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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안 Jun 09. 2019

아무리 뜨거워도 이렇게까지 외쳐야 할까, <보도지침>

이야기가 아닌 연기로 던지는 '펀치 드렁크'

1985년, 보도지침 폭로 사건이 있었다

보도지침은 제5공화국 당시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가 신문사와 방송사에 은밀히 하달한 보도에 대한 지시 사항이다. 1985년 《한국일보》기자 김주언이 잡지 《말》에 폭로하면서 이것의 존재가 알려졌다. 

정부는 보도 지침으로 뉴스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하였다. 주로 민주화 운동, 대외 관계, 여론, 언론 등과 관련된 사안에 보도 지침을 내렸다.  - 출처: 위키백과

연극 <보도지침>은 동명의 실화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연극 중에서 그 실체가 짤막하게 언급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궁금해서 어떤 지침이 있었는지 찾아 보았다.

이 보도지침에서 가장 많이 되풀이되고 있는 말은 …예컨대 「농촌 파멸직전 보도하지 말 것」「고문기사 일체 보도하지 말 것」「남북 스포츠회담 조그맣게 보도할 것」「한·미 통상협상은 미국 압력에 굴복 대신 '우리의 능동적 대처'로 쓸 것」「담배수입, 미국 압력에 의한 것 아니라고 쓸 것」… 등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 보도지침 사건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더불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게 중론이라고 한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뜨겁게 다뤄질 수밖에 없는 소재인 셈이다.


그런데, 그렇게 치더라도 이건 너무 무겁다.



독특한 도입, 뜨거운 연기, 그러나 너무 많은 이야기


8시, 연극이 시작되면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비상 시 대피로나 핸드폰을 꺼달라는 이야기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방송은 조금 색다른 말을 꺼낸다.

두 명의 배우가 무대 위로 걸어나오면, 기자회견 장면은 마음껏 사진을 찍어 주세요. 많이많이 퍼뜨려주세요. 장면이 끝나면 핸드폰을 끄고 공연에 집중해주세요.

이렇게 독특한 주문을 하는 이유는 첫 장면이 말 그대로 '기자회견' 장면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카메라를 꺼내 촬영하는 찰칵찰칵 효과음은 그대로 실감나는 기자회견의 장치가 된다. 이 폭로가 정말 중요한 소재라는 긴박감을 자아내는 한편 관객 반응이 그대로 공연의 장치가 되니 무척 흥미롭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극의 신선한 부분은 이 정도에 국한된다. 


주연은 총 4명이다. 보도지침을 폭로한 신문 기자인 주언과 보도지침을 실은 잡지 <말> 편집장인 정배, 이들을 변호하는 변호사, 그리고 이들을 기소한 검사이다. 배경은 재판정이다. 검사와 변호사가 변론의 형태로 이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사실 검사와 변호사를 포함한 이 4명은 모두 같은 학교를 나온 동기 사이이며, 같이 연극 동아리에 몸담았던 사이다.

상단 4명이 각자 기자-기자-변호사-검사 역을 맡는다. 개인적으로는 '여자'역의 김히어라 배우가 제일 좋았다.

80년대는 어떤 시대인가. 토크쇼 <대화의 희열>에 나온 배철수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젊었던 때에는 음악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외면했던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 덕분에 지금의 사회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


음악에만 빠져 있던 아웃사이더조차 절감했던 그 사회적 분위기. 아마 운동의 최전선에 있었던 대학생들은 더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대학생들 또한 무거운 사회적 분위기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예술 사이에서 고뇌하고, 모종의 사건을 겪은 후, 자신들의 사회에 대한 신념을 공고히 한다. 누군가는 그 끓어오르던 열정을 그대로 나라에 복종하는 것으로 해갈하고, 누군가는 내내 품어왔던 의심과 분노를 사회에서 '폭로'한다. 그것이 바로 연극의 핵심 소재인 '보도지침 폭로 사건'이다.


이 연극이 삼엄한 보도지침 이야기와 대학교 연극동아리 이야기를 섞은 건 일견 어울리지 않아 보이면서도, 보다 보면 수긍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 캐릭터들의 뿌리와 각자 지니고 있던 헛꿈을 가장 쉽게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극 전개 측면에서도 도움이 된다. '재판정'이라는 무거운 배경에서 벗어나, 가볍고 활기찬 캠퍼스를 배경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한층 가볍고 유머러스하다. 


아니,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전개는 균형을 잃어버린다. 배우들은 말이 너무 많아지고, 무대를 쿵쿵 구르고, 바락바락 소리지른다. 커뮤니티의 혹자는 이 광경을 '소리지르며 선생질'한다고까지 표현했다. 심지어 이런 '윽박지름'은 연극 <보도지침>의 초연, 재연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특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어째서 2019년 3연에서는 이런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들이 더 크게 소리치는 이유: 극이 '낡아' 버렸기 때문에


답은 간단하다. 이야기 자체가 가진 파워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흥행은 시의성을 기반으로 한다. 인디영화였던 <록키>가 흥행한 것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며 지쳐 버렸던 미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영화 <나홀로 집에>가 흥행한 것은 80년대 후반 맞벌이를 하며 아이를 홀로 집에 남겨둘 수밖에 없던 미국 가정주부의 불안감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작품의 메가히트에는 항상 현대사회를 해석하는 메타포가 숨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 연극이 다루는 언론 탄압 이야기가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시기는, 나라 전체가 정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터질 듯이 끓어오르던 이전의 정권이다. 이 연극의 1연이 2016년이었으니 그때만 해도 그 기획의도는 효과적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권은 1~2년 사이에 극적일 정도로 뒤집어졌고, 지금의 사회적 불만과 논쟁거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실질적으로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은 아닌데 이야기만 홀로 낡아버린 셈이다. 물론 그 사이 기자라는 직업이 가지는 위엄이 더욱 더 추락해 버린 것도 소재의 약화에 기여했을 것이고. 결국 배우와 연출은, 자신들이 이 연극을 왜 공연해야 하는지 더 길고 우렁차게 전달할 수밖에 없다. 


물론 관객도 일말의 경각심을 느낀다. 그것은 언론을 틀어막고 국민을 겁박하던 군사정권 시절의 이야기가 지금 들어도 모골이 송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연극의 중심인 '보도지침' 사건은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 라는 일종의 회고로서만 기능할 뿐 2019년 현재의 대한민국에도 적용되는 현대적인 키워드를 내놓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들은 더 자신들의 분노를 고래고래 소리지를 수밖에 없다. 그러면 관객은 강력한 실화와 강력한 발성, 두 가지에 두들겨 맞은 채 얼얼해하며 관객석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내 고막 터진 거 아닌가 몰라, 라고 중얼거리며.



공연 정보

● 공연기간

2019.04.26~2019.07.07


● 극장 컨디션

딱 보기에도 새 건물

대학로 TOM 시어터 2관. 지하 1층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지하 2층에서 관람한다. 화장실은 지하 1층에 위치한 것보다는 2층에 위치한 걸 사용하는 것이 줄이 짧아 쾌적하다. 다만 중요한 의자가 불편하다. 쿠션이 부족해서 묘하게 허리가 뻣뻣해진다. 가끔 극장 의자 중에서 이런 것들이 있다. 별로 부족한 점이 없는데 불편한 의자 말이다. 어쨌든 참고하자.


● 추천 대상

정통 연극의 묵직한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굵직한 남자 배우의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좋겠다. 혹자는 엄혹한 당대를 직접 겪었던 4~50대 중장년층이 보기에 적절하다고도 한다.  


● 알고 보면 좋은 팁

1열에 앉은 관객에게는 배우들이 집어던지는 종이가 날아올 수 있다. 옛날 시험지 재질의 바삭바삭하고 부드러운 갱지이기 때문에 다칠 염려는 없고, 관객에 따라 즐거워할 수도 있겠다. 나는 즐거웠다.


또한 관객석이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져 있는데, 각자 1열 좌측 끝과 우측 끝에는 배우가 앉아 있다. 배우가 옆에서 움직이고 대사를 치는 현장감을 느끼고 싶다면 끝에서 두번째 자리를 예매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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