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야 Sep 11. 2019

사연 많은 소성리에서 땅콩을 삶다.

사드반대 동지 고 권정술 할머니 명복을 빕니다.

아침일찍 고추밭으로 올랐다.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느라 정신없이 바쁜 8월이었다. 하루 3시간만 농사노동을 하겠다는 나의 각오는 잘 지켜지고 있었다. 

그 날도 빨간 고추를 몇 바구니 따고 내려갈려던 찰나였다. 봉정할매가 나를 불러세웠다. 땅콩 한 알을 까서 내게 맛보여주면서 하는 말이.

“안동영감이 혼자서 땅콩을 캐놓고는 다듬고 있길래 옆에서 거들다 왔다. 어여... 땅콩이 알은 작아도 토종이라서 맛은 있더라, 이제 혼자돼서 농사 짓겠나 싶어서 걱정했디만 농사지어놓은 건 수확한다고 애묵고 있네. 캐놔도 팔 사람이 가버렸잖아. 팔도 못하면 다 썩어 버릴낀데, 어여.. 우야노? ” 하는 거다. 

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싶다가도 봉정할매가 나에게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건 SOS를 치는 것이라 생각되어 모른 척 건성으로 들을 수가 없었다.   

“할매 땅콩은 어디있는데요?” 하고 물으니

“안동영감집 마당에 늘어놨다 한번 가서 볼래?” 하며 한 수 더 떠서 나를 이끌고 가는거다. 

안동할배는 밭에 가셨다. 

넓은 마당 한쪽에 넓은 헛간이 있다. 허공에는 마늘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땅콩은 씻어서 바닥에 망을 깔고 펼쳐놓았다. 땅콩 농사는 왜 그렇게 많이 지었는지 세 마지기 밭이라고 한다. 아직도 캘 양이 어마어마하다. 

나도 방법이 딱히 있는 건 아니었다. 봉정할매의 걱정을 덜어드릴려고 일단은 팔아보겠다고 대답을 했다. 걱정이 앞섰다. 봉정할매가 기대한 만큼 안 되면 그것도 참 면목 없는 일이었다.    

첫 째로 소성리평화세력이 모여 있는 단체SMS방에 땅콩의 수확을 알렸다. 그것만 미덥지 못해서 성주지역 주민들이 애용하는 먹거리 직거래 장터 밴드로 소성리땅콩 수확 소식을 올렸다. 땅콩 한 됫박에 한 주먹 더 올려주고 가격이 쌌나보다. 순식간에 ‘저요 저요’ 손을 들면서 땅콩 주문이 이어졌다. 땅콩을 먹어본 성주주민들이 알은 작아도 고소하고 맛이 좋다고 또 구매를 해주었다. 입소문이 난거다. 순식간에 150되 이상 주문을 받아서 팔았다. 그 사이 나도 소성리로 오르락 내리락 거리면서 땅콩을 받아서 배달하기 바빴다. 얼굴을 아는 사람들도 아니고 온라인 상으로 성주지역민들끼리 믿고 거래하는 거지만, 돈을 떼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신뢰관계는 좋았다. 거래는 원활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땅 속에서 캔 땅콩은 쭉정이도 많고, 썩은 알이 나오기도 한다. 깨끗이 가려내도 그렇기 때문에 됫박으로 주고도 쭉정이나 썩은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한 주먹을 더 올려주는 법이다. 안동할배가 선별한 땅콩에 썩은 알이나 쭉정이가 많이 나와서 큰일이었다.  

주문이 밀려오자 안동할배의 손은 더 바빠졌고, 봉정할매도 옆에서 땅콩 가려내는 작업을 거들었다. 동네 이웃의 할매들도 땅콩 선별작업에 동원되었다. 할매들의 손끝은 매웠다.  선별한 땅콩은 알도 튼실하고 썩은 것도 안 나와서 실한데, 안동할배가 선별한건 썩은 게 많이 나와서 불평을 들어야 했다.  

“며칠 전에 할매가 돌아가셔서 할배 혼자서 땅콩 캐고 씻고 가려내느라고 가려내도, 아무래도 할매 있을 때보다는 꼼꼼하게 못하는가 봅니다. 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라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럼 사람들은 "아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럼 어쩔 수 없지요. 뭐“ 하면서 사정을 충분히 이해해준다. 시골사람들의 순박한 정서가 통한다고나 할까?     

안동할배는 며칠 전에 상처를 하셨다. 

안동할배의 부인은 소성리마을에서 안동댁이라는 택호로 불려진 권정술할매다. 

봉정댁 도금연할매는 안동할배의 형수다. 

도금연할매와 권정술할매는 동서지간이다.     

안동댁 권정술할매는 사드가 소성리로 배치된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사드배치를 막아내기 위해서 싸웠던 당찬 할매다. 성주 성산포대로 배치된다고 알려졌던 사드가 제3부지로 지목된 소성리로 오게 된 것이 성주군수 김항곤의 간교한 술수라며 분노했다.  

소성리할매들은 2016년 12월 성주군 열 개면이 다 모인 김장 담그기 행사에 007작전을 펼쳐서 찾아갔다. 김항곤 前 성주군수가 흰모자를 쓰고, 흰가운을 입고,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김치양념을 치댈 찰나에 소성리할매들이 김항곤을 향해서 김치싸대기를 날렸다. 사드를 소성리로 몰고온 역적이 김항곤이었으니, 김치싸대기 보다 더 한 것도 날리고 싶었을거다. 소성리할매들은 김항곤에게 분노를 토해내면 울부짖었다. 권정술할매의 매마른 입술은 다 터졌고, 입주위는 피범벅이 되어 함께 간 사람들의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치료라고 해봐야 입술닦고 안티프라민 슥슥 닦아 바르고는 끝이었다.      

추운 겨울 날에 서울 광화문으로, 롯데본사로, 국방부로 수도 없이 관광버스를 타고 먼 길을 다녀야했다. 원불교에서 대규모 사드반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법회를 열어서 종로에서 광화문으로 행진을 할 때였다. 권정술할매가 숨이 차서 걷는 게 곤욕스러웠다.  살아생전 처음으로 안동할배가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힘드나?” 

“내 손 좀 잡아 주이소”

안동할배가 내민 손을 잡고 겨우겨우 행진을 할 수 있었다던 권정술할매의 사진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서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권정술 할매는 그 날의 기억을 수줍게 떠올리면서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살아생전 처음이었다. 

스물 갓 넘겨서 소성리로 시집왔다.  육십년을 넘게 부부의 연을 맺어 살았지만 남들 보는 앞에서 절대 손잡을 일도 없었고, 나란히 걸을 일도 없었다. 

평생을 밭만 매면서 살았던 권정술할매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성한 데가 없었다. 손톱이 다 닳도록 농사를 지었다. 자신이 너무 먹을 것 없이 가난하게 살아서 자식에게 가난을 대물림해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위해서는 입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다. 집에 세탁기,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 하나 없이 자식을 위해 불편한 삶을 자처했다.     

평생을 손가락이 휘어지도록 일만 해서 장만한 땅이었다. 권정술할매에게 사드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을거다. 마을에 큰 우환이 들어오게 되었으니 권정술할매는 그 누구보다 사드를 반대하며 열렬히 투쟁에 나섰다. 

그런 권정술할매에게도 고민이 없는 건 아니었다. 농사지은 수확물을 내다팔기 위해서 성주 전통시장에서 노점상을 수십년동안 해왔다. 소성리에서 농사지은 마늘, 땅콩, 소성리의 자연에서 얻는 칡이나 약초를 팔아왔는데, 사드반대한다고 싸우다가 공무원들과 마주치기라도 할 때면 노점상 자리를 뺏길까봐 걱정이 되서 몸이 움츠려들기도 했다. 

그러나 사드는 평생을 일궈온 삶의 터전이 어떻게 변화될지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면서 망설이다가도 당차게 앞으로 나갔다. 나서면 딱 부러지게 말했다. “사드가 소성리로 들어서면 소성리만 박살나겠나? 폭탄이 소성리로만 떨어지겠나? 소성리에 폭탄 떨어지면 초전면도 박살나고 성주도 다 터져서 죽는거 아이가? 사드가 어데 소성리만 문제가?”   

두 번에 걸쳐 약 1만여명의 경찰 공권력이 소성리를 침탈했다. 사드를 달마산 자락 롯데골프장부지로 배치했을 때 연대온 젊은이들뿐 아니라 소성리할매들도 밤새도록 사드를 막기 위해서 온몸을 던졌다. 사드가 배치되기 전부터 후까지 유류탱크가 들어온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막으러 나왔다. 사드를 반대하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나섰다.     

권정술할매가 한참동안 마을회관을 나오지 않았다. 농사일이 바쁘고 시장으로 장사나갈 일이 더 많아졌나보다고 생각했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권정술할매의 허리가 더 구부정해졌다. 얼굴은 많이 지쳐있었다. 농사일이 힘들어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했었다. 

올해 정월부터 아랫도리가 떨어질 거 같이 아프다고 하셨다. 마늘 심어 놓은 거 다 캐놓고 병원간다면서 병원을 차일피일 미뤘다. 소성리마을회관으로 정기적으로 한의사선생님이 진료를 하는 날이면 회관으로 오셔서 침을 맞았다. 

마늘밭에서 김을 매는 권정술할매는 앉아있지 못하고 팔꿈치로 밭고랑을 기어가면서 풀을 맸다고 한다. 몸이 망가져가고 있었지만 마늘 캐놓고 간다며 고집을 피웠다. 드디어 마늘 수확을 끝냈다. 어느 날 권정술할매는 머리를 폭 감싸는 모자를 둘러쓰고 안동할배와 가방을 들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마을어귀에서 만난 할매는 마지막 인사로

“지금까지 돈 많이 벌어놓았으니까, 이제 병원에 돈쓰러가야겠다”면서 농담을 하였고, 마을 이웃들은 별스럽지 않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마늘 캐고 나면 들깨 모종을 심어야 하는 걱정이 늘어지니까 보다 못한 안동할배가 들깨모종은 자신이 심겠다고 약속을 했고, 안동할배의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권정술할매는 마음편하게 병원갈 채비를 서둘렀다고 한다. 

권정술할매가 병원으로 간 사이 안동할배는 약속을 지켰다. 들깨모종을 예쁘게도 심어놓았다. 

병원으로 간 권정술할매는 무슨 영문인지 병원에 입원하지 못했다. 몸속에 통증은 도를 넘어섰는데, 병원은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고 했다. 병원에 가는 날로 권정술할매는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다.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져만 갔다.  요양원으로 들어가서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봉정할매가 병문안을 가서는 둘이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했다. 자리를 뜨려는 봉정할매를 권정술할매는 애타게 “형님,,, 형님... ” 하면서 붙잡아서 울었다고 한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나보다. 

안동할배에게 농사짓지 말라고 거듭 당부를 했다고 한다. 남은 여생 고생하지 말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정작 당신은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어보지도 못하고, 입고 싶은 옷 한 벌 제대로 사보지 못했으면서 말이다. 

지금껏 벌어놓은 돈, 병원에서 한번 써보겠다는 꿈마저 이루지 못했다. 

뭐가 그리도 바빠서 급하게 떠나야 했는지, 그 놈의 마늘이 뭐길래! 농사가 뭐길래!

마늘 캐놓고 간다고 미룬 병원에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소성리는 사드반대를 함께 외치면서 격렬하게 저항했던 동지를 한 명 잃었다. 

꽃다운 나이에 소성리로 시집 와서 평생을 자신의 이름으로 불려보지 못했다. 선거를 할 때나 이름이 불려졌을지도 모른다. 안동댁이라고 알려져 있고, 안동댁이라고 불렸던 한 여인은 죽어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일상에서 익숙해진 이름이 택호였기에 불쑥 불려진 것일테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택호로 불렀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이름 불러야 한다. 

故 권정술 할머니는 사드반대 투쟁했던 우리의 동지이다. 

우리는 동지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고 권정술 할머니는 사드반대 투쟁의 역사 속의 한 장면을 차지했던 실존인물이다.     

농부장터에서 소성리땅콩을 사들이겠다고 연락이 왔다. 어느 분이 소성리땅콩을 팔아달라고 농부장터에 부탁을 했나보다. 고마운 일이다. 나는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평생을 의지하면서 살아왔던 짝꿍이 먼저 떠난 자리의 크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느껴질만도 할텐데, 땅콩수확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서 할배의 적적함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을 거 같아서 다행이다.      

故 권정술 할머니 좋은 세상 가셔서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편히 영면하소서.

작가의 이전글 소성리평화절박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