 이걸 어째…! 왜 하필이면 가장 야한 문제의 그 장면에서 딱! 멈췄단 말인가! 나는 시아버님도 보시라고 친절하게 정지 버튼을 꾹 눌러 그 장면을 박제시키고 만 것이다. 언니와 나는 필사적으로 티브이 앞을, 아니 이정재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56인치의 화면 밖으로 이정재의 속살이 삐집고 나왔다. 우리 몸으로 다 가리기에는 역부족인 화면 크기였다. 창밖 너머로 보이는 시아버님과 손님들에게는 버릇없이 목례로만 까딱까딱 인사했다. 등에서 진땀이 쭐쭐 흘렀다. 시아버님은 ‘아니, 예의 바른 우리 며느리가 왜 가까이 오지를 못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셨다. ‘아버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사옵니다. 아버님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이 며느리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사옵니다.’ 이렇게 속으로 말하며 멋쩍게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언니가 기지를 발휘해 빠르게 전선을 뽑았다.


휴….!!


드디어 이정재의 알몸이 화면 밖으로 퇴장한 걸 확인한 뒤, 얼른 뒷문 입구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유리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큰소리로 인사했다.

“아버님! 오셨어요! 아… 안녕하세요. 어서들 오세요. 다들 시원한 냉커피 좀 타 드릴 까요?”  

그제야 나는 세상에서 가장 상냥하고 예의 바른, 현숙한 며느리가 되어 시아버님과 손님들을 공손이 맞이했다.


그날 언니가 아니었다면, 시아버님과 손님들의 뇌리 속에 나는 ‘옹녀 며느리’쯤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아이도 넷이나 낳았겠다, 정욕을 주체 못 하는 그런 야한 여인으로 가슴에 주홍글씨가 새겨졌을지 모를 일이다.


언니와 나는 이따금씩 아찔했던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깔깔깔 웃곤 한다. 특히 티브이에서 이정재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진땀과 함께 웃음이 난다.


“아, 그때 윤현주 얼굴 나만 봐서 아쉽네. 놀란 토끼눈으로 얼굴은 홍당무가 돼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라니.. 그날 너 진짜 웃겼는데..!”

언니가 가끔 놀린다.


그날 이후 영화 “하녀”는 우리 자매에게 가장 야한 웃음 버튼인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웃음 버튼이다.


언니! 그런데 그날,
이정재가 나에게 모욕감을 준 걸까?
아니면,
내가 이정재에게 모욕감을 준 걸까?

이전 16화 자연이 만들어준 내 얼굴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사계절이 쉬어가는 우리 집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