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실장 Oct 23. 2019

십대를 위한 스타바

2017. 03.

간밤에 온천 덕을 봤다. 여독이 풀린 가벼운 몸으로 돗토리역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로 든다. 2년 전에 개장한, 번듯한 드라이브 스루 매장이다. 

실내가 훤하다. 천장이 높고 빛도 잘 든다. 큰 테이블과 작은 테이블, 소파의 배치도 적절하다. 역세권이라 그런지 평일 오후 3시인데도 손님들로 북적인다. 

노트북을 하는 직장인이나 이십대 젊은이들이 카페 안쪽을 차지하고 있다. 그에 반해 입구 쪽 창가 테이블은 중고생들로 가득하다. 나는 로그함수 그래프가 담긴 수학 문제와 씨름하는 남학생을 지나 카운터로 향한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이십대 초반의 여직원이 바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오는 길에 구라요시의 찻집에서 맷돌 커피를 마신 터라 홍차로 간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는 블랙티다. 자몽 허니 블랙티에 들어가는 바로 그 블랙티. 인도의 아삼, 스리랑카의 실론, 대륙[중국]의 다원에서 난 까만 찻잎을 블렌딩한 홍차. 

    

   

티바나 컵홀더를 두른 종이컵을 들고 미리 잡아둔 창가 자리로 간다. 분홍색 컨버스와 베이지색 탐스를 신은 여자애가 바로 옆 소파에 나란히 앉아 조곤조곤 수다를 떠는 중이다. 

영국의 아침식사에나 어울리는 홍차를 입에 물자 오늘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시간을 오전 10시로 되돌린 것만 같다.

“실장님, 말이란 게 참 재밌지 않아요? 찻잎의 색만 놓고 보면 까만 블랙티가 맞고, 찻물이라는 음료의 물성으로 보면 붉은 홍차가 맞고.”

J대표가 말한다. 그는 트래블룸[travelroom]이라는 여행 콘텐츠 회사를 운영한다. 나는 여행 가이드북을 만드는 에디터로 이번 출장에 동행했다.  

“어디다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인과관계를 중시한다면 블랙티 쪽이고, 찻물의 색이나 향을 음미하면서 마시는 행위에 집중한다면 홍차 쪽이고.”

J대표는 내 말에 동의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서양의 차이랄까, 사물을 보는 관점이 그 지점에서 갈리는 것 같아요. 유럽인들이 이성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쪽이라면, 우리는 그런 구분이 덜하잖아요. 순간의 감각이나 감정, 직관에 끌린다고 해야 하나?”

동서양의 문명이 혼재하는 터키의 이스탄불에선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대표는 어느 쪽이 끌려요? 블랙티와 홍차 중에서.”

“음, 홍차 쪽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답을 하려니 어렵네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생각을 제가 요즘 자주 해서….”

대표들은 그런다. 결과를 알 수 없는, 그럼에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골치 아픈 일을 종종 겪는다. 딱히 위로가 되는 말을 찾지 못해 홍차를 한 모금 마신다.     

    

  


돗토리는 인구 60만이 안 되는 작은 현이다. 일본의 도도부현 가운데 인구가 가장 적다. 그래서인지 일본에 있는 47개 현 중에서 스타벅스가 맨 마지막에 들어왔다. 

“서울로 치면 도봉구네요.”

“도봉구요?”

도봉구에 딱 하나 있는 스타벅스 쌍문역점이 화제에 오른다. J대표는 김수영 시인은 몰라도, 아기공룡 둘리는 잘 아는지 “아, 쌍문동이요!” 한다.

“돗토리가 지방의 작은 소도시지만 커피 부심이 있어요. 스타벅스 따윈 없어도 돼, 하는 기개가 있죠. 프랜차이즈보다는 로컬 카페를 응원하는 분위기도 남아 있고.”

이곳 스타벅스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스나바커피가 있다. 모닝세트를 주문하면 토스트와 도넛, 삶은 달걀, 슬라이스햄이 한 접시에 담겨 나온다. 물론 커피도 같이 낸다. 

“가성비가 좋군요?”

“좋죠.”

스타바 대신 스나바! 한때 이런 캐치프레이즈가 유행했다. 일본에선 스타벅스를 ‘스타바’로 줄여 부른다. ‘스나바[砂場]’는 모래가 있는 곳, 즉 돗토리 사구를 이른다. 

“스타벅스 대신 사구가 있는 곳? 그런 뜻인가요?”

“맞아요. 그게 바로 돗토리현이죠. 바다와 인접한 거대한 모래언덕은 그 자체로 유니크하니까요.”

커피 대신 망고바나나를 앞에 두고 미적분 문제를 풀던 남학생과 눈이 마주친다. 나는 스타벅스에서 이렇게 많은 십대를 본 적이 없다. 

“궁금해서 하는 말인데, 스나바커피엔 십대 손님이 많아요?”

J대표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십대는 어디를 가나 어른들이 벌이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하지만 십대를 위한 스타바는 있다.

낮게 흐르는 음악, 환하고 캐주얼하고 현대적인 분위기, 유니폼을 맞춰 입은 젊은 스태프, 녹색의 사이렌 로고…. 스타바를 찾은 십대들은 한껏 들떠 있다. 달달한 설탕이 코팅된 던킨 글레이즈드처럼. 

그들은 스타벅스를 통해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은 사구에서 멀리 떨어진 대도시일 확률이 높다. 기차로 3시간 남짓 달려야 나오는 고베나 오사카 같은.

두 여학생의 웃음소리를 쫓아 고개가 기운다. 탐스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뭐라고 하자 컨버스가 관심을 보인다. 두 사람 앞에는 각자의 접시가 놓여 있다. 웃음을 나누지만 음식을 나누진 않는다. 

   

   


스타벅스 샤미네 돗토리점에도 돗토리 한정 스타벅스 상품이 있다. 겐즈이가마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사구 머그컵이 눈길을 끈다.

사구 머그컵은 팔 할이 바다다. 다시 보니 하늘같기도 하다. 아이디어가 좋다. 표현의 대상은 그대로 두고 배경에 칠을 했다. 민트색이 도는 파란 유약을 도톰하게 바르고 남은 하단의 완만한 굴곡이 사구의 능선이었다. 

  

  

“실장님, 고기 먹으러 가시죠.”

J대표가 어깨에 손을 올린다. 차로 10분 거리에 아유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고깃집이 있는 모양이다. 

아유미는 돗토리에서 나고 자랐다. 이곳 중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으로 건너가, 슈가라는 4인조 걸그룹으로 데뷔했다. 하리수의 성대모사를 잘했던 걸로 기억한다. 벌써 15년 전 일이다.

사구 머그컵의 안쪽 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득 내가 잘못된 장소에 와 있는 기분이 든다. 엉뚱한 장소에서 오후의 홍차를 마시며 오후의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만 같다. 

십대의 아유미도 사구의 능선 위에서 바다 같은 하늘을 보며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실장님, 안 가세요?”

머그컵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테이블로 간다. 가방의 지퍼를 연 적이 없는데도 자꾸 뭘 두고 가는 기분이 든다. 

돗토리에는 십대를 위한 스타바가 있다. 그들은 각자의 음식을 앞에 두고 웃음을 나누는 중이다.  

해가 지기 전에 사구에 가 닿을 수 있을까?

나는 무슨 실마리를 찾는 기분으로 손목의 시간을 확인한다. 시침은 5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이전 11화 자몽 허니 블랙티의 맛도 잘 모르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