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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장 Jun 30. 2017

06. 녹슬고 빛바랬지만, 아직은 멀쩡한

# 다케토미섬_ 더치바이크 라이딩1

다케토미 마을을 둘러보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냥 걷기, 물소차 타기, 자전거 몰기. 

두 발로 걸으나 물소가 끄는 달구지에 오르나 크게 다를 건 없다. 소달구지에 앉으면 눈높이가 머리 하나쯤 높아지기는 한다. 


돌담 위로 자란 부겐빌레아의 포엽이 철쭉마냥 붉다. 포엽은 꽃이 아니라 잎이다. 잎이 꽃을 닮아가는 일은 허공으로 가느다란 꽃대를 밀어 올리는 일만큼이나 복잡하고 신비롭다. 어떤 벌레든 속아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화사함이라니.


가슴 높이로 흐르는 담을 따라 걷는다. 섬의 전통 가옥에는 대문이 없다. 두어 걸음 안쪽에서 덧니처럼 툭 불거진 돌담 하나가 바람을 막아설 뿐이다. 이마저도 없는 집은 외지인에게 앞마당을 훤히 내어준다. 


툇마루 옆에 세워둔 냉장고는 음식 대신 잡동사니를 넣어둔 보관함 같다. 철가방맨이 선호하는 125씨씨 오토바이에는 생활의 냄새가 배어 있다. 



마을에는 우체국도 있고, 학교도 있고, 카페도 있고, 자전거 대여소도 있다. 대여소 한쪽에 일렬로 늘어선 자전거는 보기에도 클래식하다. 이 고전적인 디자인은 네덜란드에서 왔다. 


변속기 따위는 없다. 은빛으로 반들거리는 핸들 바에는 손가락으로 레버를 눌러 소리를 내는 아날로그 벨이 달려 있다. 26인치의 바퀴, 체인을 반쯤 가린 가드, 물건을 담을 수 있는 프런트 바구니, 두 개의 스프링이 달린 안장…. 


섬 어디에도 비치크루저는 눈에 띄지 않는다. 온통 더치바이크다. 


비치크루저가 아치를 그리는 유선형 몸에 굵은 바퀴를 달았다면, 더치바이크는 직선의 뼈대가 이룬 삼각형으로 차분한 인상을 만들어낸다. 


비치크루저가 비치팬츠 차림에 크록스 샌들을 신은 남자를 연상시킨다면, 더치바이크는 발목까지 오는 롱스커트에 플랫슈즈를 신은 여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차림을 한 여자들이 모는 더치바이크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리자 지도 한 장을 손에 쥐어준다. 개복치 모양의 지도 위에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길을 빨간 선으로 표시해두었다.      


호시즈나 비치, 콘도이 비치, 니시산바시   


보통은 시계 방향으로 크게 돌아 이 세 곳을 지난다. 





자전거를 몰고 출발한다. 아스팔트길은 경사가 없다. 더치[Dutch], 그러니까 네덜란드의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클래식 자전거가 걸음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길을 지워간다. 


브레이크는 잘 듣고, 안장의 쿠션은 푹신하다. 어릴 때 시골에서 몰던 삼천리 자전거가 생각난다. 

자전거는 크고 투박했다. 굵은 철사를 끼워놓은 것 같은 브레이크 레버, 쌀가마니를 포개도 끄떡없는 너른 짐받이, 뒷바퀴 축에 연결된 코끼리 발 같은 지지대….


사람보다는 짐을 옮기도록 고안된, 달구지를 끄는 물소 같은 자전거였다. 그나저나 울퉁불퉁한 흙길의 골을 타고 엉덩이로 전해지는 안장 스프링의 탄성만큼은 최고였다.


휘파람을 불며 페달을 밟다 길을 잃는다. 뒤돌아보니 2차선 도로를 혼자서 달리고 있다. 이 호젓함이 싫지 않다. 그럴 때 보라고 바구니 안에 지도가 들어 있다.


핸들을 꺾어 왔던 길로 돌아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서 올라오는 두 대의 자전거가 보인다. 꽁무니를 쫓아 왼쪽 길로 방향을 튼다.      





호시즈나 비치의 공터에 자전거를 세운다. 바퀴살에 자물쇠를 채우는 이는 없다. 누가 훔쳐간들 섬 어디를 굴러다닐 게 뻔하다. 머드가드에 붓으로 적어둔 대여소 이름과 식별 번호만 알아두면 된다. 


호시즈나[星砂]는 별모래를 뜻한다. 이곳은 가이지 비치의 일부로, 해변에 쪼그려 앉아 별모래를 찾는 이들로 늘 붐비는 곳이다. 

별모래를 찾는 법은 간단하다. 젖은 모래에 손바닥을 찍어 고래밥 과자 모양으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작은 모래를 골라낸다. 


별모래는 진짜 모래가 아니라,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 중 하나인 유공충의 껍데기이다. 그러니까 유공충의 유해가 물살에 떠밀리며 모서리가 닳아 몽글해진 것이다. 


손을 털고 일어나 해변을 둘러본다. 그 많은 호시즈나는 어디로 가고, 뾰루지 같은 산호석만 또각또각 돋아 있다.


입구 쪽 가판으로 걸어가다 나무 그늘에 숨은 그네를 발견한다. 

빨래 건조대처럼 두 다리를 벌리고 선 노란 그네의 이력이 궁금하다. 머리가 제법 굵어진 아이에게 버림받은 후, 고독을 곱씹으며 가까운 바다를 향해 어깆어깆 걸어가다 이곳 해변에 닿은 것만 같다.



녹슨 지지대를 손으로 잡았다 놓는다. 손바닥에서 피 냄새가 난다. 녹슬고 빛바랬지만, 아직은 피가 도는 멀쩡한 그네다.


노란 그네는 호시즈나 비치에서 외롭지 않을 것이다. 섬에서 나고 자라 두 다리로 걷게 된 아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 이곳에 들러 그네에 몸을 맡겼을 테니까. 마주앉아 까르르 웃으며 스윙의 리듬을 온몸으로 깨친 두 아이가, 훗날 어른이 되어 사랑의 연을 이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별모래를 구실로 이곳에 닿은 두 연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호시즈나 비치의 노란 그네가 삐거덕하며 그 웃음에 동조한다.


별은 곁에 있다. 

그네를 흔든 바람이 시치미를 떼고 나뭇잎 뒤로 몸을 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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