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 더 기대하게 된 변화
여러 국가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덕트 디자이너 특성상 현지의 통화, 물가, 주소 체계, 언어를 일일이 수동으로 맞추다 보면 복사하고 붙여넣는 단순 작업에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기곤 했습니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2025 Grab AI 스프린트에서 동료 디자이너(Kyo) 및 UX 엔지니어(Hao)와 AI 기반의 Figma 플러그인 FullLocal을 직접 기획하고 개발하고, PST에서는 프로토타입을 직접 만들고, 테스트하고, AI를 실제 제품 워크플로우에 녹여내는 과정에서 AI는 디자이너의 속도를 높이는 도구를 넘어서, 디자인의 정의 자체를 바꾸는 변화를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동안 디자이너들은 설득력 있는 화면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수동 노력을 들였습니다. 구글링을 통해 베트남 피자집 로고를 찾고, 환율 계산기를 두드리며 태국 바트(THB) 물가를 짐작하는 시간은 사실 디자인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FullLocal을 통해 이 '데이터 채우기 노동'을 AI에게 위임하자, 비로소 시간과 인지 에너지의 재배치가 일어났습니다. 단순 반복 작업이 사라진 자리에 '사고의 확장'이 들어섰습니다. 빈 화면을 어떻게 채울지 끙끙대던 작업자(Doer)에서, '어떤 문제를, 어떻게 스마트하게 해결할까'에 집중하는 설계자(Architect)로 시선이 옮겨간 것입니다.
이번 스프린트에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은 피그마 캔버스를 벗어나 살아있는 프로토타입을 구현하고 수정하는 초고속 의사결정 사이클을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코드를 다루고 개발을 진행하며 깨달은 더 무거운 사실이 있습니다. 구현 속도가 압도적으로 빨라진 만큼, 잘못된 가설 역시 순식간에 구현해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과거 피그마 캔버스 위에서는 "이쯤에서 유저가 헷갈려 하겠지"라는 '추상적인 공감'만으로도 설득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동작하는 제품을 빌딩할 때는 다릅니다. 언제 로딩 스피너를 띄울지, 에러 처리는 어떻게 할지, 데이터가 비어 있을 때 무엇을 보여줄지 등 막연한 감정이 아닌 구체적인 행동 시나리오를 뾰족하게 설계해야 합니다. 속도는 방향을 검증하는 데 써야지, 무의미한 기능을 쌓는 데 쓰면 안 됩니다.
이제 디자이너는 시안을 넘기는 사람이 아니라, 가설의 날을 벼리고 전체 유저 경험(End-to-End)을 결과물로 증명하는 제품 빌더입니다.
머지않아 디자인 프로세스 자체가 '프롬프트 중심'으로 바뀔 것임을 피부로 실감했습니다.
전체 플로우를 시각적으로 조망하는 피그마의 본질은 남겠지만, 조만간 툴 안에서도 프롬프트로 화면을 생성하고 로직을 연결하는 것이 메인 워크플로우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AI가 제가 놓친 유저 컨텍스트나 엣지 케이스를 먼저 제안해 주는 덕분에 혼자 작업할 때보다 훨씬 폭넓고 촘촘하게 사고할 수 있었습니다.
다가올 AI 시대, 디자이너의 핵심 역량 방정식은 다음과 같이 재정의될 것입니다.
디자인 역량 = 시각적 감각 + 구조적 사고 + 프롬프트 사고력(의도를 정확히 언어화하는 힘)
AI를 프로덕트에 도입하며 얻은 가장 깊은 통찰은, AI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디자인 체계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저의 특성과 맥락에 따라 수백 개의 실험(A/B Test)을 진행해 온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AI가 결합된 디자인은 더욱 더 고정된 뷰일 수 없습니다. 다음 4가지 예시정도를 보면:
AI가 유저의 취향이나 맥락에 따라 콘텐츠의 순서를 바꾸거나 특정 기능을 숨기려면, 디자인은 유연해야 합니다. 버튼, 카드, 배너 등을 독립된 모듈로 철저히 규격화하여, AI가 실시간으로 조립할 수 있는 확장성 높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유저의 심리 모델을 더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같은 음식 추천 화면이라도 '지친 퇴근길 유저'와 '친구들과 놀러 온 유저', '첫 방문 유저'와 '헤비 유저'의 상태는 완전히 다릅니다. 어떤 데이터 트리거가 이 상태를 전환시키는지, 어떤 순간에 선택지를 과감히 줄여야 하는지 시나리오를 짜는 것은 단순한 UI 설계를 넘어선 인간 행동 모델링입니다.
유저가 찾기 전에 먼저 제안하는 것이 AI UX의 정수입니다. 예를 들어, 그랩 챗을 디자인할 때 단순히 빈 입력창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유저들의 대화 맥락을 감지하여, 대화에 나온 음식이나 식당 이름이 'Pill' 형태로 먼저 떠오르게 합니다. 이를 클릭하면 레스토랑 추천으로 이어지고, 자연스럽게 그룹 오더로 연결됩니다. 인지 부하를 최소화하는 스마트한 시스템 설계입니다.
AI는 맥락에 맞는 논리적 추천을 아주 잘하지만, 그 추천이 주는 '감정'은 여전히 사람이 설계해야 합니다. 유저의 성향에 맞춘 다이내믹 톤앤매너를 넘어, "이 개인화 추천이 소름 끼치진 않은가?", "이 타이밍에 넛지를 주는 것이 유저에게 부담스럽진 않은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기술적 가능성이 커질수록, 이를 통제하는 디자이너의 공감 능력은 더욱 예리해져야 합니다.
AI는 디자이너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디자이너의 사고 구조와 제품의 설계 방식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강력한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AI 시대의 디자이너는 인간의 의사결정 흐름과 행동을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기술에 대한 이해가 넓어질수록, 유저를 향한 이해는 더욱 날카로워져야만 이 강력한 도구의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다. 유저와 데이터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유기적인 시스템'을 설계하며 써 내려갈, 디자이너로서의 다음 챕터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