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는 비즈니스다(5): 묵직한 카리스마, 김응룡 감독

본편에 싣지 못했던 뒷이야기들

by 동물의삽

<프로는 비즈니스다> 4편, 김응룡 감독님의 이야기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글에서는 냉철한 승부사와 카리스마 경영자로서의 면모를 분석했습니다만, 사실 그 시절 해태 타이거즈에는 비즈니스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가슴 뜨거운 ‘낭만’과 ‘아픔’이 공존했었는데요. 오늘은 본문에 다 담지 못한, 그 시절 광주의 뜨거웠던 뒷이야기를 잠시 나누려 합니다.



의자가 부서져도,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김응룡 감독님은 더그아웃의 호랑이였습니다. 경기가 풀리지 않으면 더그아웃 의자를 집어던지거나 부수는 일도 다반사였죠. 하지만 흥미로운 건, 그 불같은 분노가 결코 특정 선수를 향하지 않았다는 점인데요.


https://youtu.be/LKus5 FOiD-4


감독님은 누군가를 콕 집어 비난하는 대신, 의자를 부수며 팀 전체의 분위기를 다잡았습니다. 선수들은 그 박살 난 의자를 보며 감독님의 메시지를 읽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대신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라운드로 달려 나갔죠. 그것은 투박하지만, 선수들을 보호하는 그분만의 방식이었습니다.



운전기사가 필요 없었던 ‘광주의 대통령’


당시 김 감독님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감독님은 수행기사를 두지 않고 직접 운전하는 걸 좋아하셨는데요. 광주 시내에서 운전하다 앞차가 끼어들어 험악한 상황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 상대방 운전석 창문이 열리고 김응룡 감독님의 얼굴이 쑥 나오자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습니다.


화를 내려던 뒤 차량의 시민 분은, 감독님의 얼굴을 확인하고 분노가 눈 녹듯 사라졌다는 일화인데요.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광주 시민들에게 단순한 야구단이 아니라, 삶의 자부심 그 자체였던 셈입니다.



“니들은 이 좋은 환경에서도…”


하지만 그 자부심의 이면에는 눈물겨운 현실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면 배수가 안 돼 외야에 웅덩이가 생기고, 그 웅덩이에서 물방개가 헤엄쳤다는 무등경기장의 전설은 지금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해태의 전설적인 3루수 한대화 선수가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되었을 때의 일화는 뼈아픕니다. 당시 최고급 시설을 갖춘 LG의 훈련장과 숙소를 처음 본 한대화 선수는 충격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니들은 이런 데서 야구하면서 우승을 한 번밖에 못 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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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 없는 흙바닥에서 구르고 뛰며 왕조를 일궈낸 선수들의 자부심과, 동시에 느껴졌을 상대적 박탈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한마디입니다. 그리고 그 시즌에 당당히 활약하며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시즌 중 하나로 꼽히는 엘지의 1994 신바람 시즌 우승의 주역이 되었으니, 언행일치를 지킨 셈이 되었네요.



카리스마의 진실: 야구만 잘하면 '쌍안경'도 허락한다


하지만 그 카리스마에는 선수들이 만들어낸 재미있는 오해도 있었습니다. 해태의 전설적인 3루수 한대화 선수는 시력이 좋지 않아 렌즈를 착용했지만, 경기 중에 수시로 관리해줘야 하는 렌즈가 불편해도 안경 착용을 주저했습니다. 한 기자가 이유를 묻자, 그는 "감독님이 (안경 쓴 모습을 보고) 건방지다고 하실 것 같다"며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의 성적은 점점 떨어졌습니다.


이 사연을 전해 들은 김응룡 감독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아니, 야구만 잘하면 안경이 아니라 쌍안경을 쓰고 나온 들 누가 말린대!"


감독님의 흔쾌한 허락으로 안경을 쓰고 경기에 나선 한대화 선수의 성적은 곧바로 급반등 했습니다. 김 감독님의 카리스마는 개인의 스타일이 아닌, '프로로서의 성과'만을 기준으로 삼았던 냉철하고 명쾌한 경영 철학이었음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반전입니다.



‘쥐약’이 되어버린 마지막 우승


1997년, 해태 타이거즈는 또 한 번의 기적 같은 우승을 일궈냅니다. 하지만 선수들 사이에서는 이 우승을 두고 “쥐약”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돌았습니다. 우승의 기쁨은 달콤했지만, 기울어가던 모기업의 사정 탓에 우승 보너스는커녕 구단의 살림은 더욱 팍팍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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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대부분의 팬들도 알고 있었죠, 이것이 해태의 마지막 우승 사진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결국 그 우승은 ‘해태’라는 이름으로 모기업이 누린 마지막 영광이 되었습니다. 자본이 없어도 정신력과 카리스마로 버텼던 ‘헝그리 왕조’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셈입니다.



마치며

지금의 프로야구는 최신식 구장과 최첨단 장비,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철저한 비즈니스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비가 오면 물웅덩이가 생기던 그 열악한 구장에서, 부서진 의자를 뒤로하고 이 악물고 뛰었던 그 시절의 ‘야생마’들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김응룡 감독님의 진짜 능력은, 부족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기적을 만들어낸 ‘진심’에 있지 않았을까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주에는 또 다른 리더십, 데이터와 시스템의 야구로 시대를 바꾼 김성근 감독님의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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