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인 예비신부에게 '왜 그림을 그리나요?'라고 물었더니, '어릴 적 우리는 모두가 화가였어. 세상에 어린이들을 봐~ 모두가 그림을 그리고 있잖아? 그 아름다운 취미를 당신은 멈췄고 나는 멈추지 않았을 뿐이야'라고 답을 했다는 일화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릴 적에는 '그림 그리기'에 있어서 아무런 고민이 없었다. 매우 즐거운 놀이이자, 활력을 주는 취미였으니까. 고민을 시작했던 건 '잘 그려야 한다'라는 압박감이 들던 순간부터였다. 그렇게 좋아하던 그림은 어느 순간 고뇌를 주는 대상이 됐다.
'참 쉽죠(That easy)~?'
그런 나에게 마치 그건 큰일이 아니라는 듯, '참 쉽죠?'라며 당연하듯 물어보던 인물이 있었다.
처음 알게 된 건 부모님과 보던 TV의 프로그램에서였다. 커다란 뽀글 머리에 안경을 쓴 그가 붓을 몇 번 쓱쓱 움직이면 캔버스에 산이 나타나고, 나무가 만들어졌다. 어느 마술사보다 신기하고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그림을 '매우 쉬운 일'로 표현했는데, 몇 번의 붓터치로 완성된 산과 나무를 바라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그림 그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대단한 작품을 남긴 화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훗날 미술사를 되짚어볼 때 그의 이름을 뺄 수 있을까 싶다.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꿈을 심어준 사람, '밥 아저씨'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밥 로스(Bob Ross)이다.
밥 로스(Bob Ross)
'Hi, I'm Bob Ross, and for the next 13 weeks, I'll be your host, as we experience The Joy of Painting'(안녕하세요, 전 밥 로스입니다. 앞으로 13주간 '그림을 그립시다'의 진행자를 맡을 예정입니다)
-The Joy of Painting , 시즌 1 에피소드 1의 인사말
서양화가 밥 로스는 미국의 TV 프로그램인, 'The joy of Painting(국내명: 그림을 그립시다)'를 진행한 인물이다. 그는 이 프로그램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초기의 편성기간을 훌쩍 넘은 1994년까지 약 11년 동안 진행했다. 지금과 같은 인터넷 정보망이 아닌, TV로 각국의 이슈를 접하던 시절에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해졌으니, 그가 받은 전 세계인의 관심과 사랑이 가히 짐작된다.
늘 환하게 웃는 얼굴과 부드러운 인상, '쉽죠'라고 되묻는 그를 바라보면 그의 인생은 그 누구보다 참 순탄했을 것 같다. 그러나 시그니처가 된 그의 헤어스타일이 실은 미용실에 자주 갈 수 없어서 돈을 아끼기 위한 선택이었고, 그 자신은 이러한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일화를 들으니 쉽게 그를 짐작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밥 로스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공군에서 20년을 복무한 미 공군 부사관이었다. 알래스카 공군기지에서 10여 년을 거주할 때 부업 삼아 풍경을 그려서 파는 일을 했을 뿐, 처음부터 전문적으로 그림에 몰두한 인물은 아니었다. 20여 년을 복무하며 훈련소 교관을 맡기도 했지만, 툭하면 소리를 지르는 상관에 지쳐서 미술가의 길로 전향했다.
그는 '그림 그리기'가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상으로서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길 희망했다. 우연한 계기로 임시 진행을 맡은 강연에서 애닛 코왈스키에 의해 프로그램이 기획되었을 뿐, 처음부터 방송을 노리고 그림을 시작했던 것도 아니었다.
방송은 그에게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다'라고 전달하는 매개체였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까지 방영되었다. 특히 그가 사용하던 재료는 일반인에게는 어렵게 느껴지던 유화물감이었다. 어려운 재료를 사용하며 누구보다 쉽고 여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 많은 이들이 매혹되었다.
밥 로스의 작품 @artnet.com
그의 행보가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약 20분 정도면 뚝딱하고 완성되는 그림을 보며, 미술업계의 일부에서는 그의 작품을 두고 '촌스러운 그림'이라고 비판했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짠 하고 그린 그림의 과정이 신기하고 놀라웠으나, 하나의 쇼로 보이는 그의 작업방식이 마냥 달갑지 않은 것이다. 특히 그는 유명 미술대학을 나왔거나, 아트 페어에서 각광을 받았거나, 한평생 작업에 몰두한 작가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그림을 계속해서 '쉽다'라고 표현한 것이 보수적인 측면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또한 그는 '대표작'이라고 불릴만한 작품이 없는 화가였다. 일반적으로 유명 예술가에게는 연상되는 작품이나 이미지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모나리자, 해바라기와 반 고흐, 마릴린 먼로와 앤디 워홀 등이다. 반면, 밥 로스의 그림들을 떠올려보면 '재빠르게 그리는 풍경화'라는 인식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 자질이 부족한 예술가일까?
밥 로스의 작품 @나무위키
발끈한 미술업계에 비해 밥 로스는 딱히 반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으며, 살아생전 약 3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TV에서 10여 년간 그림을 그렸으니 작업량에 있어서는 매우 방대할 수밖에 없었다.
흥미로운 건 미술계의 핫이슈처럼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자신의 작품을 고가에 거래하지 않았다. 많은 예술가들이 매체를 통해 본인과 작품을 홍보하며 활동을 이어가는 것에 비교해보면 납득이 어려운 행보였다. 친숙한 화가의 이미지와 방송을 탄 그림이라는 메리트는 분명 기회였기 때문이다. 사후에 그의 작품을 관리하는 밥 로스 재단 역시 그림을 유통하지 않는 것으로 비추어보아 그의 관심사는 '그림 판매'가 아니었다. (덧붙여, 그의 주 수입원은 작품 판매가 아닌 직접 개발한 미술용품의 판매였다)
그는 '그림은 참 쉬운 것'이라는 행동을 반복하며 작업을 이어나갔다. 색맹인 시청자를 위해 회색으로 그림을 그렸던 에피소드로 비추어보아 그에게 있어서 그림이란 그가 표현하고 싶던 세계이자, 대중을 만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도록 도와주는 매개체였고, 누군가에게 행복과 자신감을 심어주는 도구이자, 때로는 또 다른 누군가를 위로해주는 수단이었다.
@The Joy of Painting
그가 그림을 그리는 기법을 'wet-on wet' 화법이라고 부른다. 유화물감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덧칠해가며, 세필붓의 정밀하고 세밀한 묘사가 아닌 붓이나 나이프에서 나오는 우연성으로 작품의 디테일을 완성하는 화법이다.
그는 주로 과거에 머물렀던 '알래스카'가 연상되는 풍경을 담았다. '하나님이 알래스카를 만드셨을 때는 분명 행복했을 겁니다'라고 말했는데, 그림을 그리며 담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더 짐작해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대체로 그를 닮아 평화롭고 한적하며 때로는 행복해 보인다. 이렇게 한적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빠르고 간단해 보이게 그리며 그는 습관처럼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참 쉽죠'라고.
밥 로스는 생전에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 망치면 어떻게 하죠?'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 역시 참 그를 닮았다.
우린 실수한 것이 아니에요. 행복한 사고가 일어난 것이죠
살다 보면 답을 요구하는 질문들을 연속해서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답에는 옳고 그름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하는 일 속에서 무엇이 정답인지도 모른 채 답을 쫓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그의 짧고 굵은 명대사는 우리의 답이 '틀린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게 그는 오늘날까지 그림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행복과 위로를 오가며 존재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모든 일은 '행복한 사고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이다.
최근 유튜브를 통해 밥 로스의 생전 모습이 회자되고 있다. 그를 바라보며 추억하는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이 괜스레 반갑다. 그를 다시 바라보니 '내가 쫓고 있는 그림'은 무엇일지 생각에 잠겼다.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못 그린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이 이야기하는 그림은 밥 로스가 이야기하는 그림과 다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