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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장 Nov 03. 2019

이탈리아인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방법

2019. 07.

배움은 끝이 없다. 살면서 반도체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에 대해 공부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제품을 만들려면 포토레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가 꼭 필요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들어왔다.

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조치 이후로 유니클로 매장은 손님이 크게 줄었다. 여의도 IFC몰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손님과 직원의 숫자가 비슷했다.  

나는 유니클로 앞에 있는 스타벅스 리저브로 향했다. 박선배가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는 내 것이었다.  

둘레에 호두가 촘촘히 박혀 있는 당근 케이크를 포크로 가르며 박선배가 말했다.

“호날두, 걘 정말 안 되겠더라.”

호두가 아니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얘기였다. 

박선배가 간밤에 겪은 일을 말했다. 그는 팀 K리그와 유벤투스의 친선경기가 열리는 상암월드컵경기장을 찾았다. 전반전은 좋았다. 후반이 문제였다. 호날두는 끝내 그라운드를 밟지 않았다. 벤치에서 일어나 몸을 풀지도 않았다. 

  

출처_ 뉴스1

     

경기 막바지에 팬들이 메시를 연호하며 야유를 보냈지만, 호날두는 요지부동이었다. 경기를 마친 이동국 선수가 말했다. 

“메시가 세계 최고의 선수인 것 같아요.” 

박선배는 중학생 아들과 유니폼을 맞춰 입고 30분을 기다려 경기장에 입장했다. 비가 내려 꿉꿉했다. 찜통 같은 경기장에서 부채질을 하느라 팔이 아팠다. 경기는 한 시간이나 늦게 열렸고, 끝내 벤치를 지킨 호날두는 인사도 없이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중국에서 풀타임으로 뛴 거 알아? 코리아 패싱이야. 한국 팬을 호구로 본 거지.”

박선배는 마음이 상했다. 무시를 당했다고 느꼈다. 그는 포크로 호두 조각을 떠서 보란 듯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패싱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죠.”

내가 말했다. 유벤투스와의 친선선이 열리기 하루 전 ‘2019 OK’란 소행성이 지구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브라질의 한 천문대에서 불과 몇 시간 전에 이 소행성을 발견했고, NASA의 직원들은 비무장지대의 철책에 난 개구멍을 뒤늦게 발견한 초소병처럼 적잖이 당황했다.

“크기가 커?”

“상암경기장만 하죠.”

“그 정도 크기의 행성이 지구랑 충돌하면 어떻게 되는데?”

“도시 하나가 싹 사라지죠. 서울 같은.”

   

    

2019 OK는 한밤에 미등을 끄고 달리는 스텔스 차량처럼 불쑥 나타나, 지구로부터 7만 킬로미터 거리를 지나갔다.

“7만 킬로미터면 엄청 먼데?”

“지구와 달 사이의 5분의 1 정도니까, 그리 멀진 않죠. 우주의 스케일로 보면 머리카락 한 올?”

“머리카락 한 올?”

박선배는 우주의 스케일을 가늠하기라도 하듯 앞머리를 당겨 콧마루에 붙였다. 그 바람에 두 눈이 안쪽으로 몰렸다. 

나는 웃었다. 박선배는 어느 때보다 얼굴이 좋았다. 지난봄에 강남의 한 성형외과를 찾아 눈 밑의 주름을 없앴다고 했다.  

우주의 스케일은 알 수가 없다. 빅뱅 이후로도 우주는 자라는 중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스케일을 고민하고 산다. 집의 평수나 한 달 치 공과금, 내 카드의 스타벅스 할인율 같은 걸 고민하면서.

“어휴, 그놈의 날강두!”

박선배는 2019 OK의 ‘어스 패싱’ 따위는 잊어버리고 또 호날두를 욕했다. 나는 그가 호날두를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호날두 노쇼 사태의 불똥이 엄한 데로 튀었다. 기자회견장에서 유벤투스 감독의 통역을 자처한 알베르토 몬디가 입방아에 올랐다. 

“호날두가 그렇게 보고 싶으시면 이탈리아에 와서 보세요. 그러면 항공권은 제가 사드릴게요.”

마우리치오 사리 감독의 이 말을 거르고 통역을 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알베르토의 SNS에서 설전이 벌어졌다. 박선배의 페이스북에 그 기사가 링크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의 집으로 돌아간 호날두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호날두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다만 알베르토는 걱정이 됐다. 

나는 알베르토가 쓴 《이탈리아의 사생활》을 흥미롭게 읽었다. 누군가의 사생활이 담긴 책을 읽고 나면 친밀감이 생긴다. 그가 남 같지 않았다.

   

   

알베르토는 유벤투스의 열성 팬으로, 스물한 살 때까지 세리에 D에서 축구선수로 뛰었다. 재미난 건 알베르토의 두 남동생은 AC 밀란의 팬이라는 거다. 10년 넘게 이들을 돌본 베이비시터의 남자친구가 AC 밀란의 팬이었다. 

나는 AC 밀란을 좋아하지 않는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한때 이 팀의 구단주였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도, 아르마니 슈트도 나와는 인연이 없었다. 밀라노는 너무 멀었다. 내가 밀라노를 체감하는 연결고리는 스타벅스 정도였다. 

알베르토의 말마따나 밀라노의 고풍스런 우체국 건물에 이탈리아의 첫 번째 스타벅스가 들어섰다. 미국의 시애틀, 중국의 상하이에 이어 세 번째로 들어선 리저브 로스터리 매장이었다.  


이탈리아인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아주 간단하다. 맛없는 커피를 주면 된다.     

    

알베르토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이탈리아에서 커피는 에스프레소로 통한다. 구들장 같은 커피머신의 워머에서 은근하게 덥혀진 데미타세 잔에 뽑아낸 진한 커피를 즐긴다. 물을 탄 아메리카노는 커피로 안 본다. 게다가 종이컵이라니! 

커피로 해장을 하는 나라, 하루에 에스프레소 두세 잔은 꼭 마시는 사람들에게 종이컵은 뭐랄까, 뚝배기 그릇에 담아 토렴한 국밥이 아닌, 종이 용기의 표시선까지 물을 붓고 전자레인지에 돌린 편의점의 간편식 국밥에 가까웠다. 그런 이탈리아인에게 스타벅스라니!

어쨌든 스타벅스는 밀라노를 선택했다. 로마나 나폴리가 아닌 밀라노를 점찍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밀라노에 문을 연 스타벅스 이탈리아 1호점

  

“뭐, 밀라노라면 그럴 만하지.”

알베르토는 ‘못생긴 밀라노인[Milanese imbruttito]’이란 말로 이야기를 풀었다. 해를 볼 여유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얼굴이 허여멀건 사람들의 도시.

어떤 취향은 편견을 낳는다. 취향은 기호에서 출발하고, 좋고 싫은 것들의 리스트가 작성되는 순간 선호의 위계가 드러난다. 우리는 편견을 피할 수 없다. 이쪽의 생각은 저쪽의 생각과 다를 수 있고, 이런 치우침은 우리가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보듬어야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의 패턴이기 때문이다. 

사과를 좋아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아오리 사과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부사[후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오리 사과는 사과가 아니지”라고 한다고 해서 예민하게 굴 일은 없다. 하지만 부사를 먹는다는 사람이 “아오리 사과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겠다”며 톱을 들고 나서면 상황이 달라진다.

차이와 차별을 구분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말 두려운 일은, 차별이 시스템 안에 녹아들어 그 다름을 구분하는 눈이 정말로 멀어버릴 때 일어난다.

나는 알베르토의 인스타그램 창을 닫고 오늘의 커피를 마신다. 필터로 내린 케냐 AA는 식어도 맛이 좋다. 

“어이, 못생긴 밀라노 친구! 스타벅스라니! 이젠 커피 한 잔도 제대로 못 마시겠네?”

나는 알베르토의 이 농담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알베르토 몬디에 대한 내 호감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사생활만큼이나 그의 사생활이 존중받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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