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케토미섬_ 더치바이크 라이딩2
자전거를 달려 콘도이 비치에 닿는다. 이곳은 태안의 꽂지 해변만큼 넓다. 그러나 그 폭넓음은 해변의 길이가 아니라 바다의 깊이에서 온다.
수심이 정말로 얕다. 백 미터를 걸어 들어가도 어깨가 잠기지 않는다.
시월의 끝자락이라 물에 뛰어든 이는 없다. 파랑과 하양이 섞인 비치파라솔도, 망고빙수를 파는 버스도, 맨발로 걷다 해삼을 밟아 움찔하는 이도 없다. 벤치 테이블 밑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 두 마리가 다다. 그 휑한 풍경을 뒤로 하고 페달을 밟아 다시 북쪽으로 달린다.
한적한 숲길의 맞은편에서 자전거 두 대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두 여자가 발을 구르고 있다.
그래, 인연은 시계 방향으로 도는 사람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사람이 마주칠 때 일어나는 화학반응 같은 것이지.
Na2CO3+CaCl2→CaCO3+2NaCl
탄산나트륨과 염화칼슘이 만나 탄산칼슘과 염화나트륨이 된다. 써놓고 보니, 화학식이 사랑 방정식 같다.
주기율표를 만든 러시아의 화학자 멘델레예프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사랑은 말이야, 내 안의 뭔가를 내어주는 대신 타인의 뭔가를 받아들여 새로운 앙금이 되는 거야.”
다만, 명심할 것이 있다. 그 누구든 사랑 앞에 자신이 가진 모두를 꺼내놓아서는 안 된다.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너무 아픈 사랑도 사랑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랑은 당신을 끝까지 추궁하고 시험한다. “정말 그게 전부예요?”라고 물으며 절벽으로 내몬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이들은 허공에 발을 디딜 때까지 밑천을 모두 드러내야 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럴 땐 명심[銘心]도 먹히지 않는다. 끝끝내 추락해 다리 하나 정도는 부러져야 끝이 난다. 깁스를 풀고 붓기가 가라앉을 즈음 앙금은 거름이 되어 있을 테지.
니시산바시[西桟橋]는 섬의 서쪽에 있는 잔교를 말한다. 실제로 보면 잔교라기보다는 배가 접안하는 부두의 간이 선착장에 가깝다. 바다 위로 나무 기둥을 세우고 상판을 올린 게 아니라, 바다 쪽으로 콘크리트 둑을 쌓아 길을 연장한 모습이다.
선착장 하면 늘 생각나는 곳이 있다. 바로 전라남도 순천의 와온 해변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방패 간[干] 자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개펄을 향해 툭 불거져 있다.
이곳으로 날 이끈 이는 곽재구 시인이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사평역에서〉란 시를 쓴, 바로 그 시인.
우리는 순천대 근처에 있는,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꼭 닮은 카페 앞에서 처음 만났다. 간판에 ‘후두둑’이란 이름을 달고 있었다.
시인은 안식년을 맞아 인도에서 1년 반을 머물렀다. 그 대부분의 시간을 타고르의 고향인 산티니케탄에서 보냈고, 그 쉼표 같은 시간들이 산문으로 영글어 한 권의 책이 되었다. 《포구기행》 이후 9년 만에 펴낸 산문집은 《우리가 사랑한 1초들》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잡지사 기자로 그를 인터뷰하러 내려온 길이었다. 시인은 커피가 든 머그잔을 내려놓고 함께 가볼 곳이 있다며 길안내를 자청했다.
봉고차에 올라 동천을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시인이 손을 들어 가리킨 다리를 건너자 차 두 대가 간신히 비켜서는 좁다란 농로가 나왔다. 여기가 지름길이라 했다.
863번 지방도에 올라 속도를 냈다. 오른쪽 길로 방향을 틀어 조금 더 달리자 와온마을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와온은 이 땅의 바다를 숱하게 돌아본 시인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었다. 《포구기행》에서 순천만 일대를 이야기할 때 화포, 거차와 엮어 그 이름을 슬쩍 끼워 넣는 사연을 그제야 들었다.
첫인상은 무덤덤했다. 보랏빛 낙조에 물든 어스름에 닿았더라면 또 달랐을 것이다. 대낮의 풍경은 남해의 여느 바다와 견주어 새로울 것이 없었다. 시인은 풍경이 아니라 이름을 좇은 것이 아닐까?
누울 와[臥]에 따듯할 온[溫]. 소가 누워 내려다보는 따뜻한 바다.
다도해의 섬에 걸려 넘어진 파도가 여자만에 이르러 숨고르기를 하고, 이곳 순천만으로 흘러들 즈음 희로애락의 감정을 모두 소진하고 잔잔한 그리움만 남은, 그런 평정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을 와온에 데려오면 그 반응이 꼭 둘로 나뉘어요. 성공해서 잘나가거나 걱정이 없는 사람은 볼 것이 없다 하고, 인생에서 좌절을 겪었거나 고민이 있는 사람은 이곳 풍경에서 따듯한 위로를 받더군요. 저기 있는 건물 보이세요?”
시인이 솔섬 맞은편을 가리켰다. ‘나루’라는 이름을 단 카페가 그곳에 있었다.
“IMF 때 사업 실패로 괴로워하다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던 친구가 이곳 풍경에 반해 터를 잡았어요. 일용직으로 하루 벌이를 하면서 조금씩 돈을 모아 지금의 땅을 사고 건물을 올렸죠. 그리고 카페를 열었어요. 보름날 새벽이면 달빛에 물든 와온의 풍경을 보려고 서둘러 잠을 청하는 친구죠.”
방패 간자 모양으로 뻗은 선착장에서 시인은 와온 얘기만 했다. 인도의 산티니케탄 얘기는 하지 않았다.
“이곳에 가로등이 열여덟 개 있어요. 이미 하나씩 분양을 마쳤는데, 왼쪽 끝에 있는 16번이 제 가로등이죠(유독 그 가로등만 바다를 향해 기울어 있었다). 또 계단이 열 개인데 모두 밑으로 나 있어요. 물때에 맞춰 잠겼다 드러났다 하죠. 계단 하면 위로 오르는 상승의 이미지가 강한데, 이곳은 하강의 이미지가 있죠.”
듣고 보니 그랬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는 어느 연극 무대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무대 끝은 바다였다.
고개를 드니 두 척의 고깃배가 정오의 햇살 아래에서 요지부동이었다. 그 탈색된 풍경을 보고 있자니 까닭 모를 슬픔이 밀려왔다.
니시산바시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곳에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잔교를 목전에 두고 체인이 빠져 톱니가 헛도는 누군가의 자전거를 손본 일이다.
손에 묻은 기름때를 모래에 문질러 닦고 자전거에 오른다. 이제, 페달을 밟아 마을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그러고 보니 니시산바시에 닿아 와온 얘기만 했다. 늦게나마, 다케토미의 앞바다가 와온처럼 따듯하고 평온했음을 일러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