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정직성 개인전 '검은 평면으로부터, 표현하는 자연'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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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인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인가. 그 무엇도 아닌 마음속에 떠오른 형상인가. 빛나는 조각들이 저마다 존재감을 발하면서 큰 힘을 따라 출렁댄다. 비가 되어 한데 떨어진다. 흰 꽃이 눈에 띄지만 모든 부분이 여러 색으로 화려하게 빛난다. 어떤 리듬에 따라 모이고 갈라지고 끊어지며 연결되는 여러 폭의 숲은 더 이어져 나갈 이미지, 더 넓은 흐름을 암시한다.
빈틈없이 검은 배경은 그로부터 몸을 내미는 빛 조각의 물성을 더 또렷하게 한다. 물에 비치는 듯 거울인 듯 이리저리 빛나는 자개는 저마다의 그림자조차 거느리며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실제로 생명체가 남긴 흔적인 이들은 어떤 신체적인 의아함을 주기도 하는데, 가령 조개는 자신이 이렇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것을 알았을까. 뼈. 내 뼈도 빛날까. 이렇게 갈리고 닦인다면.
인간은 시대와 사회라는 거대한 체계 속의 생명체다. 인간의 활동 또한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며 모양 지어진다. 작가 역시 생활인이며 집세를 내기 위해, 서류 작업을 위해, 가족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물론 이들도 존엄한 일이지만) 삶의 일부를 써야 한다. 그럼에도 삶, 또는 더 나은 삶, 또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의지로 계속해 나간다. 자본주의에 기반하여 자본주의에 반하는 행위를 업으로 삼아 굳이 시간과 공간과 에너지, 그러니까 삶을 쓴다.
삶과 현실의 문제를 형식적으로 가치 있는 모습으로 표현해 내는 일.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만들면서도 끊임없이 변주해 어휘를 풍부하게 하는 일은 인생을 두 번 걸어도 쉽지 않을 듯한 추구다. 그러나 심지어 머물러 있고 싶은 순간에조차 삶은 변하고 만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있기를 그치지 않듯이 그치지 않고 작업을 계속한다면. 삶과 같이 작업도 변화한다.
회화는 본능적인 감각을 전달한다. 눈물이 뺨 위에 그리는 선. 흙 위에 뿌려진 피. 동물이 할퀸 흔적. 길을 찾기 위해 놓아둔 돌 표식 같은 것. 회화의 흔적은 신체의 연장이자 작가의 유물이다. 곡선에서는 팔꿈치와 어깨의 관절, 직선에서는 힘주어 고정된 근육이 느껴진다. 붓으로 그어지고 덮인 화면은 어떤 지형이나 나무와 물 같은 것을 떠올린다.
강한 대비와 절제된 팔레트로 삶과 자연이 공유하는 생동과 에너지를 전달해온 작가는 구체적이고도 원시적인 오브제와 전통적 공예 기법을 이용해 목적 없는 아름다움을 좇았다. 반짝이는 조개껍질은 고대부터 귀하게 여겨진 문명화된 자연물이다. 장인의 솜씨로 제작된 판에 작가가 자개 조각들을 칼로 쳐 색을 배치해 붙인다. 정교한 인공이 자연의 결정적 장면을 포착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숲. 비. 또는 기후 공기 압력. 자연의 힘, 무서움, 경이, 위대함. 제어되지 않는, 절로 그러한 에너지의 흐름. 순순히 몸을 맡겨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어도, 혹은 반발하려 해도 나는 이미 그 거대한 압력과 파동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다시 이어붙여질 수 없을 그들을 칼로 치는 소리. 크게 휘두르는 붓질도 시원하지만 가장 가는 조각의 자개를 끊는 행위도 꽤 결단을 내려야 하는, 꽤 숨이 가쁜 일이 아니었을까.
검게 빛나는 깊이 없이 먼 하늘. 번개빛에 잠시 보이는 태풍 속의 숲. 아니면 아름다운 환영. 무엇이든. 빛의 리듬으로 일렁이는 시공간이 관객 앞에 우뚝 선다.