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욱 개인전

by 서한겸

살아있는 듯한 형태에 빼곡히 촉수가 뻗어 있다. 모든 방향에서 자극이 오고, 그래서 모든 방향으로 감각해야 했던 생명체일까. 또는 가시라 해도 피가 날 듯 날카롭지는 않다. 무엇인가를 공격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설사 쓸리고 꺾일지라도 자신의 구심점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둥근 중심은 손에 쥐어보고 싶어지지만 가득한 가시 혹은 촉수 때문에 선뜻 닿기 어렵다. 기둥의 기능은 주로 그 자리에 우뚝 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가시는 함부로 다가오지 말라는 표시이다. 가시를 단 화병들은 쉽게 날 움직이려 하지 말라는 느낌을 주지만 역시 만져보고 건드려 보고 싶어진다.

이 뾰족한 형태들은 그 중심을 위해 돋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심과 외부와의 관계에서 오히려 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들의 상호작용을 조용히 지켜보는 일은 갑자기 나는 어떻게, 왜, 이러이러하게 생겼나 하는 새삼스러운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에게, 안팎으로, 가장 중요한 특성은 무엇인가. 그것을 중심으로 행동하고 움직이게 되는,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또는 아직 얻지 못했지만 언젠가 꼭 채우고 싶은 것, 그것을 위해 내 한가운데를 비워두는 것일 수도 있다. 그를 위한 빈자리를 중심으로 나 자신을 형성하는 그러한 것.

길쭉하게 솟아난 부분들을 다시 본다. 이들은 살아서 물결이나 바람의 흐름을 타고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준다. 황토색 적색 녹색 청색. 어느 쪽이든 자연에 있을 법한 색 위에 역시 자연스러운 얼룩을 가지고 있다. 특히 반짝임은 촉감과 질감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모든 것이 그리 쉽게 반짝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연이나 사람이 시간과 열과 힘을 들여 연마해야만 빛나는 면이 생긴다. 그래서 인간은 반짝이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이 두고 싶어 한다.

그 귀한 것 안에는 얼마나 더 귀한 것이 들어 있을까. 뾰족한 끝에 손에 대지 않고서는 그것을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보거나 꺼낼 수 없다. 열리게 되어 있고 열어보고 싶으나 그 촉수나 가시들이 위험하지는 않을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무엇이 들어있을까 기대하게 된다. 그 안이 비어있다 해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일 테다. 무언가 빠져나갔다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무언가를 담기 위해 자리를 남겨놓은 것이라 생각하면 아늑하거나 다행스럽기도 하다.

손에 알맞은 크기의 빈 공간 주위로 뿔이 난 모습도 있는데, 그 안에 부드럽고 따뜻한 음식이 담긴다 해도 뿔들이 경계를 늦추지 않을 것만 같다. 잔은 잔이되 거기에서 돋아난 길쭉한 부분들은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뻗어 나올지 모르는 뿌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규칙적이면서도 제각기 다른 형태의 가시와 뿔들은 인간이 지은 건물에 돋아난 식물의 모습을 떠올린다. 구워낸 흙이 주는 유물의 뉘앙스는 인공물과 자연물이 하나가 된 채로 화석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작품들은 줄곧 두 방향의 감각을 전한다. 사람의 손길과 자연물의 느낌, 둥글고 뾰족함, 닿고 싶은 충동과 경계, 보호와 열림, 지키고 싶음 또는 받아들임, 공격과 방어. 이 두 방향의 의지와 충동들이 하나가 되어 있다.

어떤 가시와 중심에서는 종유석 같은 다리들이 돋아나 스스로를 들어 올린다. 마치 그 가운데를 보호하면서도 동시에 돋보이게 하려는 듯하다. 보호와 돋보이게 하는 것은 정반대 되는 행위일 수 있다.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감추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하고 보배로운 것도 묻힌 채로는 반짝일 수 없고 소중하게 여겨질 수 없다. 주목받고 높여지고 빛을 받음으로 인해 그 가치가 드러난다. 그러나 매우 소중하게, 가장 적절한 조심과 경계와 함께 드러나야만 한다. 이렇게 저마다의 중심과 그를 위한 가시와 뿔과 다리가 모든 크고 작은 귀한 것들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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