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의 품격(7): 빛의 즉흥성, 홍경표 촬영감독

빛의 즉흥성과 암부의 미학으로 그리는 홍경표의 세계

by 동물의삽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필름의 물성을 몸소 익히며 영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홍경표 촬영감독은 오늘날 디지털 환경에서도 그 누구보다 아날로그적인 생명력을 화면에 구현해 내는 거장입니다. 그는 세계적인 촬영 감독 비토리오 스트라로의 철학을 깊이 계승하는데요. 촬영을 단순한 기록이 아닌 '빛으로 쓰는 글'이라 정의한 스트라로는 빛과 어둠을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이원론적 대립과 조화로 해석했습니다.


홍경표는 이러한 철학을 한국적 공간의 습도와 공기감, 그리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직사광으로 치환하여, 단순히 빛을 비추기보다 어둠의 농도를 섬세하게 조율했는데요. 이로써 보는 이에게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독보적인 암부의 미학을 완성했습니다.



1. <마더> - 빛으로 새기고 그림자로 지운 춤

https://youtu.be/MqokbMIzd7w

영화 <마더>는 수미상관으로 배치된 오프닝과 엔딩의 시퀀스만으로도 관객에게 잊을 수 없는 잔상을 남기는 데 성공합니다. 오프닝의 들판을 내리쬐는 건조한 빛은 인물의 고독과 광기를 날카롭게 묘사하고, 엔딩의 버스 안으로 쏟아지는 역광은 죄책감과 망각의 경계에서 인물의 실루엣을 뭉개버리는데요. 홍경표는 이 두 장면을 통해 빛이 어떻게 진실을 드러내고, 또 어떻게 기억을 어둠 속으로 숨기는 지를 완벽하게 시각화했습니다.



2. <곡성> - 불길한 어둠이 빚어낸 토속적 긴장

https://youtu.be/Ws6og-0fjv0

<곡성>에서 그는 한국인이라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낄 만한 토속적인 소재들을, 가장 꺼려지는 순간에 배치하여 공포의 밀도를 높이는데요. 해가 뜨기 직전의 창백한 새벽빛이나 눅진한 습기를 머금은 창고의 암부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을 극대화합니다. 인공적인 조명을 배제하고 자연이 허락한 서늘한 공기를 화면에 담아낸 그의 뚝심은,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 너머의 부정한 기운을 피부로 직접 느끼게 만듭니다.



3. <버닝> - 사라지는 찰나를 낚아챈 10분의 기적

https://youtu.be/hy35S5g83GM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서 해미가 노을 아래서 춤을 추는 장면은 홍경표의 '빛의 즉흥성'이 정점에 달한 순간입니다. 하루 중 오직 10분 내외만 허락되는 매직 아워의 빛을 잡기 위해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집념은,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미학적 타격을 선사하는데요. 사라져 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완벽한 실루엣이 된 인물의 움직임은, 소멸해 가는 빛과 방황하는 청춘의 허무를 일치시킨 경이로운 포착이었습니다.



4. <기생충> - 수평과 수직의 미학, 그리고 계급의 암부

https://youtu.be/5xH0HfJHsaY

<기생충>은 그가 평생 쌓아온 모든 기술적 디테일이 집약된 마스터피스입니다. 그는 화면을 철저하게 수평과 수직으로 나누어 세(혹은 2 + 1?) 가족의 뒤엉킨 운명을 정교하게 설계했는데요. 부유한 저택의 투명한 채광과 반지하의 먼지 낀 어둠, 그리고 지하실의 눅진한 블랙은 시각적 대비를 넘어선 계급의 층위를 드러냅니다. 특히 극 후반부, 가장 화사한 대낮의 정원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클라이맥스까지 흔들림 없이 극의 긴장감을 끌고 가는 그의 카메라는 구조적 완결성의 극치를 보여줬죠.



이처럼 홍경표 촬영감독이 구축해 온 독보적인 미학은 이제 한국이라는 지평을 넘어 세계 영화계의 중심부를 향하고 있습니다. 특히 거장 봉준호 감독과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다져진 그의 명성은 이미 할리우드 배우들과 제작진 사이에서도 경외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는데요. 만약 한국 영화계에서 아카데미 촬영상을 거머쥐는 최초의 인물이 등장한다면, 우리는 주저 없이 홍경표라는 이름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은 다시 한번 나홍진 감독과 손을 잡은 그의 차기작 <호프(HOPE)>로 향합니다. 필름의 질감을 간직한 채 빛의 즉흥성을 가장 예리하게 낚아채는 그가, 이번에는 또 어떤 '빛으로 둘러싸인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 보일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찰나의 빛이 빚어낼 그 새로운 우주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영화팬들은 오늘도 설레는 마음으로 그가 설계한 세계가 열리는 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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