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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늠 Jul 02. 2022

우산장수와 짚신장수의 엄마

2021년 가을, 나의 고민

 토요일 저녁, 아이가 안방에 들어오더니 이틀 전 주문을 부탁했던 친구의 생일선물에 대해 물었다. 요즈음 자주 깜박하는 엄마가 못 미더워 재차 확인하는 줄 알고 장난스레 대꾸했다.

“엄마가 주문했을까, 안 했을까?”

 장난을 치면 콧방귀를 뀌거나 웃고 마는 아이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괜히 뜸 들이다가 한 소리 들을 기세라 “주문했어. 그런데 연휴 끝나고 배송 시작될걸? 근데 왜?” 물으니 “주문 취소할 수 있나 해서요.”라는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왜?”라고 재차 물으니 “주고 싶지 않아서요.”하고는 안방을 나가버렸다. 의아한 마음에 아이 방으로 쫓아가 보았다.

 “왜 갑자기? 무슨 일 있어?” 물으니 대답이 없다.

 아이는 쌍둥이 중 첫째이다. 거실에 있던 둘째도 그 친구 무리의 한 명 인지라 일단 방문을 닫고 아이 옆에 앉았다. 내가 옆에 앉자 아이는 열려 있던 인터넷 창을 모두 닫아버렸다. 억지로 화면을 띄워볼 수도 없어서 몇 번을 물으니 그제야 카톡창을 열고 그동안의 일을 들려주었다.


 쌍둥이인 아들 둘은 같은 중학교를 다닌다. 노는 친구도 겹치는 편이다. 중학교 때는 다른 반을 희망해서 반을 갈라놓았지만, 등하교는 늘 함께 하도록 했다. 1학년 때 둘째 아이가 미술실 당번을 하면서 귀가가 늦어졌을 때, 첫째가 둘째를 기다리는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다 함께 미술실 청소를 하던 둘째 아이의 반 친구들과 어울리는 사이가 되었다. 2학년부터는 코로나 탓에 온라인 수업을 하다 보니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하였고, 1학년 때 친해졌던 그 아이들과의 관계가 3학년까지 이어졌다.

 아들 둘의 학습 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중 2 때 처음 치른 시험에서 점수 차가 크게 났다. 중간고사 기간 내내 둘째가 자랑하듯 시험 결과를 말할 때, 첫째는 자기 방으로 그냥 쓱 들어가 버려서 점수는 묻지도 못하고 위로부터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엄마의 눈에 학습량이 더 많아 보이는데, 큰아이는 성과가 좋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둘을 비교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해도, 큰아이가 성적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건은 간간이 발생했다.


 이번 일도 그랬다. 해당 그룹 채팅방에서 다른 친구가 수학의 특정 개념을 물었는데 첫째와 친구 A가 얘기를 나누다가 A가 큰아이에게 “00가 이 개념을 알 리가 없지.”라는 말을 한 게 화근이었다. 아이는 친구에게 왜 말을 그따위로 하냐고 대꾸했고, A는 별 것도 아닌 걸로 오버하지 말라는 식의 대화로 이어졌다. 몇 번의 톡이 오가다가 아이는 내게 와서 선물 취소를 부탁했던 거였다.

 알고 보니 A는 공부가 화제에 올랐을 때 큰아이를 무시하는 말을 수시로 했고, 그때마다 “그런 말 기분 나쁘니까 하지 마”라고 말했는데도 고치지 않아 아이는 화가 난 거였다. 콧수염이 거뭇하게 난 아들이 얼굴이 벌게져서 꺽꺽거리며 우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친구가 세상의 전부일 수 있는 나이이니 기분이 나쁜 건 이해가 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당연히 화나지, 말을 했는데도 고치지 않는 상대 때문에 네가 마음을 다칠 필요는 없어, 그 아이가 친구의 마음을 헤아릴 그릇이 안 되는 거야.” 등등 온갖 위로와 충고와 공감의 말을 해주다 보니 아이는 차분해졌다.


 경기교육청은 2018년부터 중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자유 학년제를 시행하였다. '1학년 동안 시험 부담에서 벗어나 다양한 체험중심의 학습활동'을 하는 정책으로 초등학교에 비해 늘어난 교과목에 ‘충분히 적응(?!)’한 후 지필평가 위주의 중간, 기말고사는 2학년부터 실시한다. 아이의 성적을 알 수 없으니 학원 테스트로 미리 가늠해야 한다고들 조언(!!)했지만, 코딩과 운동을 더 다니고 싶다는 아이를 굳이 설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랬던 우리 부부는 첫째의 시험성적을 위로해주던 상황과는 별개로, 둘째 아이가 전 과목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받자 당혹스럽고 자책까지 들었다. 특히 엄마인 내가 공부는 스스로 깨우치며 해야 한다는 고리짝 교육 철학을 고집하느라 비상할 수 있는 아이의 바짓단을 붙들고 늘어졌다는 기분에 급격히 초조해졌다.

 

 백년지대계라는 교육정책이 5년 단위로 바뀌는 한국에서 눈치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고 버텼던 나는 뒤늦게 특목고 입시를 준비할 수 있는 학원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고입에서 성과를 내는 유명 학원은 선행이 되어 있지 않은 아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웠던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로 시작된 특목고, 자율고 설립 이후로 고교 서열화가 공고해진 게 10년이 넘었고, 과학고 입시는 초등 3학년부터 시작해야 할 만큼 입시 준비 시점은 앞당겨졌다. 학원 입장에서 아이는 5년이나 뒤처진 아이였고, 나는 현실 파악 못하는 어리숙한 엄마였다.


  둘째 아이의 입시 때문에 상담을 다니면서도 첫째 아이는 어떤 위치인가를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했다. 특목고 축소와 폐지 정책을 펼치고, 해당 법안을 발의하는 데 앞장섰던 여러 정치인의 내로남불 행태에 분노하면서도, 능력껏 공부하고 네트워크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둘째 아이도 그 대열에 세우고 싶었다. 우수한 학생의 학습 성취도를 높이는 수월성 교육이 뭐가 문제인가 싶다가도, 첫째를 생각하면 '비슷한 아이끼리 격리시키는 대신 이질적인 아이들을 섞어놓아 통일성 속의 다양성을 장려해서 인간의 무한한 가치를 존중하도록 가르'1) 치자는 주장에 동의가 갔다. 오락가락하는 내 꼴이 우산장수와 짚신장수의 어머니가 된 격이었다. ‘평생을 학습 능력 하나로 단죄받고 사는 시스템’ 2)때문에 차별받는 쪽에 서 있었으면서도 아이의 일에 대해서만큼은 공동체의 대의가 먼저 떠오르지 않았다. 마땅히 지키고 행해야 할 큰 도리를 실천해서 본을 보여야 할 자리에 있지도 않은 내가 이런 고민을 한다니 꼴값한다고 자조하면서도 ‘그래 이거야!’라고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성적이 점수로 환산되기 전까지 둘째는 첫째 아이의 칭찬에 춤추는 고래였다. 두 살 무렵 외출 후 현관문을 여니 두 아이가 거실에서 동요를 틀어놓고 춤을 추고 있었다. 몸치, 박치, 음치인 둘째는 율동이라기보다는 앞뒤로 몸 흔들기를 하고 있었고, 한춤했던 첫째는 율동을 하다가도 둘째의 어설픈 몸놀림에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를 외치며 박수를 쳐 주었다. 형의 박수에 신이 난 둘째는 열심히 몸을 흔들며 까르르 웃고 신이 나 있었다. 손놀림이 허술한 첫째는 장난감 조립, 퍼즐 맞추기를 둘째에게 부탁하고는 뚝딱해서 건네는 동생에게 “오~ 대단해!”라고 말해주곤 했다. 그랬던 첫째가 동생의 학습 능력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처음 학교 시험을 치른 후, 친구와 어울려 귀가하던 중 한 아이가 “너는 몇 점 맞았냐?”라고 물어, 첫째가 점수를 얘기했더니 “배신자!”라는 반응이 돌아왔다고 한다. 첫째 아이의 점수가 배신당한 기분이 들 정도도 아니었다. 이야기를 전한 첫째도, 들은 나도 재미있다며 웃고 말았다. 장난스러운 에피소드로 얘기했지만, 또래 무리에서 늘 가오를 부리던 첫째가 동생의 성적에 상대적인 열패감을 느꼈던 게 이때부터가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 읽었던 ‘개미와 베짱이’에서 열심히 일하며 겨울을 준비하는 개미가 정답이고, 기타 치고 노래 부르다 겨울을 맞는 베짱이는 오답이라고 주입받았다. 음악을 들려주는 베짱이 덕에 개미도 고된 노동이 덜 힘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한 건 어른이 되고 나서도 한참 후였다. 내 주변 역시 열심히 일하는 일개미 집단에 속하는 이가 대다수다. 이런 개미군단에서 첫째 아이는 베짱이 같은 존재였다. 두 아이 모두 도보 10분 거리의 학원을 다니는데, 하원 알림 문자가 오고 둘째가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10분을 넘긴 적이 없다. 차안대를 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둘째와 달리, 첫째는 주변에 관심이 많다. 귀가하며 달, 길고양이, 익숙한 풍경 가운데 달라진 모습을 찍어 나에게 보여준다. 둘째 아이는 그 나이에 사회가 가치를 높게 매기는 유전적 요소를 가지고 태어났고, 첫째는 소질을 찾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성향이 다른 두 아이가 서로의 강점을 인정하며 어른이 된 후에도 “오~ 대단한데!”라며 손뼉 쳐 줄 수 있는 형제로 크길 바라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각종 경제지표에서 행복한 나라 상위권에 오르는 북유럽에는 얀테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얀테는 덴마크 출신의 노르웨이 작가인 악셀 산데모세가 1933년 발표한 소설 3)에 등장하는 가상의 덴마크 마을로 ‘잘난 사람’이 대우받지 못하는 곳이다.

 얀테의 규칙인 ‘보통사람의 법칙’ 10개 중 일부만 예를 들어보자면,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당신이 남들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말아라’,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자만하지 말아라’ 등 내가 남보다 비범하다는 생각을 삼가라는 항목 일색이다. 산데모세는 관습에 얽매인 마을의 억압적인 규칙을 풍자하기 위해 글을 썼지만 4), 오늘날 북유럽은 이를 공공가치를 표현하는 법칙으로 읽어낸다. 능력주의 교육이 불러올 디스토피아를 경고한 마이클 영의 소설 『능력주의』가 오히려 능력주의를 설파한 책으로 읽혔듯이 말이다. 의도했던 바와 달리 쓰이고 있을지라도, 전자는 공공선을 추구하는 가치 있는 의미로, 후자는 적자생존을 강화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뜻으로 자리 잡았다.


 얀테의 법칙이 통용되는 북유럽도 교육은 공공서비스이니 모든 사회 구성원이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모두가 칭찬하는 핀란드의 교육 개혁을 완성하는 데 무려 20년이 걸렸고, 독일 금속노조가 임금체계를 개편하는 데만도 20년이 걸렸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정답을 꾸준히 얘기하다 보면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도 설득된다.'5)고 어느 경제학자는 말했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한 후, 보좌관이나 비서 없이 작은 사무실에서 홀로 일하는 스웨덴 정치인의 일상을 본 적이 있다. 한국 정치인의 행태와 너무 달라 신기한 마음에 그들의 정치문화를 찾아보았다. 스웨덴은 매년 여름휴가철 ‘알메달렌 주간’이라는 정치 축제가 열린다. 시민이 부스와 거리에서 정치인, 언론인과 만나 토론을 벌이고, 정책 콘텐츠가 온 국민의 관심사이며, 의무 투표도 아닌데 선거 투표율이 85%에 이른다. 이 정치 축제에 우리나라 정치인이 연수를 다녀온 후 만든 행사가 있다. 2018년도에 시작한 ‘유권자 정치 페스티벌’이 그것으로 10월 마지막 주에 3일간 열린다. 정당의 정책 설명 및 유권자와의 소통, 학술단체의 선거, 정치를 주제로 하는 학술토론을 진행한다. 각 정당의 정책을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 정치인이 내놓는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런 중요한 정책상 결정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대중의 눈과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6) 지지 않도록, 사회가 필요로 하는 능력이 없는 자가 모멸감이 아닌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대중의 정치적 저항을 억압하면서도 그들의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추출하고 싶어”7)하는 지도층이 그들 입맛에 맞는 정책을 펴기 전에 꼼꼼히 들여다보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2021년 2월 17일 고교학점제 종합 추진계획 발표가 있었다. 진로와 적성에 맞는 과목을 선택하여 학점을 취득한 후 졸업하는 방식으로, 근본적인 교육의 틀을 변화시킨다는 내용이다. 2025년에는 전면적으로 적용된다. 정권이 바뀌면서 널을 뛰는 정책에 우리 아이도 영향권에 들다 보니, 정치 혐오자였던 내가 정치참여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선거철에만 대접받던 유권자가 아닌 삶의 전반을 예를 갖춰서 대할 방안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올해(2021년) 온라인으로 열린 ‘유권자 정치 페스티벌’을 접속해서 지켜보았다. 나와 같은 시간에 접속해 있던 인원은 20명 남짓이었다.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약칭 참여연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정부지원금을 받지 않고 회원의 회비로만 운영하는 단체의 회원 수는 15.000명이 되지 않았다. 3천만 인구 중에 0.05%. 창립 27주년을 맞는 단체의 현 상황이다. 나라 걱정을 같이 해 보려고 후원을 시작했다. 이 글을 읽을 두 아이가 엄마의 헛짓거리에 보일 반응은 피식 웃거나 ‘오, 대단해’ 중 전자에 가깝겠지만, 언젠가는 엄마가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아주길. 아니어도 뭐 어쩔 수 없고.



인용:

1)『능력주의』 마이클 영, 이매진, 270쪽

2)『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오찬호, 개마고원, 5쪽

3) <도망자, 그의 지난 발자취를 따라서 건너다(A fugitive crosses his tracks)>

4) https://www.themodernnovel.org/europe/w-europe/norway/sandemose/fugitive/

5) 프레시안 20120304 강신준 교수 ‘21세기, 마르크스 <자본>으로의 안내’ 마지막 강의 중

6)『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함규진 역, 와이즈베리, 58쪽

7) 『한국의 능력주의』, 박권일, 이데아, 65쪽






2021년 지역서점에서 주관한 프로그램을 수강하며 쓴 글입니다. 6월부터 10월까지 일주일에 한 번,  <능력주의>라는 화두로 책을 읽고 글을 썼습니다. 함께 수업을 완주한 분들의 글을 묶어 책으로 만들기도 했어요. 분명 읽은 책인데 왜 좋은지 설명하려면 머리가 꼬였던 제가 이 글을 완성했다는 게 놀랍다는 수업 후기도 남겼습니다^^;;

5개월간의 수업이 끝나고 글을 계속 쓰고 싶다는 생각과 다짐을 지금까지 실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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